인외 서커스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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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외"란 단어는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고는 하나 우리말에서는 그리 널리 쓰이지 않습니다. 다만 "인외마경" 같은 말에서 접하는 정도죠.

이 판타지 스릴러는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인외"와 "서커스"를 다룹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유명한 서커스단이 파산 보호 신청을 했다는 뉴스도 나왔습니다만 유행병이 아니라 해도 요즘 세상에 서커스를 구경하긴 힘듭니다. 엄청난 완력을 지닌 데다 거의 불로불사에 가까운 흡혈귀 역시 마찬가지(?)지요. 어렸을 때는 모르겠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인외든 서커스든 그리 큰 관심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말입니다.

소설은 별다른 서두도 없이 대뜸 흡혈귀와 인간 사이의 격렬한 전투 씬부터 시작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흡혈귀는 완력이 매우 강하며 일부는 비행도 가능한데(대체로 판타지에 피처링되는 흡혈귀는 날 수 있긴 합니다만), 이에 대항하는 인간들은 수가 많고 무기가 강력할 뿐 그저 인간일 뿐인데도 기술과 용기가 범상치 않아 자기 임무를 잘 해 냅니다(한참 뒤 p253에, 평범한 인간은 흡혈귀를 절대 이길 수 없으며 예외 조건을 어느 녀석이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서두의 전투 씬을 이미 구경한 독자는 수긍할 수밖에 없겠죠). 그렇다고는 쳐도 무슨 소설이 대놓고 본론부터 펼쳐지나 싶었는데, 그건 제 착각이더군요.

서두를 장식한 인간 콘서시움(소설 속에서 이런 용어를 씁니다)은 알고 보니 일종의 바람잡이였고, 작품의 진주인공들은 가난한 유랑 서커스단원들로서 훈련을 통해 몇 가지 특별한 기술을 갖춘 것 말고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흡혈귀는 본래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원기를 유지하는 놈들이니 사람을 죽이는 건 이상할 게 없으나 왜 하필 이 서커스단원을 표적으로 삼았는가. 앞부분에서 흡혈귀만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콘서시움이 서커스단으로 위장했다는 말을 듣고 혹 이들이 그들이 아닌지 착각해서였습니다. 가뜩이나 경영난에 시달리며 고생하던 단원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는 격입니다. 아무튼 소설의 진짜 사연은 지금부터 펼쳐집니다.

소설은 판타지 장르이지만 여러 곳에서 작가의 깊은 성찰의 산물일 듯한 인간사 보편의 진리가 읊어지는 점이 좋았습니다. 소설 내내 인물들은 누가 적이고 누가 내 편인지, 피아식별의 과제와 의무감을 마주합니다. 사르트르도 "타인은 그저 지옥"이라 말했지만, 사람은 설령 가까운 친구, 친척이라 해도 마냥 동질감과 유대를 형성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란 본디 개체로서의 강렬한 느낌과 독자성을 자각하며 사는 동물입니다.

흡혈귀는 신체적으로 탁월한 존재이지만 개체 생존을 고집하는 건 아니라서 캐릭터인 그리즐리와 그의 부하들은 조직을 이뤄 살아갑니다. 반면 미티어처럼 "고독한 늑대"처럼 사는 녀석도 있나 봅니다. p248에 보면 어떤 놈(스포일러)이 자신을 가리켜 "무리에 속해 있긴 한데 권력관계일 뿐 애정은 없다"고 하는데,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 중에 나온 소리이지만 이 부분만큼은 진짜인 듯 보였습니다. p290에서 누가 하는 말 중 "녀석들이 죽었다고 별 느낌은 없어"라든가, p321에서 "녀석들의 분열은 놀랄 일도 아니"라는 전문가의 말에서처럼, 흡혈귀 종족의 연대감과 윤리의식, 성숙도는 가히 최악 수준입니다.

어쨌든 간에 흡혈귀들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터라, 과연 그들이 우리와 같은 생물인지부터 의심스럽지만 중반 이후 등장하는 도쿠 노인의 분석에 따르면 "신체의 조직 강도 자체는 우리 인간과 비슷"하며 나중에 란도가 (누구의 도움을 받아) 약점을 밝혀 내듯, 급소는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있으며 정말 우리와 닮은 바 많더군요....

서커스단원들은 여인 기프티라든가 단장 피에로처럼 나이 많은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젊은이들입니다. 그래서 서투르고 미숙한 점도 많지만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정신의 키가 크는 모습이 독자 입장에서 또 볼만합니다. p122에서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해"라며 자신의 기술이 존중 받아야 함을 주장하자, 누가(알고보니 이게 일종의 복선이었음) "그건 네 생각이지 관객의 논리가 아냐."라며 냉정한 현실을 일깨우는 대화 같은 게 재미있었습니다. p130에는 이동전화 기지국 타령도 나오는데 비록 판타지 장르지만 독자는 이런 상황 설정에서 현대인으로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p133에 "하늘을 나는 건 우리잖아?"라고 하는 말이 큰 웃음을 주는데, 사실 공중 곡예사에 지나지 않음은 모를 리가 없건만 이 절망적인 대치 상황에서 용기를 잃지 말자는 유머지요. p142에서 흡혈귀 캐터피라(책의 표기를 따릅니다)가 "하늘을 나는 새는 총에 맞고 싶겠냐고?"라며 비꼬는 대목은 그들의 잔인성을 일깨우지만 인간들도 이 대목에서 자성할 필요가 있죠. 소설 말미에 누가(스포일러) 란도더러 "너희들은 바퀴벌레인데 무슨 연민을 느끼겠냐?"고 하는 말도 뭐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커스단에는 곡예사뿐 아니라 마술사도 있는데 란도와 슈티가 이 작에서 거의 주인공 비중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마술의 비밀이 여럿 설명되는데 작가는 아마 이런 테크니컬한 면에 평소부터 관심이 많았던 분 같습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마술사가 당당히 살펴 보라고 하니 당연히 아무것도 없겠지" 같은 건 우리 관객들이 빠지기 쉬운 심리적 함정입니다. 만약 등장인물 중 누가 누군지 헷갈린다면 p97이하에 비교적 몰아서 소개가 나오니 그쪽을 수시로 참조하십시오. 등장 인물들의 개성을 좀 세밀히 파악을 해야, 뒤에 기다리는 대반전이 더욱 충격으로 다가올 겁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판타지 장르인데도 곱씹어 볼 만한 좋은 말이 자주 나옵니다. 주인공격인 란도는 물 속에서 탈출하는 묘기가 전문인데 공연 중 잘못하다 죽을 뻔합니다. 자신이 세밀히 설계한 장치였는데 하청업체에서 불량품을 넘겨 준 까닭입니다. 이 실패 후 그는 큰 좌절에 빠지는데 이 사정을 간접으로 전해 들은 도쿠 노인은 p167에서 "그를 도울 수 있는 건 그 자신뿐이니 네가 조바심칠 것 없다"며 참으로 현명한 충고를 해 줍니다. 일종의 휴브리스가 그의 발목을 잡은 셈인데 오만과 과신의 함정에 빠진 건 란도만은 아닙니다.

흡혈귀는 여기서 거의 절대 불멸의 존재지만 진짜 약점은 그들의 오만과 그에 따른 방심하는 습성입니다. p282에는 죽은 누구한테 도쿠 노인이 "같은 실수를 반복했던 걸 보니 아직 어린 녀석이었구나"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p203에는 "인간은 우리에게 상대가 안 된다고. ....라기라도 하면 모를까 말야."라고 하는 말이 있고, 같은 페이지에서 "오빠들" 어쩌구 하는데 이걸 보면 확실히 녀석이 어리긴 하죠. 어리긴 어린데 이루말할 수 없이 못됐습니다. 이런 녀석에게 어떤 잔인한 분풀이를 해도 무방할 듯하지만 p283에는 "우린 괴물이 아니니 그럴 수 없다"고 말리는 장면도 있습니다. 허나 니체도 말했듯이 "괴물과 싸우는 자는 (어쩔 수 없이) 괴물이 되기 마련"이죠. 슬프게도 말입니다. 이 대목은 영화 <에너미 게이트>에서 베우 에드 해리스가 잘 소화한 나치 장교의 대사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오만함의 폐해"가 잘 지적된 대목은 p171에서 캐터피라의 오만함, p165에서 역시 자신감 과잉 등을 지적한 곳, p186 그렇다면 그 요구는 부당해 슈티는 정론을 말하고 있다이 있네요.

책에는 상당히 잔인한 묘사가 많은데 앞서 말한 대로 작품 전체는 서사와 교훈, 유머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니 너무 걱정은 안해도 됩니다. 인외마경, 엽기적인 잔혹성을 파고드는 미학은 20세기 전반의 에도가와 란포가 유명한데 p168에는 "신을 모독하는 교잡종" 어쩌구 하는 부분이 있어 더욱 그를 떠올리게 되네요.

p175에서 캐터피라(얘가 제일 못됐죠)가 쿠와이에게 "너, 왜 아직 도망치지 않지?"라고 물어보는 대목이 있는데, 우리 인간이 인간이며 괴물 수준으로 안 떨어지는 이유를 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겠죠? 여기서 독자들은 결코 동료를 버리지 않고(동료뿐 아니라 동물들도 버리지 않습니다) 분투하는 그들, 거의 이길 가망이 없는 싸움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반면 흡혈귀들의 본성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이 독후감 앞부분에서 말했습니다.

p186에서 슈티는 민법 지식에도 꽤 밝은 듯한데(ㅋ), 설계가 잘못되었다고 그 업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고, 그 업자가 그런 사정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어야 한다면서 마치 민법 교과서의 한 대목을 읽는 듯해서 우스웠습니다.("그렇다면 그 요구는 부당하다며 슈티는 정론을 말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작가는 기술적인 면에 꽤 관심이 많은 분인 듯한데, p187에는 아들자가 나오며, p201, p291에는 바이스가 등장합니다. 아들자는 버니어 캘리퍼스라고 불리는 건데 책에도 설명이 나옵니다. 저는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이걸 배웠는데 아니 무슨 실업계 고교도 아니고 일반 중학교에서 국영수 아닌 이런 걸 왜 가르치는지가 몹시 짜증났습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역시 남자의 로망은 공구의 자유로운 활용이며 인터넷에도 DIY를 잘한다며 자랑 삼아 작품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더군요.

뭐 그건 그렇고 바이스에다 머리를 넣어 조이는 잔인한 장면은 1995년 스콜세지 영화 <카지노>에도 나오는데 여기서 거기 머리가 끼인 사람은 압력 때문에 안구가 튀어나옵니다. 작가분이 그 영화를 혹 보기라도 했는지 이 소설 속 묘사 역시 잔인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p179에 보면 "불의 추격 속도가 훨씬 빨라서" 홀랑 타 버리는 흡혈귀의 한심한 최후가 나오는데 이런 장면은 1990년 영화 <다이하드 2>의 마지막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말도 안되는 상대에게는 말도 안되는 방법을 써야 한다는 말이 p210에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오케하자마 전투가 생각났습니다. 여기서 요지는 지나치게 강해 이길 가망이 없는 상대에게는 기습으로 공격을 가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는 거죠. 일반인에게 존재를 알리지 않고 흡혈귀를 처단하고 다니는 건 1997년 영화 <멘 인 블랙>(그 이전에도 마블 원작이 있었지만)도 생각나는 대목입니다(흡혈귀가 외계인으로 바뀌었지만).

묘사가 잔인하지만 마지막에 코끼리, 사자 등 맹수와 힘을 합쳐 놈들을 무찌르는 건 마치 동화 <브레멘의 음악대>가 생각났습니다. 하나하나는 힘이 약하지만 지혜와 용기를 모으면 무찌르지 못할 강적은 없다는 교훈면에서도 그러하죠. 다 읽고 보면 마음이 뿌듯해지는 게, 작가의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세계관이 결국은 효과적으로 작 중에 잘 녹아들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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