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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의 인연 2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월
평점 :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거의 모든 편의 특징은, 확실히 일단 손에 잡고 나면 도저히 궁금해서 도중에 중단할 수 없게 독자를 이끈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1권에서도 고이치는 자신이 세운 전략을 가능한 한 천천히, 신중하게 이어가는데 이에 대해 캐릭터 본인의 입으로 설명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애써 생각해 낸 그 답에 더 집착한다."(p19)
이런 말은 1권에서도 나왔죠. 아마 시즈나의 대사일 건데 "똑똑한 여자들을 속이는 게, 그렇지 못한 여자를 속이는 것보다 더 쉽다."였습니다. 똑똑하지 못한 여자는 자신도 자신의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의 느낌과 판단을 못 믿고 신중하게 굴 수가 있죠. 이런 사람은 속이려 드는 사기꾼은 (결과적으로) 잘 퇴치할지 몰라도, 지인 등이 이런 사람 설득할 때 아주 애를 먹습니다. 본인한테 뭐가 이로운지 판단을 못하고 무조건 이 사람 저 사람 말만 들으며 주관없이 흔들리니까요.
그렇다고 똑똑한 사람을 속이기 쉽다는 건 일반적으로야 그럴 리 없고 여기 시즈나 남매처럼 고단수의 협업이 되는 사기꾼 수완으로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여튼 이들의 말에 의하면, 바로 상대방이 철석 같이 믿을 만한 대목(대부분은 착각이지만, 자신의 약점이기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부분)을 "사기꾼의 생각 아닌 자신의 생각인 양" 속이는 데에 포인트가 있다는 소리겠네요
여튼 그래서 고이치는 자신이 조작한(영어로는 plant한) 증거들을 경찰 앞에 교묘히 깔아 놓습니다. 경찰은 뜻하지 않게 이 증거들을 "발견하게" 되며, 그래서 조작이나 모함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채 "자신들의 노력에 의한 성과"로 자랑스럽게 가꿔 가며, 아마도 소추 과정에서 강한 집념으로 밀어붙일 것입니다. 서양 미스테리 장르에는 이처럼 범인의 시야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의심을 벗어나거나 완전범죄를 꿈꾸는 설정이 많으며, 묘하게도 우리 독자들은 "범인이 성공하거나 적어도 큰 망신은 당하지 않고 상황을 모면했으면" 하고 바람을 갖게 됩니다. 아마도 주인공들에게는 (이 작처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식으로 합리화의 발판이 마련된 채 말이죠.
고이치 들은 세심하게도 변명거리를 마련해 둡니다. 평소에도 아주 사소한 것까지, 누가 들었을 때 수상하게 안 느끼도록 말입니다. 이런 대목에서 저는 "너무 그처럼 완벽하게 모든 언행에 대한 핑계와 이유, 배경 사정이 준비되어 있으면 더 어색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p69에 보면, "인간의 모든 행동에 어떤 이유가 꼭 있으라는 법은 없"다는 취지의 문장이 나옵니다. 아마도 이런 세팅 프로세스에 대해 독자가 느낄 법한 피로감 내지 위화감을 어느 정도 예상한 작가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소하지만 p164:4에 "천창"이라는 오타 있습니다.
p239에 "그 사람이면 그렇게 할 수도..?"라는 말이 나오죠. 여기까지 읽으신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OOOO는 과연 자신의 OOO에 대해 저렇게까지 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여기서 약간의 의구심이 들어, 혹시 이 부분에 반전의 암시가 있지 않나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이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거야." 그런데 그런 사람은 아마 극히, 극히 드물 것입니다. OOOO는 좀 특별한 사람일까요? 시즈나 남매는, 특히 시즈나는 OOOO에 대해 "절대 우리가 사기나 칠 만큼 멍청한 사람이 아니고 똑똑하다"고 평가합니다.
이 점은 앞서 시즈나가 곤경에 몰렸을 때 OOOO가 나타나선 마치 시즈나에게 빚이라도 받을 게 있다는 듯 짐짓 연극을 한 장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XXXX는 자리를 피하는데, 골치 아픈 일이겠기도 하고 OOOO가 무서워서(그런 외모 묘사는 없었지만요)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시즈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않았기에 그리한 것 아니겠습니까. 상황도 모면했지만 이 과정을 통해 시즈나는 다소나마 죄의식을 덜어내고(그러나 그게 끝은 아닙니다). 동시에 상대에게도 "자신의 떳떳지 못한" 동기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는데 이 모든 게 (어리숙해 보였던) OOOO의 덕이라는 점 우리 독자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OOOO은 이미 여기서부터 대단한 사람이었음을 작가는 복선으로 보여 준 겁니다.
역자 양윤옥 선생은 OOOO가 가장 멋진 사람이었다고 후기에서 말하는데 사실 그 정도 평가에 그칠 게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OOO를 위기에서 구했을 뿐 아니라 삼남매 모두를 끔찍한 범죄에서 벗어나게 도운 것입니다. 마지막에 삼남매는 자신들이 저지른 모든 죄를 씻어내려 하는데 이는 1권 중반부에서 독자인 제가 느낀 불편함을 완전히 해소해 주었고, 작가의 역량을 확인케 해 주는 대목입니다. 떡밥이 남아 있는 채 작품을 끝내는 작가는 힘이 부족한 거죠.
p262에서 "그걸 그대로 믿으라는 건 아니겠죠? 무슨 증거라도.."라고 말하는데 사실 고이치 같이 똑똑한 친구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닙니다. 그 사람이 그걸 왜 증명해야 합니까? 소송법에는 "입증책임"의 문제라는 게 있는데, 사리가 부족한 사람은 그저 자기 감정에만 충실하게 폭주할 뿐 자신이 무슨 무리수를 두는지 남에게 폐를 끼치는지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천하의 고이치도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판단력이 흐트러지나 보죠. 아니면 무대 밖의 우리 독자들을 배려한 추임새...?
아무튼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긍정적이고 선한 세계관으로 결국 마무리되는 점, 참 절로 감탄이 나오더군요. 이렇게 우리 독자들이 영혼이 깨끗이 정화되는 시간을 마련해 준 점에 대해 독후감을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