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역사 다이제스트 100 New 다이제스트 100 시리즈 17
한일동 지음 / 가람기획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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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한 정치 단위인 브리튼 섬의 연합 왕국 근방에서 핍박과 설움의 역사를 겪었다는 점에서 아일랜드는 우리 나라와 비슷한 성정을 지녔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한국인들도 "음주와 가무"를 즐기는 편인데 아일랜드인들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이 책에도 p30⑧에 나옵니다). 이 책을 읽고 그렇게 피상적으로 알던 단계에서 벗어나, 세상 반대편에 우리와 너무도 닮은 겨레가 그들 나름의 삶을 자랑스럽게 일궈 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뿌듯한 느낌을 가슴에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나라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을 때, 마치 국사 교과서처럼 체계적이고 반듯한 목차, 구성으로 된 책이라면 물론 신뢰는 생기지만 접근성, 가독성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반면 이 책은 제목에서 보듯 다이제스트 형식 100장면 중심으로 독자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 전체를 통독하기 어려운(혹은, 그럴 엄두가 쉬이 나지 않는) 독자라면 자신의 관심 파트(여행, 음식 문화 라든가)만 골라서 먼저 읽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권말에 가나다순 사항 색인이 있어 내가 알고 싶은 키워드에 대해 쪽수를 바로 찾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에메랄드빛 아일랜드"(p26). 아일랜드는 독특하게 한글로 저렇게 쓰면 고유명사 Ireland도 되고, "섬"이란 일반명사(island)도 되는데 어떻게든 다 뜻이 통합니다. 물론 영어 발음으로는 미세하게 서로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이 나라, 이 섬의 사연 중 독특한 건 남북으로 분단이 된 상태라는 건데 기묘하게도 그런 것까지 우리하고 닮았습니다. 책에는 남아일랜드가 460만명, 북아일랜드가 180만명이라고 친절한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p26). 사실 460만명의 인구라면 한국 제2의 도시인 부산의 그것을 백만 정도 넘는 수치라서, 우리뿐 아니라 어느 나라의 기준으로도 그리 많은 수는 아닙니다. 180만 인구라면 한국에도 그 정도 규모의 도시가 여럿 있습니다. 이 정도 인구를 갖고 그토록이나 풍부한 문화를 빚어내고 오랜 세월 영국과 맞섰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우리 지난 역사가 생각 나 가슴이 아파 오기도 합니다.

이 책은 물론 아일랜드의 여러 모습을 자세하게, 또 입체적으로 다룹니다만 우리가 책을 읽고 크게 깨닫는 바 하나는 "그들 문화의 다채로움과 깊이"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도 그의 저서 중에서 "오로지 우리가 갖고 싶은 바는 문화의 힘"이라고 하셨습니다. 영국 근대 낭만주의 3대 시인 중에 예이츠가 있는데, 이 예이츠가 바로 아일랜드 출신입니다. 이 책 p188이하에는 아일랜드의 자랑이자 영국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에 대해 재미있고 상세한 소개가 나옵니다. p191에서 한 문장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예이츠는 자신의 경험을 시의 소재로 삼는 시인이었지만 그의 시가 위대한 것은 개인의 경험을 작품 속에 용해하여 인류 보편의 정서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앞서 제가 그를 3대 낭만주의 시인이라고 했지만 책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같은 페이지). "...그가 초기의 낭만적 자세에서 벗어나 인간과 사회와 역사를 보는 철학이 견실해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책은 아일랜드 문화, 역사, 경제, 정치의 소개에 그치지 않고 문학,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실려 있어 좋았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보면 수도원에서 성경을 베끼고(필사) 그 여백에 그림을 그리는(채색, 채식) 수도사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책 p118에는 "북 오브 켈스"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라 없이 유랑하는 민족이었으나 유대인들은 주위의 다른 겨레들에게 함부로 무시당하지 않았는데, 이는 예언자 마호멧도 말한 것처럼 "피플 오브 더 북". 즉 자신들만의 문화 코드를 책 한 권에 담아 후손들에게 길이 전할 줄 알았기 때문이죠. 우리 민족도 몽침 시절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여 국난을 극복하려 들었는데, 이 역시 북 오브 켈스처럼 겨레와 세계의 소중한 보물입니다.

p25에는 그 유명한 이니스프리 호수가 나오죠. 시인 예이츠, 미국인 데이비드 서로 등이 이곳을 찾아 상념을 정리하고 주옥 같은 글을 남긴 사실로 유명한데, 그 외에도 있습니다. 책을 조금만 뒤로 넘겨 보시면 p33 밑에서 두번째 줄에 "크랜베리스"라고 나오는데, 1990년대에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모은 밴드이며 이들의 대표곡 중에 "The Lake Isle Of Innisfree"라는 게 있습니다. p23에는 예이츠의 시 원문이 다 나와 있습니다(크랜베리스가 예이츠의 시에 곡을 붙인 겁니다. 마치 우리 나라 가수 마야가 소월의 시에 곡을 붙여 불렀듯) 저자께서 크랜베리스에겐 별 관심이 없으셨나 봅니다^^ 뒤 페이지에 보면 코어스에 대한 설명은 꽤 자세한데 활동 시기는 서로 비슷하거든요. 이 외에도 엔야라든가, 교황의 사진을 찢어 더 유명해진(책에 나오듯 아일랜드인들은 대부분이 가톨릭 교도입니다) 시네이드 오코너라든가... 아일랜드 출신 뮤지션은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차라리 음악세계에 아일랜드의 지방색을 구현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그저 아일랜드 출신이기만 한) 이들을 가리는 게 더 편할 정도입니다.

앞에서 잠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언급했는데 고대 유럽에서 라틴어로 이곳을 "히베르니아"로 불렀고 이 책 p17 중간쯤에 보면 "로마인들이 하이버니아로 불렀다"는 말이 있는데 같은 뜻입니다. 좀 나이 있으신 분들은 아일랜드를 "에이레"로도 알고 있는데 역시 p17 중간에 같은 설명이 나옵니다. 요즘 한국 교과서에서 아일랜드를 "에이레"로 표기하는 경우는 전무하다고 해도 됩니다.

이 책은 여행책 류가 아니기 때문에 역사와 문화에 대한 소개가 자세하며 사실 이 부분을 놓치면 독자로서 큰 손해를 보는 겁니다. p170 이하에는 감자 대기근의 여파가 상세히 설명되는데 아일랜드 역사에서 이 대목은 결코 간과될 수 없고, 특히 한국에서 진보 프레임으로 인문적 분석을 할 때 논의가 많이 되는 부분이니 아직 이슈에 대해 낯선 독자라면 정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잘 아는 편이라서(또, 읽다 보면 마음이 아파져서) 이 책 읽을 때에는 해당 챕터를 빠른 속도로 읽었습니다만 여튼 이 책 저자님 특유의 간명하고 핵심만 찌르는 서술이 매우 좋았습니다.

아일랜드의 역사는 브리튼 섬 역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령껏 정리된 이 책의 아일랜드사를 읽으면 영국 역사의 핵심 포인트 일부까지 같이 정리되는 점이 또 좋습니다. 올리버 크롬웰, 피트 경 등 굵직한 이름들이 줄줄이 나오며, 또 현대에 들어서는 마운트배튼 경의 암살 사건도 다뤄집니다. 한국이 무려 900회가 넘는 외침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아일랜드가 겪은 간난신고에 비하면 차라리 양반이었다는 느낌도 과장만은 아닐 겁니다.

p107에 보면 브레혼 법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고대인들의 훈훈한 연대 의식(solidarity), 휴머니즘이 내비치기에 읽으면서 연신 미소가 지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아일랜드인의 국민성 중 하나로 '호의적 태도'"를 드는데 병원이라는 단어 hospital도 본디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환대"라고도 옮겨지죠). 다만, 우리 독자들이 읽으면서 주의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해당 구절을 잠시 그대로 인용하자면 "부족의 구성원은 미성년자, 광인, 노인을 제외한 모든 이방인에게 환대를 베풀어야 한다"인데, 잘못 읽으면 "아니, 왜 미성년자, 광인, 노인은 제외하는 거지?"라고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성년자, 노인, 광인이야말로 어찌 보면 최우선적인 배려가 베풀어져야 할 대상이니까요. 브레혼 법의 해당 구절은 현대 영어로는 다음과 같이 보통 표현되는데요.

"...The only exceptions are minor children, madmen, and old people..."

여기서 "예외'는 환대를 받는 예외가 아니라, 그 반대로, 환대를 베풀어야 할 주체의 예외입니다. 따라서 이방인에게 환대를 베풀어야 할 의무가, 미성년자, 광인, 노인에게는 면제된다는 뜻입니다. 영문에서도 조금 모호해지는 대목이긴 합니다. 브레혼 법은 권말 사항 색인에 p107이 지시됩니다만 p57에도 잠시 언급이 있으므로 독서를 꼼꼼히 하시는 분들은 그 페이지를 추가로 메모하셔도 되겠네요.

후반부에는 아일랜드의 복잡다단한 현대사가 요약됩니다. 보면 그저 테러, 진압, 복수, 테러, 테러.. 의 연속입니다. 원 이래갖고 사람이 살 수가 있겠습니까. 책에는 20세기 독립 후의 아일랜드가 내내 유럽 최빈국이었으며 "병자"로 비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아일랜드는 (역시 책에도 잘 나오지만) 유럽에서 가장 높은 1인당 GDP를 자랑하는 윤택한 나라입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끌고 왔을까요? 역시 책에 잘 나오듯(그 중에서도 특히 p275), 1998년 이뤄진 벨파스트 협정 이후 양국 사이에 평화가 정착되어서입니다. 이 결과로 아일랜드만 잘 살게 된 게 아닙니다.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은 1970년대에 IMF 구제금융까지 받을 만큼 경제가 어려웠는데 아일랜드 정정 불안이 그 큰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데다 EU 통합 움직임 덕분에 영국- 아일랜드 양안은 물론 대륙과도 교역의 통로가 활짝 열렸으니 어디 경제가 안 살아날 방도가 있겠습니까. 평화는 이처럼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것입니다. 책에는 역시 현대 들어 성숙해진 아일랜드 여러 정파가 노조의 무분별한 파업을 막고 노사정 협의체를 통해 대타협을 꾀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좋은 선례를 본받아야 경제 회생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책은 재미있으면서도 필요한 정보만 잘 정리되어 있어서 좋습니다. 멋진 문장이 많아서, 두 구절의 인용으로 이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렇다. 아일랜드는 우리나라처럼 어둡고 슬픈 과거를 지닌 나라이자, 약함과 강인함, 순종과 저항정신을 동시에 지닌 모순덩어리의 나라이다." (p26)

"물질 만능의 어지러운 세상이 중심을 잃고 파멸의 막다른 골목과 늪을 향해 줄달음칠 때에도 에메랄드빛 아일랜드는 영원하리라."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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