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처럼 - 도청의 마지막 날, 그 새벽의 이야기
정도상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은 1980년 5월 26일, 27일 양일간, 전남도청 진입을 앞둔 계엄군과 대치하던 어느 (가상의) 시민군의 회상을 담았습니다. 가상이라고는 하지만 작가는 다양한 기록을 참고하여 사건과 인물들을 재구성했으므로 어느 정도는 다큐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책 띠지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도청에 있는 이유는 단 한 사람, 희순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본문 p157에도 나오는데요. p157이면 소설 2/3가 넘어가는 부분이지만 독자들은 아마 (어지간히 눈치 빠른 사람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건의 진상인지 정확히 파악 못 할 겁니다. 저 역시 그랬고 인용문에서도 "희순을 사랑한다"고만 했지 "희순이 거기(즉 전남도청)에 있어서였다"고 하지 않았는데 왜 지레짐작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튼 소설 말미에는 약간의 반전이 있다는 점 미리 말씀 드리고요.

26일, 27일 양일간의 회상입니다만 아직 젊은 청년이었던 주인공이 길지는 않은, 그러나 최근 몇 달 간 높은 밀도를 갖추게 된(?) 자신(과 주변 인물들)의 과거사를 회상하기 때문에 시간적 배경은 좀 범위가 넓습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두 부류입니다. 하나는 가난하고 비참했던 광주의 토박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광주의 민중들 눈을 틔우기 위해 야학을 연 "강학(선생, 교사가 아니라 스스로를 이렇게 불렀다고 합니다)"들입니다. 전자는 주인공처럼 밑바닥 인생들이 주류이고(공장 직원, 하급 기술자, 유명한 서방파 깡패 들이 두루 포함됩니다), 후자는 저들 입장에서 선망의 대상인 대학생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캐릭터로서는 아니지만 (차라리) 거대한 사건으로서 등장하는 계엄군이 있겠네요.

p57에는 "총을 맞으면 사람이 죽는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당연하죠. 그런데 저 말은 소설이 다름 아닌 5. 18의 그 급박한 상황을 배경으로 삼았기에 더욱 묵직한 함의를 갖습니다. 전남도청에 모인 이들은 고교생을 비롯 미필자도 있기 때문에 총을 그리 잘 다루지 못합니다. 시민군이 카빈 소총으로 무장했다는 말에 놀라기도 하지만 이 책에는 "식스틴(M16을 가리킵니다)이 대학생이라면 카빈은 중학생"이란 말도 나옵니다. 그만큼 화력이 약한 게 카빈이고, 계엄군을 대체 중화기 무장 면에서나 머릿수 면에서나 당해낼 수 없습니다. 이 소설에는 기관총류로 p67 등에 "에레무지(LMG)"가 나오기도 합니다. (전 처음에 무슨 소린가 했습니다. 본문 중에 친절히 설명됩니다)

총화기의 차이를 하필 중학생, 대학생 등 학력으로 비유한 게 눈에 띄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상당수는 가난 때문에 못 배운 이가 많습니다. 무학에 한이 맺혀 유독 비유도 저렇게 든 듯합니다. p77 에 보면 주인공이 스스로를 가리켜 "대2 나이에 국졸임"을 자탄하고, 광천공단, 전남방직(p111) 등 당시 가난하고 비참했던 광주를 상징하는(그곳에 다니는 노동자들과 그들이 형성한 거리) 이름이 자주 보입니다. "가난, 무학, 자학의 수렁" 역시 주인공이 자주 되뇌는 말입니다.

소설에는 1980년대 비참하고 가난한 광주를 제유하는 현지명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p44의 학동고아원, 무등육아원이라든가 p213의 광주소년원이 그것입니다(후자는 교정 시설이라 성격이 다릅니다만 여튼). 얼마나 가난하고 핍박 받는 고장이었으면 도심에 저렇게나 시설이 많았겠습니까. 이런 곳에 대체 누가 누굴 고아랍시고 멸시하고 우월감을 느끼고 어쩌구할 여지가 있겠습니까만 한심하고 인성이 비틀린 인간이야 또 어느 곳에나 분포하기 마련이죠.

소설에는 개성 있고 향토색을 드러내는 표현이 여럿 나옵니다. p34 에는 "뉘집 자식 머기시" 란 구절이 있는데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전 아무래도 이 단어가 "머시기"의 오타인 것 같습니다.  p129에 "귄이 있는"이라든가, p170의 "귄이 있고" 같은 표현이 있는데 "귄"은 사전을 찾아 보니 "귀염성"의 전남 방언이라고 하네요. 좋은 지식 하나를 배운 듯했습니다.

계엄군 진입을 대비하는 시민군의 마음가짐은 결연합니다. p32에는  "백척간두 진일보"란 말이 나오는데 말 자체야 우리에 익숙하지만 여기서는 좀 의미가 다릅니다. 즉, 벼랑 끝으로 한 발짝만 디디면 다죽는다는 뜻이며, 그래도 그 죽음이 의미가 있기에 "진일보"라는 거죠.

책 초반에 나오는 인요한은 물론 우리가 잘 아는 실제 그분이 맞습니다. 실명 그대로 나오더군요. 캐릭터로서 활약상이 나오는 건 아니고 성함이 언급되는 정도입니다. p48에는 "작가 황수영의 양림동 집"이란 구절이 있는데, 황수영이 곧 황석영이며 5. 18 당시 실제 행적과 일치합니다. p147에는 박관훈이란 인물이 등장하여 일신방직 여공 최순임과 노선상의, 그리고 개인상의 사랑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장면이 있는데 혹시 실존 인물 "광주의 넋 박관현"을 이리 묘사했을까요? 저 뒤 p199에는 조순임이라는 인물도 나오는데 순임이라는 이름이 당시 광주에는 많았나 봅니다.

계엄군 진입 전야의 그 급박한 순간.... p52에는 이 종이에 적힌 글이 과연 얼마나 힘을 발휘할까? 라며 회의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p54에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또 나오고요. 이 페이지에는 "미국인 하나를 인질로 잡고 투쟁하자"는 강경한 노선을 주장하는 인물도 등장합니다. 이 소설은 상당 부분을 실제 기록을 참고하여 창작되었다고 작가가 말하므로 다 근거가 있는 묘사일 것입니다. p60에는 상우 형이 세 손가락을 펴 보이며 "앞으로 삼일만 버티면 계엄군이 알아서 물러간다고 외신 기자들이 보도했다"고 하며 시민군의 사기를 높이는 말을 하는데 물론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래야 할 때가 있죠.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기) 동네에서는 똥개도 50은 먹고 들어간다.(p113)" 이 말은 등장인물 중 하나인 수찬이, 서방파 깡패들을 상대하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동네 선배(남호)의 형수에게 담배연기를 뿜으며 도발하는 깡패들에게 수찬은 대담히, 술잔을 깨고 몸에 자해를 해 가며 맞섭니다. 결국 서방파 중간보스한테까지 끌려가서 온갖 구타를 당하는데, 그 용기와 배짱이 가상해서 그냥 풀려나네요. "니 꿈이 뭔데?" "츄레라(트레일러) 운전수요." 소설에는 남호 형과 수찬이 운전을 하며 수고비를 횡령(이른바 "삥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역시 당시 생활상에 대한 생생한 묘사입니다. 당시 막 리비아 대수로 공사가 수주될 시절인데 일당이 어마어마하다며 설레어들 하는 모습이 나오네요.

주인공 노명수는 공장에 다니며 일이 힘들면 "본드를 부는 등" 절망에 가득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다 우연히 김희순을 알게 되고, 처음에는 자신과 같은 공장직원인 줄 알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게 소설 뒤에 가서 나오듯이, 사실은 김희순은 박희순이었고 대학생 신분인데 여공으로 위장 취업했던 거죠. 검정고시 통과가 고작 꿈(p67)이었던 노명수는 희순이 좋아하는 듯 보이는 상우를 질투하는데 p67에서는 아직 희순이 대학생인 줄 모릅니다. 그 뒤 p151에 가서야 우리 독자들에게 희순의 진짜 신분을 말하고, 여공이면 좋았을 텐데 대학생이고 누나라서 약간 실망했다는 말도 합니다.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여튼 그가 그리 생각한다는 거고요. p201에 다시 "형을 질투한다"는 그의 독백이 또 나옵니다. 이때는 희순이 누군지 알고 난 시점입니다.

그래도 주인공은 자부심이 대단해서 "천하의 노명수"로 자칭하거나, 별로 여성스럽게 꾸미고 다니지 않는 희순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p96에 "학삐리들은 겁쟁이"라고 하는 대사가 있는데 그 강학 선생님들의 훌륭한 모습을 보고도 저러네요. p100에 "설마하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뀐다"는 말이 나오며, 역시 계엄군 진입 직전의 조마조마한 심정을 잘 표현합니다.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싸워야지 그 어떤 간극도 없었다"는 문장도 있습니다(p193). "오지 마라. 하지만 피하지 않겠다." 같은 말은 얼마나 비장합니까(바로 뒤에 더 용감한 의지의 피력도 나오구요).

야학에서는 노동자가 평생 노동자로 가난하게 착취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님을 배우고, 동시에 형들과 어울리며 음악도 습득합니다. p92에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가 언급되는데 제가 몇 주 전 책프 리뷰에서 리처드 클레이더만 악보집을 리뷰한 적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저는 이 피아니스트가 1980년대에만 한국에서 인기를 끈 줄 알았는데 이 소설을 읽고 대학생들 사이에 이미 1970년대말부터 유명했던 줄을 새로 알았어요. p85 이하에는 아주 길게 "하우스 오브 라이징 선"에 대한 토론(?)이 나오는데 저항가요로서 그리 해석될 여지가 있나 보죠. 더 넘어가면 조언 바예즈와 양희은, 김상국(!)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p82에 보면 담배를 달라는 말에 "이것들이 내가 전매청인 줄 아나?"며 우습게 받아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담배를 국가 관청인 전매청에서만 취급하던 시절의 단면을 드러내죠. "공수부대가 무서워, 아님 고양이가 무서워?(p173)" 같은 대화에서 임박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여유와 위트를 잊지 않는 인물들이 돋보입니다. 이들 중에는 커플도 많고(병규와 미서라든가) 18세 나명환처럼 고작 교련 시간에 모형 총 잡아 본 게 전부인 고등학생도 있습니다.

(이하 내용 누설 있습니다)
p183에 "나는 상우형이 갖고 있는 그런 추상을 가져 본 적 없다."는 주인공의 고백이 나오고, 이제 야학을 통해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희순은 사실 동경하던 또래 여공이 아니라 상우형처럼 자신의 스승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희순과 주인공이 사랑을 맺을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1979년 크리스마스(그러니까 5. 18 이전)에 그 둘은 연을 맺기로 약조합니다. 명수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며칠 후 열악한 주거공간에서 희순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합니다. 즉 5. 18(소설 속 현재) 당시 희순은 이미 고인이었던 겁니다. 책 한참 앞인 p36의 "내일 나는 망월의 희순과 데이트를 한다"는 말은, 알고보니 전혀 다른, 엄청난 암시가 숨어 있었네요.

희순이 도청 어디엔가에서 지금 투쟁하고 있어서 내가 그녀를 차마 떠날 수가 없다는 게 아니라, 이미 고인이 된 희순이 내게 스승으로서 생전에 가르쳐 준 그 무엇과, 연인으로서 지켜야 할 약속(5. 18이야 미처 예측할 수 없었겠지만) 때문에 도청을 못 떠난다는 뜻이었습니다. 처음에 전 러브 스토리를 기대했는데 생각 밖으로 묵직한 메시지를 만났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