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작가와의 대화 - 노벨문학상 작가 23인과의 인터뷰
사비 아옌 지음, 킴 만레사 사진 / 바림 / 2020년 1월
평점 :
품절


노벨 문학상 수상은 아마 문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영예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영광을 그저 세속적 영광으로만 받아들이고 마는 경향이 있습니다. 허나 그런 성취를 이루기까지 한 인간의 지성이 얼마나 많은 체험을 하고 고뇌에 젖으며 수많은 동료들과 치열한 소통을 겪었겠습니까. 결과는 부러워하면서 그 힘든 과정은 애써 외면한다면 이만큼 불성실하고 이중적인 태도가 또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예쁜 장정에 풍성한 화보를 담고 있습니다. 책을 받기 전에는 이런 책인 줄 몰랐는데, 너무도 만든 분들의 정성이 가득 담겨 "이런 책은 목욕재계를 마치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 그 담긴 내용을 음미한 후엔, 노벨상 수상이란 과연 하늘이 내린 시련과 축복을 자기 것으로 온전히 소화한 위대한 영혼들이 마지막에 챙기는 과실이란 생각을 더욱 굳히게도 되었네요.

p123이하에는 가오 싱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름이 낯선 분들도 있겠는데 2000년에 상을 받은 분이며 그 광란의 문혁 때 죽을 고생을 하고 체제 비판(그리 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성향이 당국의 눈 밖에 나 결국 프랑스까지 옮겨 온 이력이 있었죠. 책 해당 챕터를 열면서부터 주름 가득한 동아시아인 외모를 한 노년의 사내가 비춰지는데 그 라인만 흘깃거려도 연륜과 공력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청춘을 잃어 버린 나로서는 부지런히 일할 수밖에 없다 보니 할 말이 무척 많네요." 일에 몰입해야 자신이 치른 부당한 고생과 시련의 더께를 잊을 수 있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활용한 공간은 번잡하지 않았는데(그가 일종의 행위예술도 겸한 예술인이었다는 점 상기하시면..) 편집자는 이를 두고 일종의 미니멀리즘 구현이었다고도 평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다소 충격을 받았습니다. 책의 출판이 숲을 해친다는 환경적 배려도 그러했지만(바로 앞 주제 사라마구 편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요) 호메이니 등 세계의 온갖 이단아를 그 품에 다 받아들인 "똘레랑스"의 프랑스가 가오 싱젠의 책 번역에 대해 온갖 간섭을 다 하고들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의 책을 보고 분량을 줄이라거나, 무명 작가의 상업적 없는 책이라고 폄하한 출판사 중에 무려 갈리마르가 있었다는 사실은 진심 중격이었습니다. 혹시 암암리에 전해진 중국의 압력에 비겁하게 굴복이나 한 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나는 빨강> 등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오르한 파묵과의 대화도 있습니다. 그가 무슨 주제를 듣고서였는지 파안대소하는 사진이 흑백으로 크게 나오는데 왠지 그 웃음 중에서도 약간의 비애가 전해지는 듯했습니다. 파묵은 우리에게도 "부유한 가정의 좌파 학생(p222)"이란 출신이 잘 알려져 있고, 그가 나고자란 터키가 민족주의/종교회귀 등을 놓고 노선의 차이는 있으나 거의 내내 우파 권위주의 체제였다는 점도 우리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미투 스캔들 때문에 크게 상처를 받았으나 한국에서는 고은 시인이 시월만 되면 뉴스에 오르내렸는데 대개 이런 굴곡진 현대사를 가진 나라에서 유명한 문인이 배출되고 결국 노벨상 수상이라는 계기를 통해 세계 독자들과 만난다는 반복되는 패턴에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임레 케르테스는 헝가리 출신, 유대의 피가 흐르는 문인으로서 2002년에 이 상을 받았으며 지금은 고인입니다. 책에는 저렇게 인명 표기가 되어 있으나 헝가리는 우리 동아시아처럼 성이 앞에 오는 방식이므로 케르테스 임레라고 불러도 무방하죠. "그는 그 어느 소년과 전혀 연관이 없다(p285)."는 일종의 반어법입니다. 이제(인터뷰 당시이며, 현재는 이미 고인입니다) 노인이 된 그가 반 세기 전 수용소로 끌려가기 직전의 소년을 그리 타자화하여 관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체험을 기억화할 수 있는 게 있고, 도저히 맨정신으로 뇌리에 못 새길 종류가 따로 있지 않겠습니까.

나기브 마푸즈는 1988년, 아마 이 책에 실린 작가들 중 가장 오래 전에 수상한 작가군에 속할 것입니다. 출신도 독특해서 이집트인이며 아랍어를 모어로 쓰는 이들 중에는 최초 수상자라는 배경을 가졌습니다. 물론 아랍권 대부분의 주민은 뿌리 깊은 이슬람 문명의 영향을 개인의 선택 여지 없이 흡수하게 되는 편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어떤 저항이나 반감 따위를 갖지 않고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이 인터뷰에서 그가 주목하는 건 폭력과 테러리즘입니다. 폭력의 기원은 무엇이며 이의 극복은 어떤 방식이어야 하냐를 놓고 그는 서방과 이슬람의 변경에서 끝없는 오뇌를 연습합니다. 이 인터뷰가 이뤄질 때 아마 그는 95세였던 듯하며, 그렇다면 공교롭게도 그해 사망한 셈입니다.



책에는 이 외에도 스베틀라나 알렉세예비치, 도리스 레싱, 헤르타 뮐러 등 비교적 최근 수상자도 있고, 가브리엘 마르케스처럼 오래 전에 세계 뉴스 전파를 탄 분도 있습니다. 토니 모리슨처럼 미국 흑인의 아픔을 붓 끝으로 빚어내고 빌 클린턴과 직접 대담한 분도 있고, 전쟁과 그 후과인 원폭 피폭을 뼈저린 회한으로 담은 오에 겐자부로도 나옵니다. 한결같이 흑백 톤에 그 인생 역정 실루엣을 빚어낸 모습인데, 우리는 이로써 많은 작가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 가지 필터로 걸러 그 진한 궤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거대한 폭력과 압제 앞에 힘 없는 개인이 어떻게 자유와 의식과 각성을 내세우며 표연히 저항하는지, 혹은 존재의 절규를 아름다운 톤으로 다듬는지에 대한 장엄하면서도 담백한 회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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