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트레스의 힘 - 끊임없는 자극이 만드는 극적인 성장, 개정판
켈리 맥고니걸 지음, 신예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5월
평점 :
"스트레스의 힘"! 강원도의 힘은 들어봤어도 스트레스의 힘이란 말은 처음 들어 봅니다. "강원도의 힘"도,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가 만나 빚는 묘한 효과 때문에 대중의 귀에 오래 맴돌았는데, 스트레스의 힘도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스트레스라고 하면 만악의 근원이고 달갑잖은 불청객에 불과한데 얘가 무슨 힘을 발휘하겠으며, 그 힘이 과연 좋은 데 쓰이기나 할까 싶습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이란 걸 하는 이상 스트레스는 어차피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란 말이 있듯이 스트레스도 잘만 관리, 이용하면 오히려 순기능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게 이 책 저자분의 말입니다.
책에는 먼저 "스트레스 사고법"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물론 "해롭다/그게 아니라 장점을 끌어올리기도 한다"의 이분법입니다. 압도적으로, 무슨 스트레스가 나의 장점 발휘에 기여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연구 결과는 우리의 상식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스트레스의 장점을 발견한다는 증거도 존재한다(p44)." 저자 자신이 최초로 발견했다는 게 아니라, 그저 보통 사람들(저 연구 대상에 포함된)이 실제 스스로 스트레스의 순기능을 찾아내고 그로부터 효과까지 본다는 소리입니다. 어떨까요? 실제로도 "이불밖은 위험해"라며 집 안에서 꼼짝도 않고 머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없고 간에, 우리가 의식을 하건 안 하건 간에, 사람들은 너무 편한 삶이 계속되면 "혹시 이러다 탈(정신적, 육체적) 나는 건 아닌가" 지레 겁을 먹고 일부러라도 모험을 (소소하게나마) 합니다. 작게는 암벽 등반이나 고난도 운동 같은 게 다 포함됩니다. 이렇게 일부러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업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잘 극복하면, 오히려 더 큰 활력과 에너지가 생기기도 합니다.
일부러 빚어낸 스트레스라면 대응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미 그런 걸 스트레스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런데 동기가 뭐가 되었든 간에, 편하고 즐거운 것과 거리가 먼 어떤 불편함이 일단 나의 일상을 가로막고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는 스트레스입니다. 저자는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과정뿐 아니라, "처음부터 스트레스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 자체가 이미 성과의 양과 질을 다르게 해 준다"고 합니다. 스트레스를 좋게 바라보면, 벌써 성과가 나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저자가 정리한 그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p47).
- 스트레스가 실재(實在)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반대: 주의를 돌리려고 애쓴다- 현실 도피)
- 그 근원을 해결할 작전을 짠다(반대: 그냥 감정을 없애는 데 주력한다)
- 타인에게 충고, 조언을 구한다(반대: 술 등에 의존한다)
- 극복, 제거, 변화를 위해 조치를 취한다(반대: 아예 관계, 역할, 목표에 쏟던 에너지 자체를 거둬들인다)
한국사회에 "스트레스"라는 말이 유행하고 대중이 널리 쓰게 된 건 아마 1980년대부터일 것입니다. 당시에 어떤 전문가는 "그냥 일에 전념해서 잡생각을 줄이면 될 걸, 스트레스란 말을 만들어내는 바람에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고도 했는데 그 이전에는 한국인들이 이런 말을 잘 안 썼다는 증거도 됩니다(스트레스 상황 자체야 구석기 시대, 아니 지질시대부터 있었겠지만). 여튼 스트레스 자체를 잊느냐, 아니면 누군가가 (타인의) 직접 스트레스 상황에 개입을 해서 대상화하느냐는 전략적 선택지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책에서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UBS에서 있었던 사례를 듭니다. UBS 직원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 첫째 그룹은 스트레스에 대해 부정적인 기존 관념을 강화받고, 둘째 그룹은 스트레스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주입받으며, 셋째 그룹은 별다른 조치 없이 대조군으로 두었습니다. 그 결과는, 이런 중재자의 개입 덕분에 훨씬 좋은 결과를 보게 되었다는 쪽이었습니다.
책에는 또한 월튼이란 학자에 의해 이뤄진 "사고 방식 중재"라는, 다소 적용 폭이 넓은 기법에 대해 소개합니다. 사람은 그저 타고난 대로, 혹은 오랜 동안 환경에 의해 길들여진 대로 생각의 패턴을 유지할 수밖에 없을까요? 저자는 저 월튼의 연구를 통해, 사고방식이나 세계관은 얼마든지 스스로, 혹은 누군가가 개입해서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이런 개입은 마법이나 SF가 아니라 엄연히 순수 과학과 실증의 영역이라고 합니다. 사고 방식을 바꾸지 못한다는 건 그저 선입견일 뿐입니다(p57). 보다 범용인 사고 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는데, 스트레스에 대한 태도나 대처 방법을 못 바꿀 이유가 없고, 그게 가능하다면 아마도 결과 역시 긍정적이지 않을지요.
사고방식의 (3자) 중재는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p64)
1) 새로운 관점 배우기
2) 받아들이고 적용하도록 고무하는 연습하기
3) 타인과 공유 기회 만들기
스트레스 상황이 공포일 뿐 아니라, 스트레스를 겪으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부터가 공포입니다. 그런데 스트레스에 대한 관점을 바꾸면, 스트레스에 실제 대처하는 능력이 향상되기에 앞서 적어도 저런 공포감은 훨씬 잘 극복된다고 합니다. 공포감이란 게 생각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런 공포감 때문에 도대체 무슨 새로운 과업 자체를 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업에 도전할 수 없으면 성과가 나지 않고, 이는 다시 자신감 저하로 이어집니다.
"엄청 스트레스 받아!(p70)" 이처럼 고함치고 짜증내는 건 사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 거의 99%가 보이는 반응일 듯합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 자체가 스트레스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이며, 저 실험에 참가한 이들처럼 누군가의 중재에 의해 스트레스 관점을 변화시키려 노력했다 해도 도로 예전처럼 돌아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른바 스트레스 요요인 셈인데, 그렇다고 해도 그 현실(역시 스트트레스죠)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시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트레스 과학"의 탄생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연원이 깊은데 1939년 헝가리의 한스 셀리에에 의해 이뤄졌다고 합니다(p75). 불쾌한 경험을 한 쥐들은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기고 근긴장이 사라지는(p76) 등 분명한 증상이 나타났다고 하네요. 셀리에는 내분비학자였고 이런 연구는 내분비학의 체계 안에서 이뤄졌으며 따라서 스트레스는 분명 의학적 관점에서 실체를 지닌, 질병과 연관을 갖는 그 무엇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셀리에는 이미 당시에, 해로운 스트레스(distress)의 해독제 역할을 하는 바람직한 스트레스(eustress)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죠(p78).
옥시토신도 결국 스트레스 반응의 일환으로 분비되는 호르몬입니다. 이 호르몬은 사람들에게 사회적 지원망과 관계를 맺으라고 독려(p93)하며, 이 결과로 배려-친교 반응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엔도르핀, 아드레날린, 테스토스테론, 도파민 등은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상황에 도전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낸다고 하는데(p94) 이는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도 적잖게 경험하는 바입니다. 어떤 좌절이나 모욕을 겪었을 때 아 나는 안되겠구나 하고 주저앉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오 그래? 어디 끝까지 가 보자며 오기가 발동할 수도 있는데 이 후자에 저들 호르몬이 끼어드는 거죠.
감정은 뇌에 자극을 주고 이런 자극이 뇌를 성형적(plastic)으로 만듭니다(p96). 저자는 이렇게 활성화된 뇌가, 결국 인격이나 감정 소화 면에서 전보다 더 성숙한 인간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동서양의 옛 성현들이 일찍이 말한 대로, 시련이 사람을 강하게 만들고 성공으로 이끈다는 지혜가 과학의 근거를 갖는 지점이죠. 반대로 스트레스를 회피하고 남탓과 원망, 짜증이 일상화한 인생은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난관을 극복 못 하고 궤도에서 점점 더 멀리 이탈하게 마련입니다.
스트레스는 회피하거나 무시할 대상이 아니라 더 친하게 지내고 객관화해야 할 까다로운 친구에 가깝습니다. 그 방법 중 하나는 크레이스너, 엡스타인 두 분 의학박사의 연구대로 "스트레스를 끊임 없이 대화의 주제에 올리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입니다. 의대생들은 아마 그 나이 또래 중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집단 중 하나이겠습니다. 이들이 다루는 환자의 끔찍한 모습, 아픈 상태 등이 사실 정상인은 일상적으로 접하기 어려운 스트레스의 근원이고,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배우는 지식 역시 스트레스를 유발합니다.
전통적으로 이들은 감정을 억누리고 환자를 인간 아닌 대상으로만 바라보기를 훈련 받았는데, 그 결과는 사실 예상 외로 비극적임이 밝혀졌다고 합니다(p124). 학생들은 자살하기도 하고, 의사들은 나중에 직업에 대한 진정한 확신을 못 가지며, 이는 결국 의료사고나 분쟁 등으로 이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의사야말로 스트레스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연구를 하기에 최적의 직업임이, 다른 이유 하나가 더 있었던 셈이네요.
"꿈을 이뤄주는 스트레스 과학" 많은 우수한 연구자들에게도 강의 의무는 적잖은 부담입니다. 실제로 제가 학교 다닐 때도 많은 우수한 교수님들이 그렇게나 강의하는 걸 싫어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토로하는 걸 봤습니다. 교수는 분명 사회적으로 극히 선망되는 직업인데도 이런 스트레스와 애환이 있었던 건데.. 알토스 교수라는 분은 스트레스관을 바꾸는 "개입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나서 태도가 180도 바뀌었습니다. 어떤 학생은 "교수님이 내 질문에 답해 주시는 속도가, 내가 내 여친에게 문자로 답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다."라고도 했다네요(p157). 스트레스는 이처럼 잘만 관리하면, 직업에 보다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으로 오히려 탈바꿈해 줄 뿐 아니라, 근원적인 인간관계 향상과 사회성 제고까지도 산출할 수 있습니다.
꼭 타고난 성격이 소심해서가 아니라, 스트레스에 과도하게 시달리고 나아가 스트레스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면 절로 사회 불안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오히려 성격이 밝고 남과 잘 어울리는 "인싸" 유형이 이런 장애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아마 과도하게 가졌던 기대가 정면으로 배반당한 데 대한 좌절의 결과일 수 있죠. 그런데 저자는, "불안증을 앓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리 기능이 통제 불능 상태라고 자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따라서 "스트레스 반응이나 불암감 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 자체의 전환이 무척 중요하다"고 합니다.(p182)
그래서 스트레스는 존재 자체를 없앨 수 없고, 그 "사용법"이 중요합니다. 그 예로 책에서는 나의 목표가 무엇이고, 목표 달성에 도움되는 건 무엇이며, 나는 과연 사람들 사이에 긍정적 영향을 일으키고 싶은 것이며, 그 변화의 종류와 그를 통한 기여가 무엇인지 의식적으로 반복적으로 생각해 보는 게 중요하다고 합니다(p211). 아무래도 사람이란 동료나 집단 안에서 인정받고 소속감을 늘리며 이를 통해 자존을 높이는 걸 태생적으로 좋아하는 존재이니 말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시대가 주는 스트레스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끼는 편이었을 겁니다. 그걸 자기 나름대로 극복해 보려 애 쓰다, 마침내 가장 확실하게 극복하는 방법을 찾고, 이를 사람들과 공유하다가 공동체 전체를 구원(!)하기에 이른 거죠.
"누군가와 더 굳건히 연결되고 누군가의 지지를 받으며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싶은 사람들(p242)"은, 사실은 자신부터 타인에 대한 태도를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그래서 "어떤 지원을 타인에게 받고 싶건 간에, 그 지원의 원천은 자기 자신이라야 한다"는 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사고 방식의 전환,스트레스에의 과감한 (나 자신의) 개입"이 중요하다고 다시 강조합니다. "스트레스를 통해 어떻게 '성장'하고 싶은가?(p307)"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본 적 있습니까? 도피, 회피가 아니라 스트레스에서 나의 성장 그 자양분을 찾을 때, 스트레스가 극복이 될 뿐 아니라 종래의 나보다 키가 한 뼘 더 커 있는 자각을 하게 되며, 그 뿌듯함이야 상상을 뛰어넘지 않겠습니까.
스트레스를 내 편으로 만들면 위협을 도전으로 바꾸고, 믿음의 촉매제가 되어 주며, 회복력을 북돋우는 약이 됩니다. 독이 아니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