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번 위스키의 모든 것 - 술꾼의 술, 버번을 알면 인생이 즐겁다
조승원 지음 / 싱긋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친구를 가까이하고, 버번은 더 가까이하라." 영화 <대부>에 보면 "친구는 가까이하고, 적은 더 가까이하라."는 대사가 나오죠. 이 명언의 포인트는 애초에 속성상 가까이하기가 어려운 "적"을 가까이해야만 정세와 나 자신의 객관화가 가능해지고 이를 통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진리의 역설성에 놓입니다. 하지만 본디 버번 위스키는 (적과는 달리) 가까이 두기 쉬운 녀석 아닐까요? 물론 술에 아주 약한 이들도 많으며, 아마도 이 말은 그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었지 싶습니다. 혹은, 설령 술을 즐기는 편이라 해도, 버번은 좀 뭘 알고 마셔도 마셔야 분위기도 살리고 자신의 건강도 챙길 수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그런지 아닌지는, 책을 실제 다 읽고 나서 확인 가능했고 말이죠.


"모든 버번은 (아메리칸) 위스키다. 그러나 모든 (아메리칸) 위스키가 버번은 아니다(p14)." 술(종류)의 이름은 버번(부르봉)인데, 정작 아메리칸 위스키의 대명사로 통하는 게 역설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예사로 생각들 해도, 버번 위스키는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규제를 받는 생산 과정을 거친다고 하네요. 저자는 또한 "버번만 잘 알면 콘이니 휘트니 라이 몰트니 하는 건 크게 신경쓸 게 없다"고도 합니다. 의외로 까다로운 족보와 근본을 요구하는 버번에 대해서 확실히 아는 게 이런 의의와 필요성도 있다는 말이라, 가볍게 훑어 보려 했던 마음이 여기서부터 삼가는 책읽기로 바뀌었습니다.


①당화 ②발효 ③증류 ④숙성 ⑤병입 


어느 주류나 이 비슷한 과정을 거치겠지만(단, 증류는 위스키 같은 증류주에 한함), 앞에서 말했듯 가장 엄격한 제조요건을 갖는다는 버번 위스키의 경우 이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책을 특히 꼼꼼히 읽었습니다. 옥수수, 밀, 맥아 보리가 버번의 필수 재료인데, 앞에서 콘, 휘트, 라이 몰트 3종 곡물 재료를 거론한 게 이 세 항목과 같습니다. 이들을 곱게 간 후 당화조에 물과 함께 넣어 가열한 후 저 재료들을 차례로 넣는데, 그 온도에 따라 엄격하게 넣는 순서가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p23). 이 과정이 당화이며, 알코올은 효모가 전분을 당분으로 바꾸고 난 후의 산물이라는 점 다시 강조하네요. 모든 주류 제조에 이 명제가 통하겠지만, 저런 곡물을 어떤 조건 하에 투입하느냐에 따라 종류가 달라지는 것이고 말입니다. 


미국 영화나 소설을 보면 유난히 밀주 제조업자가 자주 등장하고 그를 가리키는 단어도 많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이처럼, 어떤 브랜드를 상품에 붙일 때 당국의 제조 규제가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버번 위스키의 경우 알코올 도수는 40퍼센트(80프루프) 이상이어야 하니, 세상에 39도 짜리 버번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며, 그 어떤 인공 감미료 따위도 섞을 수 없다고 합니다(p12). 건강도 건강이거니와, 소비자의 취향과 선택이 이 정도 사회적 신뢰에 의해 유지되어야 그게 사람 사는 사회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이름난 프랑스의 와인류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 


아무리 이 책이 "버번만 알면 나머지 아메리칸 위스키는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p21에는 그래도 다른 위스키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그러나 핵심만 잘 추려서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명품 위스키인 잭 대니얼스도 있는데, 이 브랜드는 테네시 위스키에 속한다고 하네요. 


1992년 영화 <여인의 향기>에 보면 알 파치노가 연기한 주인공 중령 캐릭터가 짐짓 "나에게 존 대니얼스 한 병 갖다 주시오."라고 하자, 소년 찰리가 "네?"라고 되묻고, 다시 중령이 "우리끼리는 본래 잭을 존이라고 부르곤 했지."라며 너스레를 떠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씬이 월도프 아스토리어가 배경인데, 어딘가 좀 안 어울리기도 하지만 생의 마감을 앞두고 털털한 취향을 솔직히 드러내는 애틋함이 느껴지기도 하죠. 이 테네시의 경우, 버번의 과정에 차콜(charcoal) 여과 과정을 합쳐서 만들어진다고 하네요. 이 술에 대해서는 책 마지막 4장에 집중적으로 다시 다뤄집니다. 


저자는 MBC에서 최근 특히 보도 프로그램인 <스트레이트>를 제작하신 분인데, 우리가 특히 주류에서 스트레이트라고 할 때 무슨 뜻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물론 저 보도 프로그램의 제목은 직언직설이란 의미이겠지만). 버번이나 다른 위스키의 경우 숙성고에서 최소 2년을 묵었으며, 상표에 따로 숙성기간을 적지 않았다면 최소 4년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런 건 확실히 지식이 있어야 라벨만 딱 보고 판단할 수 있겠죠. 


책의 서장만으로도 버번 위스키에 대한 자세한 상식이 다뤄지기에 유익하지만, 이 책의 진가는 본문 1장부터 죽 이어지는 명문 증류소 탐방입니다. 사실 인터넷에 나오는 단편적인 정보로는 대충 그렇다는 식의 결론만 알 수 있을 뿐, 대체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정보나 결론은 심지어 틀리기까지 합니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구글에 "버번 위스키"로 검색되어 나오는 모든 책을 찾아 아마존에서 주문하여 완독했으며, 이후 필히 탐방해야 할 증류소 목록을 뽑고는 발품을 팔아 꼼꼼한 탐방을 마쳤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책에는 사진 자료도 많고, 현지에서 전문가를 직접 만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생생하고 깊이 있는 정보도 많습니다. 


새뮤얼스 증류소는 도수를 많이 끌어올리지 않는 점이 독특했다고 합니다(p63). 2차 증류까지 마치고도 60도에 불과했다고 하네요. 호밀(휘트) 대신 가을밀을 쓰는데, 이 가을밀이라는 게 특히 온도에 민감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증류소에 근무하는 전문가들은 특히나 장인 정신의 소유자들인 듯 보입니다. 저자는 여기서 로버트 더들리의 <술 취한 원숭이>를 인용하며, 영장류의 후각이 특히 발달한 건 땅에 떨어져 자연 발효되는 과일을 즐겨 찾았던 습성에서 비롯했다고 하는데 술을 즐기지 않는 저 같은 독자로선 좀 놀라운 결론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 대목에 특히 공감했는지 "증류소에서 (자신이) 킁킁대던 건 지극히 당연하다"고도 합니다(p65). 


"일라이자 크레이그는 버번 역사책마다 등장하는 유명한 인물이다(p124)." 아마도 기독교 구약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 엘리야의 엄청난 존재감 덕분인지, 이름 난 전도사 이름은 유독 이 이름을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저는 저 구절을 통해, 대체 버번 한 종류만 다룬 역사책이 그리도 많았던가 하는 점에 다시 놀랐습니다(p555 이하에 저자가 참조한 원서 목록이 나옵니다). "향부터 알싸한 느낌이 두드러지"며, "시트러스한 느낌도 강하"고, "여운이 부드럽고 길게 남"지만 유독 헤븐힐 위스키는 국내에서 인지도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p125). 사실 저부터도 그런 주류명을 들어 본 적이 없고요. 저자는 특히나 이 브랜드를 거명하는 술꾼을 만나면 반갑기부터 하다는데 사실 요즘은 편의점에만 가도 예전보단 훨씬 다양한 와인을 만날 수 있고 심지어 보드카도 흔히 만납니다. 이렇게까지 헤븐힐을 극찬하시니 술 못하는 입장에서도 궁금해지더군요. 


책은 술깨나 하실 듯한 저자가 일일이 현장을 발로 답사한 느낌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윌랫을 방문하고 2층 증류실로 올라가는 장면(3장 중 p142)에서는 설렘마저 느껴집니다. 앞 1, 2장도 마찬가지인데 이름난 증류소는 거의 항상 특정 가문이 관리하는 게 보통이며 대(代)가 끊이든지 해서 이름이 바뀌었으면 아무래도 옛날 책(버번 전문서)에는 사항이 언급 안 되죠.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이 책 한 권만으로도 버번의 내력(나아가 위스키 전반)을 일반인 수준에서 아는 데 부족함이 없고, 위스키에 소양이 높은 독자라고 해도 이 책 한 권을 서가에 나란히 꽂아야 (비교적) 최신 정보도 보충되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2020년 6월 현 시점에선 한국어로 된 유일한 버번 전문서이겠고요. 


버번의 수도 바즈타운(p177)에 와서 만나는 짐 빔. 이 술이 버번 위스키의 일종(을 넘어 대표주자)인 줄도 모르면서 아마 그 유명한 브랜드만큼은 웬만큼 사회생활을 하는 한국인이 누구나 들어봤음직합니다. 저자는 유독 이 대목에서 <켄터키 옛집>이라는 미국 노래(미 가곡의 왕 스티븐 포스터의 작품이죠)의 가사(와 아마도 가락까지)를 떠올립니다. 사실 가사에 "검둥이"라는 표현도 나오고 그리 잘된 번안인지는 모르겠으나, 스티븐 포스터 원곡 lyrics도 오늘날 기준에서는 인종차별적 표현이 등장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2차 산업혁명을 막 일으키며 세계적 강대국으로 도약하던 시절의 미국, 그 특유의 낙천주의와 활기가 은연 배어나기 때문에 느낌이 각별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버번의 발전도 다 이를 배경으로 하며, 이 책이 버번 전문서의 성격 외에 기행문, 여행서의 서정을 풍기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p214 같은 곳을 보면 루이빌, 바즈타운, 프랭크포트 등의 시설 명단이 보기 좋게 정리됩니다. "2019년 12월 기준"이라며 시점도 표기되는데 이처럼 믿을 만한 출판사, 저자의 "보증"이 있어야 믿음이 생기며, 인터넷에 나온 정보라든가 허접한 책, 저자의 말이라면 안된 소리지만 사실 다 믿을 게 못되죠. 다음 페이지에는 요즘 미디어의 인포그래픽이라든가 카드뉴스에 나올 법한 세련된 편집으로 또 보기 좋은 정보가 제시됩니다. 기억력이 어지간히 나쁜 독자라도 이 그림 두 폭으로 핵심 정보(그저그런 술자리에서 아는 척할 만한)는 다 정리되겠네요. 


한국야구의 레전드 장효조씨도 말년에 과음하여 아깝게도 일찍 타계했듯이, 술은 뭐 누가 생각해도 건강과는 상극이며 백해무익할 뿐입니다. 그러나 p260에는 "올드 포레스터가 생명을 연장하고 노인들을 건강하게 돕는다"는 광고 구절을 담은 오랜 도판이 나옵니다. 만약 즐겁고 유쾌한 분위기에서 지인들과 오붓한 시간을 가지고, 여기에 부득이하게 술이 빠질 수 없다면 잘 관리된 질 좋은 술이 분명 (질이 나쁜 주류보다는) 건강에 도움이 될 터입니다. 올드 포레스터는 저 앞의 새뮤얼스 작품들과 달리 2차 증류에서 도수가 70까지 올라간다고 합니다. 역시 노인이라면 음주에 절제가 필요합니다!(아니 젊은이라고 해도)


예전 화장품 서브브랜드에 피어리스라는 게 있었는데 아마도 위스키 라벨에서 영감을 얻은 작명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각진 데가 없고 동글동글한 귀여움이 묻어나는 병을 거론하는데(p322) 애주가의 눈에는 병의 미학도 취향과 기준에서 빠질 수 없나 봅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뚝배기보다는 장맛이라는 말도 있죠. 카슨 집안이 이 명물을 생산하는데, 역시 여기서도 기자 본능이 발휘되어 담당자와 관리직(회장님 아드님이라고 하네요)과의 생생한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제조인의 각별한 장인정신이 다짐되는 워딩은 확실히 술맛까지를 더할 듯합니다. 나아가 내가 이런 술을 마신다는 자부심이, 설령 술이 약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드문 한 모금에 농도와 추억을 배가하겠죠?


"석회벽돌을 재료로 삼은 숙성고는 우드포드에 있는 게 유일하다."(p396) 대부분은 나무 숙성고인데도 말입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어느 숙성고에도 특유의 곰팡이가 피게 마련인데, 이 곰팡이는 알코올 증기를 먹고 살며 내부 습도 조절이라는 유용한 기능을 행한다고 하네요. 여기서 저자의 말이 걸작입니다. "위스키는 사람만 좋아하는 게 아니다. 천사도 좋아하고 곰팡이도 좋아한다." 


"켄터키에는 사람보다 말[馬]이 더 많다."(p471) 그 중에서도 렉싱턴은 "세계 말의 수도라 불릴 만큼 말의 사육으로 유명하다"며 저자는 강조합니다. "석회암 지대를 통과하며 철분이 제거되어 위스키를 만들기에 적합한 물"이라는 건데, 바로 위 문단에서 언급한 우드포드의 숙성고가 석회벽돌로 지어진 점도 함께 떠올릴 만합니다. 이것 관련 제임스 페퍼라는 이의 파란만장한 생도 함께 언급되네요. 대개 영미권에서 말이라고 하면 사행 스포츠인 경마가 먼저 떠오르고, 이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술, 그 중에서도 대중적인 위스키가 빠질  수 없겠죠. 


마지막 장에서는 켄터키 주를 떠나 테네시로 옮기며 잭 대니얼스를 다룹니다. 테네시 주도 완전 남부도 아니면서 정말 보수적인 곳인데 20세기 말에 앨 고어 같은 인사가 나온 건 정말 의외이며 인근의 아칸소 주도 대책 없는 우파 지역인데 거기서 빌 클린턴이 출현했죠. 이 테네시 주는 미국이 1차 대전 후 금주를 헌법 사항으로 규정하기 10년 전부터 자체 규율했다는 점 언급합니다. 이런 고장에서 잭 대니얼스가 먼저 탄생했고 현재까지도 활발히 명맥을 이어가는 점은 역설입니다. 뒤에는 특유의 차콜을 위해 사탕단풍나무 구입에만 거액을 쓴다는 사연이 나오는데, 장인정신은 예컨대 우리네 도자기 제조에만 소용되는 게 절대 아니라는 점. 지구촌 곳곳에 모범례가 얼마든지 있다는 점 다시 절감하게 됩니다. 


가능하면 피하는 게 좋겠으나, 접대라든가 여러 상황 때문에 피할 수 없다면 그 바람직한 음주 방법, 절제된 방식으로 즐기는 게 좋겠죠. 그런데 사실 음주 문화는 문명이 발달한 곳에서 다양하고 세밀하게 발전한 게 또 특징입니다. 버번 위스키뿐 아니라 술의 족보와 특성을 정확하게 알고 분위기에 가장 알맞게 즐길 줄 안다면 이 또한 사는 낙이 하나 더 생길 뿐 아니라, 접대 받는 상대에 대한 최대한의 성의요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 무릇 아는 게 없으면 착한 마음을 품고도 바른 방법으로 상대에게 예의를 갖출 수가 없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