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중의 탄생 - 흩어진 개인은 어떻게 대중이라는 권력이 되었는가
군터 게바우어.스벤 뤼커 지음, 염정용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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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떤 이슈,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대중의 의사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언제나 그랬던 건 아닙니다. 유능한 장군, 좋은 혈통을 타고난 귀족, 큰 돈과 재화의 유통을 다루는 상인 등 극소수가 여사의 흐름을 좌우하던 시절이 훨씬 길었죠. 20세기 들어 매스 미디어가 발전하고 교통 통신 수단이 개발됨에 따라 대중이 비로소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를 악용해서 대중을 선동하고 그들의 의사와 감정을 조작하는 히틀러와 괴벨스 같은 악한 정치인 유형이 새로 등장하는 등 부작용도 속출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주체인 국민은 선하지만 대중은 경우에 따라 악할 수 있다는 게 일반적인 믿음이지만, 도대체 국민/인민/대중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유럽, 미국, 그리고 그 외의 세계에서는 새롭게 정의된 의미의 대중이 다시 관심을 받습니다. 대중이 중요하다 아니다, 혹은 어떤 대중이라야 정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식의 당위론을 제기하는 것 역시 우리 같은 대중이라는 점도 아이러니합니다. 대중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대중이 아닌 척 대중을 타자화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적인 대중이 기존의 담론을 벗어나서 열심히 자기 목소리를 내고, 그 와중에 불의나 혼란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러니 대중의 실체가 뭔지, 어떤 식으로 현실에 참여하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한 이런 책을 안 읽어 볼 수가 없습니다.

저자들은 말합니다. "20세기는 대중의 시대였고, 21세기는개인의 시대이다." 그래서 요즘의 대중에게는 어떤 획일화한 선동이 잘 먹히지 않는 면 분명히 있습니다. TV나 라디오 뉴스에 영향을 받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유튜브 스타의 요란한 원맨쇼에 더 몰입하니 말입니다. 과거에는 1인 매체가 있지도 않았지만(기술상의 애로 등 이유), 설령 있었다 해도 그렇게 편향되고 권위를 못 갖춘 의견을 아마 외면했을 겁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고, 나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스피커가 어떤 권위자보다 더 존중을 받습니다.

바로 이 과정이 중요합니다. 결국 기존의 대중은 작은 단위로 쪼개어졌다뿐, 또다시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1990년대 초반 신세대들이라 자처했던 젊은이(지금은 그들 역시 꼰대, 혹은 소위 "틀딱"이 되었죠)들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며 "이게 나의 개성"임을 내세웠지만 밖에서 보기엔 "친구들이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따라하는" 또하나의 몰개성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개성인 줄 착각하는 또하나의 획일이 바로 21세기식 대중의 특징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중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하나로 뭉쳐 정치적 변혁을 이끌어내는 건 때로 감동적입니다. 책 p74에서는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 심지어 몇 세기 전의 프랑스 대혁명 등이 예시되며, 놀랍게도 2016년의 한국 촛불 시위까지 언급됩니다. 이 책을 보면 "박근혜는 완전히 고립되어 자리에서 쫓겨나기까지 그들만의 축제를 벌였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저자들은 이처럼 비슷한 형태로 역사의 여러 국면에서 반복되는 대중의 힘, 행동, 특성에 대해 주목합니다.

1990년대 초반 공산 동독에서 일어난 대중의 움직임은 놀라웠습니다. 슈타지라는 비밀 경찰에 의해 매순간 감시 받고 억압당하던 그들이 그처럼 짧은 시간에 결집하여 단호히 행동하는 건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었죠. 또 비교적 최근인 십여 년 전 북아프리카, 중동에서 일어난 일련의 독재자 축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역사는 자유와 개인의 행복을 위한 방향으로 흐른다면서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나라에서 벌어지는 최근의 혼란상은 어떻습니까?

최근 유럽과 미국의 이슈는 단연 포퓰리즘입니다. 책 p160 이하에서는 본격적으로 포퓰리스트들의 특성을 다룹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포퓰리즘이란 국가와 공동체의 건강한 역량을 갉아 먹는 병증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어찌되었든 이런 포퓰리스트 움직임도 대중이 시작하고 추동하는 정치적 행동입니다. 어떤 때에는 정의로운 국민이며, 대체 어떤 때에는 그럼 무지하게 선동당한 "대중"이 되는 걸끼요? 그 경계는 모호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전 드라마 <모래시계>를 보면 학생 운동가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들마저 이러면 어떡하냐고!" 그런데 지식인이나 혁명 엘리트들은 그런 민중, 대중에 비해 어떤 우월성이 있기에 이런 단정, 단죄를 쉽게 하는 걸까요? 그들이 소수 지배 계층을 적대하고 전복할 때에는 거리낌 없이 민중의 이름과 권위에 기대면서 말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엘리트층은 문화 대중에 보편성에 대한 권리를 인정할 용의가 없었다(p160)."

"엥겔스와 보들레르의 목표는 얼핏 여겨지는 것처럼 그리 많은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p240)." 여기서 저자는 보들레르의 한 작품을 통해 "폭력을 수단으로 동등성을 획득한 어느 거지의 자존"을 논합니다. "군중으로부터 분리되지도 않은, 또 매개 인물을 필요로 하지도 않은 채" "군중과 함께 섞여 목욕할 기회를 얻는 건 하나의 예술임"을 주장하는 보들레르의 이 작품은 제목부터가 "군중"입니다. 대중, 군중의 뿌리를 추적함에 있어 근대로까지 소급해 올라가는 저자들의 폭 넓은 시야가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대중은 오히려 인간의 원초적 존재 형태다(p289)."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부사 "오히려"입니다. 사실 현대에 들어 대중이 이처럼 문제가 되는 건, 원래부터, 안 그랬을 법한 "원초"에서부터 그 씨앗을 배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이건 지식인이건 그렇다는 걸 뻔히, 일찍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 했을 뿐이지요. "대중은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우리들'로 변한다.(p353)" 위험하지만 때로는 고맙고 착하기 짝이 없는 대중이란 것의 실체를 똑바로 알려면 결국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금언대로 "우리 자신을 먼저 냉철히 들여다 볼" 수밖에 없겠습니다. 설령 그 안에서 간간히 괴물이 목격된다 해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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