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우리의 생각이 미래를 만든다 - 유럽에서 찾은 공정하고 행복한 나라의 조건
안철수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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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저자는 과거 V3라는 백신을 만들어 한국의 많은 유저들을 컴퓨터 바이러스의 공포로부터 구해 준 고마운 분입니다. 그래서 한때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거의 위인급인 인사시죠. 이후 서울대 융복합 대학원 원장도 역임하시고, 2011년경에는 정치 참여를 선언한 후 시골의사 박경철씨, 시민운동가 박원순씨 등과 감동적인 이벤트도 연출하신 적 있습니다. 그때로부터 어언 9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이상하게도 그 시절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듯합니다. 그 동안 실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네...). 지금 이독후감을 쓰는 저 역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 일들 중 상당수를 기억하지만 여기서는 책 내용에 대한 말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책은 상당히 예쁘게 짜여져 있습니다. 그리 두껍지도 않고 휴대하기 좋은 사이즈일 뿐 아니라 안에는 컬러 화보까지 여럿 들어 있습니다. 이 책이 나오기 몇 달 전 저자께서 베를린 마라톤 대회를 네 시간 대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완주하시고(저자께서도 이제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이시죠), 그에 대한 소회를 담은 책이 먼저 나왔었는데 아쉽게도 저는 그 책은 읽지 못했습니다. 그런 아쉬움이 따로 들 만큼 이 책이 예쁘게 나왔다는 뜻입니다.

책에는 에스토니아 이야기가 초반부에 제법 길게 나옵니다. 저자는 에스토니아를 그저 개인적으로 방문한 게 아니라(물론 겸손한 분이지만요) 전직 정치인으로서 정당 대표로서의 무게가 함께 실려 있어을 텐데, 그 와중에도 여튼분명한 문제의식을 갖고 현지를 돈 것 같습니다. 에스토니아는 이차 대전 와중 강대국 소련에 의해 강제 합병된 발트 3국 정도로만 우리가 알지만 사실 그간 치열한 역사를 겪었지요. 그 중 저자는 그들이 이뤄낸 경제 기적에 대해 주목합니다.

저자는 이 나라 "국가최고정보책임자"의 지위에 있는 시쿠트란 분을 만납니다. 우리로 치면 차관급이라는데 나이는 35세로 매우 젊은 편이고 저자 역시 정치에 한창 열중이실 때 "젊은 국가 젊은 지도자"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 "국가최고정보책임자"라면 오해를 살 수 있는데 무슨 과거의 안기부 같은 첩보, 수사기관이 아니라 기업에도 마련되곤 하는 CIO를 가리키며, "정보"는 말 그대로 IT라고 할 때의 그런 정보를 가리키네요. 이 나라가 현재 멋지게 수행 중인 정보 통신 혁명을 이끄는 지도자 중 한 분입니다. 책에는 이분이 저자와 함께 찍은 컬러 사진이 실려 있는데 마치 저자와 일정 부분을 공유라도 하듯 소탈한 이미지입니다.

저자 역시 성공한 IT 기업의 초창기 CEO답게 최근의 화두인 AI에 대해 유익한 제안을 제시합니다. 1) 공공영역의 활용 2) 민간 부문을 적극 도울 것 3) 인력 양성 4) 법제 마련 등의 네 가지인데(p29), 이들 중 어느 항목 하나라도 과연 현재 한국에서 잘 실현되는지는 지극히 의문이죠. 1990년대 대호황을 누렸고 현재까지도 한국을 먹여 살리는 반도체는 앞선 시대에 우수한 인재들이 대거 공학계로 몰렸고 이후 이 인재들이 삼성 등 대기업의 엔지니어로 맹활약했기에 가능했지만 과연 지금은 어떨까요? 획일화한 교육을 타파한다며 어설프게 건드린 교육 제도가 과연 최소한의 작동이라도 하는지 걱정이 될 뿐입니다.

에스토니아는 기후가 온화하지만 위도상으로는 러시아와 나란할 만큼 북쪽에 자리한 나라입니다. 여기서 꽤 멀리 떨어진 스페인도 저자는 방문했는데 이 정도면 정책 순방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바르셀로나 하면 그저 명문 축구 클럽만 떠올리기 십상이지만(당장 저부터도), 최근 이곳 카탈루냐가 경제적으로 번영하며 본국으로부터 분리 독립까지 운운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또 바르셀로나 하면 MWC가 열리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저자 같은 분이 이런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곳을 찾을 리 없죠. 여기서 저자가 주목한 건 중국 화웨이의 약진, 그리고 삼성 등의 상대적 위축입니다. 저자는 이른바 "경제 생태계의 조성"을 주장하며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상생하는 시스템을 비전으로 제시한 분이었죠. 그 점을 유의하여 이런 대목은 읽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음으로는 포블레노우를 방문하는데 이곳은 "카탈루냐의 맨체스터"라고 일컬어질 만큼 한때 섬유산업의 중심지였다고 합니다(p75). 그러나 저자가 내린 진단은 "지금에서야 러스트 벨트의 일종일 뿐"인데, 사실 도널드 트럼프 같은 이를 (유능하다고는 해도) 미래지향적 지도자라고야 할 수 없고, 또 (저자가 존경하는) 마크롱 대통령과 다툰 적까지 있는 사람이지만(이 책 저 뒤 p174 이후에 본격적으로 프랑스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분 역시 미국의 러스트 벨트에 잘 어필하여 그곳 표를 효과적으로 결집하여 대통령까지 된 바 있습니다. 해법과 철학은 다를망정 지도자라면 "좌절한 (따라서 분노한) 노동자 계층"을 어떻게 위로하고 재기(...)에 성공하게 할지를 일단 고민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대안이 나온 건 아니지만 여튼 책에서 그런 고민과 사려가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카탈루냐와는 척을 진(?), 이베리아 반도의 중심 마드리드가 다음 바방문지인데 사실 알고 보면 마드리드 분들도 진보적인 이들이 많고 따라서 바르셀로나의 좌파적 지방분권주의에도 역시 일정 부분 지지와 공감을 보내기도 합니다. 여튼 여기서 저자가 주목한 건 시민 참여 형태의 민주주의 시스템인데 그 중 하나가 "디사이드 마드리드"입니다. 이 부분 설명이 자세한 편인데, 만약 우리도 이런 시스템을 도입하면 직접 민주주의에로의 건설적 진전이 이뤄질까요, 아님 편향적인 "정치충"들의 난동으로 소모적인 갈등만 증폭될까요? 모를 일입니다. 여튼 그가 가는 곳마다 주목한 부분은 "IT와 민주주의의 만남"입니다.

한국 진보 진영에서 틈날때마다 대안으로 제시하는 좋은 예가 "몬드라곤 협동조합"인데 이 책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실 이 예는 너무도 장점이 많아서 진영의 좌우를 불문하고 일단 도입하고 싶은 마음이 누구나 들 정도죠. 하지만 현실은, 나라마다 풍조와 사정과 사회 구조가 달라 일률적으로 좋은 성과가 나기는 힘듭니다.

책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곳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느껴진 건 좋은 정책 자체보다 그 정책을 만들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좋아서가 아닐까 싶다(p111)." 이 말을 뒤집어 살피면, 사람들이 겉으로는 아무리 좋은 명분과 정의를 내세워도 속에는 비틀리고 음흉하며 남을 모함하고 헐뜯는 악한 마음만 가득하다면, 세상에 둘도 없을 좋은 제도를 도입해 본들 말짱 헛수고란 결론도 나옵니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게,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 특졍 진영에서 내세운 메시지만 좀비처럼 외우고 다니며 악(惡)을 전파하는 주구자들입니다.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온 나라가 고생입니다만 이 와중에도 한국의 건강보험은 잘 정비되어 돌아간다는 게 중평입니다. 저자 역시 의사이시고 서울대 의대를 나온, 보건의료 분야 한국 최고 엘리트이신 분입니다. 스페인의 제도를 보고 한국 건강 보험 시스템의 여러 문제를 안 떠올릴 수 없으셨을 텐데, 사실 이 제도는 특히 의사들의 불만이 매우 큰 게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일단 "당장 가입자들의 보험료 부담이 증가하는 게 문제는 문제"라며 다수 대중이 직면한 고충에 먼저 눈을 돌리는군요. 여기서도 그는 IT 플랫폼의 도입 필요성을 지적하는데 우리 독자들은 저 앞 p95로 다시 돌아가서 저자가 "디사이드 마드리드"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독후감 앞부분에서 저는 마치 1980, 90년대식 교육제도가 큰 장점이나 가진 듯, 현재의 이도저도 아닌 제도가 최악인 양 슬쩍 암시하는 듯 말을 했습니다만 이는 독자인 저 개인 생각일 뿐이고 저자는 뭐 거의 180도 다른 입장입니다. 그 좋은 예가 p164에 나옵니다. 저자는 핀란드를 방문하고 각자가 각자의 취향과 비전에 맞는 "행복한" 교육을 받는 현장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산업 역군"을 길러 내는 구시대적 획일화 제도에 머물러 있다는 거죠. 본인도 그 제도의, 어찌보면 가장 큰 수혜자이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 확실히 존경스러운 면입니다.

한때 저자는 "극중주의"를 내세운 적 있는데 극우도 극좌도 아닌 철저한 중도 실용 노선이 살 길이라는 뜻에서였죠. 말은 좋지만 과연 실행이 잘 될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의문이었는데 이 책 p174부터 그 프랑스 탐방기가 펼쳐집니다. 사실 프랑스 같이 예쁜 나라는 직찍 사진만 봐도 즐겁지만저자는 관광하러 프랑스에 가신 게 아니기에 책 문장 하나하나에는 실천적 고민의 흔적이 역력합니다. 방불 일정에는 파비앙 페논 주한 프랑스 대사의 큰 도움을 받았다고 밝히는데 이 대목에서 독자인 제가 괜히 다 고마워지기도 하네요 ㅎㅎ

프랑스는 본디 (구) 서독과 더불어 출산율 최하로 유럽, 아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라인데 프랑스가 저럴 무렵 우리는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높은 중후진국 중 하나였죠.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가 되어 국가 소멸을 걱정해야 할 지경이니, 책임 있는 지도자라면 이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1년 전쯤 문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어떤 기자가 뜬금없이 이 질문을 던져 모두를 당황하게 했는데 사실 그 양반이야 그 나름 절실한 마음으로 던진 질문인 터라 마냥 황당해할 일도 아닙니다(그 기자가 안철수 노선이란 뜻은 절대 아닙니다. 분위기상 그분 개인의 소신으로 보였습니다. 그런 튀는 질문을 던질 정도면 오히려 문 대통령에 대한 열혈 지지자일 가능성이 크며, 내가 존경하는 분이니 나의 이런 절절한 심정을 알아 달라는 취지였을 수 있겠죠). 여튼 여기서 저자는 현 정부의 피상적인 태도에 대해 일침을 가하기도 합니다.

이어 독일 방문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는(사실은 "방문"이 아니라 장기 체류에 가까웠습니다) 독일인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첫째 공동체 정신이 강하다. 둘째 합리적 과학적 실용적이다. 셋째 지속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높다(p232). 그가 주목하는 건 특히 "분열, 분단에서 성공적인 통합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그들의 저력"이었습니다. 남쪽 체제조차 조화롭게 영위 못 하고 내분상을 보이는 우리가 특히 참고할 대목이 많겠죠. 저 둘째 특성에서 그는 "유독 가짜 뉴스가 적은 독일의 상황"까지 연역해 내는군요.

책 곳곳에서 그는 "미국식 모델보다는 유럽식"을 주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독일식을 선호하는 듯합니다(물론 분야마다 다르지만). 얼마 전 하버드의 크리스텐슨 교수가 타계했지만 이 책에서 안철수 저자는 "파괴적 혁신보다는 점진적 혁신"을 더 높이 평가하네요(영어가 아닌 독일어로 개념어 제시를 해 주셨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가 만난 베르크호프의 한스 기스만 박사는 "독일의 통일을 복제해서 한국의 통일 모델로 삼으려는 태도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합니다(p256). 여기서도 알 수 있듯 어떤 국가의 시스템이 좋다고 해서 무턱대고 모방하려는 자세는 사대주의일 뿐 아니라 위험천만하기까지 하며 이 점 저자가 유념 중이라는 걸 알 수 있네요. 저자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도 방문하여 예쁜 사진을 독자에게 선사합니다.

사진 구경만으로도 뿌듯해지지만 정책에 대한 고민이 엿보여 좋았던 책이고 특히 후반부 독일에 대한 여러 시론과 단상이 유익했습니다. 책 제목에는 "미래"가 들어가 있고 이 단어는 안 저자가 여태 정당 활동을 하며 여러 번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바 있습니다. 현재 저자는 다시 창당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나 역설적이게도 당명에 미래가 빠져 있고, 엉뚱하게도 이 단어는 여태 그와 별 접점이 없던 보수정당이 가져간 채 간판의 일부로 쓰게 되었습니다(이 책이 막 나올 시점만 해도 아직 없던 사정이었죠). 본인은 지역구 불출마를 공언했고 현재 신당의 지지세로는 비례대표 1번 당선도 힘들다는 분석이 있으나, 여튼 그의 참신한 문제제기와 순수한 열정, 정책 제안은 여전히 귀 기울일 부분이 있습니다. 그의 앞날에 행운이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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