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0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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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은 그저 말을 아름답게만 꾸미는 기술이 아닙니다. 정확하고 간결하게 나의 의사를 전달하면서도, 듣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의 의견에 최종적으로 감복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 플라톤이며, 그 플라톤의 스승이 소크라테스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시대는 거짓을 진실로 윤색해 대는 기술에 능했던 소피스트가 큰 돈을 벌며 사회에 영향을 행사했던 무렵이었습니다. 이러니 사회에 불신 풍조가 만연했고, 스승이라는 이들이 제자에게 고작 서 푼짜리 거짓을 레슨하면서 연명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말고도 <수사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한 이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수사학들이 번지르르한 요설을 강론하는 테크닉의 열거에 그쳤고, 이후의 수사학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 그 아류에 그쳤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책이 갖는 의의는 무겁고도 넓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수사"를 넘어 우리가 일상에서 내뱉는 말의 의의와 당위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라틴어로 된 사람의 학명 중 하나는 "호모 로쿠엔스"입니다. 말하는 존재인 인간은 말로서 비로소 자신의 존엄을 표현하고 완성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말"을 통해, 개인이 사회에서 존중받고 나아가 사회에 공헌하는 존재가 되는 방법을 궁구하고 성찰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미워하고 한때 큰 다툼을 벌인 적수를 떠올릴 때, 항상 괴로움을 느낄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고 하며, 오히려 "큰 쾌감을 느낀다"고까지 단정합니다(p75). 물론 그 일을 겪던 당시에는 아마 큰 블쾌감이 남았다든가, 찢어지는 듯한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헌데 세월이 지나 그저 돌이켜 보는 회고의 대상이 된 후에는, 거꾸로 그 일을 떠올리며 맹렬히 상대를 질타하고 저주하는 와중에 기쁨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을 통해 불순한 감정을 씻어내고 설욕의 의지를 채우는 과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찌질한(?)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말이 갖는 배설과 정화의 기능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드라마 <스토브리그>에 보면 "그러면 단장님이 돌아오시나요?"라는 (답이 뻔한 질문에) "아뇨, 하지만 나중에 '좋은 단장이었지'라며 추억을 할 수 있게 되죠."라고 답하는 권경민 배역의 대사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해당 대목에서 인용한 구절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온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책 하단에 각주로 설명되는데, 현대지성 고전 시리즈의 상당 권을 번역하시는 박문재 선생님의 정성 들인 문장을 통해서도 우리 독자들은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위대한 지성이자 스승이었던 공자는 "소인배와 여자는 상종할 대상이 못 된다."고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기심이나 중상 모략에 대해 단죄하는 태도에 그치지 않고 그 본질에 대해 자세히 분석합니다(p146). 그의 통찰은 놀라운데, 이에 따르면 "우리는 남의 장점과 성공에 대해 시기하면서 어떤 유형적인 이익을 꾀하는 게 아니라, 남의 장점 그 자체를 불편해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장점이 있는 경쟁 상대를 밀어내면 물론 내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등 어떤 가시적인 이익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가망이 없어도, 즉 남을 미워하고 헐뜯는 행위, 표현 자체가 이미 쾌감을 갖다 주며, 보통 사람의 마음에는 남의 장점 그 자체가 이미 큰 상처를 안기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헌데,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하필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일까요? 해답은 뒤에 나옵니다. 당신이 혹 배심원 앞에서 어떤 효과를 노리고 무슨 말을 할 때,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배심원의 시기심을 자극하는 언사를 발설한다면, 당신이 애초에 꾀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뿐이라는 걸 저자는 다소 짓궂게도 지적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고전의 (당시 기준으로) 실용서적인 성격도 엿볼 수 있습니다.

p153에 보면 장노년과 대비되는 "청년"의 특성에 대해 논합니다. 시대가 수천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통성은 그리 많이 변하지는 않았기에 이런 구절들은 지금 읽어도 크게 공감이 됩니다. 그에 따르면 청년들은 세상 경험이 많지 않기에 악의보다는 선의를 갖고 행동하며 희망으로 넘치고 쾌활하다고 합니다. "삶 속에서 아직 굴욕을 당한 적이 없고, 자신의 의사에 반해 무엇을 해 본 적이 없기에 희망에 가득차 있다"는 말도 백 번 타당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 페이지에 주목해 보십시오. "청년이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남에게 해악을 끼치려는 이유가 아니라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고 남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한 동기이다."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언행이 합리화될 수는 없고 청년이든 장노년이든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건 자명합니다. 다만 저자는 "청년의 악행은 그저 유치한 우쭐거림에서 비롯할 뿐 어떤 본질적 악의가 있지는 않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을 겁니다. 또, 청년은 기지와 재치를 좋아하는데 이는 그것이 "우월감을 표현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도 박문재 션생의 박학다식함이 돋보입니다. 각주를 보시면 "원문은 '카쿠르기아 때문이 아니라 휘브리스 때문이다'라고 간략하게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이 문장은 역자 박문재 선생의 사실상 강연이나 다름 없고, 우리는 원문의 난해함을 역자의 설명 덕에 자세히 풀어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된 번역, 또 고전 원어(여기서는 헬라어, 즉 고대 그리스어)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역자의 번역이 이런 데서 돋보이는 거죠.

"수사학"이다 보니 우리가 현재 고전 논리학의 핵심으로 알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법칙에 대해서도 소개와 논증이 자세합니다. 아니 이 부분은 그가 창시했다고 해도 될 만큼 역사가 오랜 것들이죠. 삼단논법, 즉 대전제, 소전제, 결론으로 이어지는 논증의 구조는 아마 이 분야에서 가장 오래된 논리학의 업적이겠습니다. 이를 다시 수천 년 후에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가 연역법으로 집대성한 바 있습니다.

이 책에서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략삼단논법"에 대해 자주 논급합니다. 형식적으로 "삼단"이 명확히 드러난 것은 구태여 분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일상 언어에서, 저 대전제와 소전제 중 어느 하나가 생략되었는지 아닌지를 판별할 때입니다. 만약 생략이 되었다면 그 논증은 유효하나, 그렇지 않고 엉뚱한 문장이 (명시적으로건 암묵적으로건) 끼어들어갔다면 이는 이른바 "논리의 비약"이 됩니다. 이를 잘 살피는 건 나의 주장이 더욱 강력한 설득력을 갖게 하는 데 도움이 되고, 또 상대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논파하는 데도 일정 구실을 합니다.

수천 년 전의 위대한 지성이, 우리 후손들이 기를 쓰고 공부하거나 공부를 해도 습득하기 어려운 지혜의 본체를 낱낱이 해부해 두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서양 고전은 결과가 새로워서가 아니라,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를 그 이른 시기에 철저히 분석해 두었다는 사실 때문에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고전을 읽고, 사람의 말 그 설득력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나의 이성과 말솜씨는 과연 보편 타당한 법칙에 기대어 작동하는지를 진지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을 그저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정신이 맑고 건강하게 유지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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