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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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라는 이름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아일랜드계의 어느 부녀가 억센 생명력과 열정으로 가꾸던 그 농장의 이름과 같습니다. 이 장편 논픽션을 읽으면서 저는 내내 그 대하소설의 주인공 스칼렛이 떠올랐는데요. 차이점이 있다면 스칼렛의 부친은 다정한 인성(적어도 자기 딸한테는), 합리적인 세계관과 성실한 태도로 그 딸을 위험에 빠뜨리는 무모함은 저지르지 않았던 반면, 이 논픽션의 저자이자 주인공의 부친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외에도, 스칼렛과 달리 이 작의 주인공에게는 모친과 오빠들이 있었죠)

대뜸 그 고전 장편이 떠올랐을 만큼 이 책은 흥미진진하고 다이내믹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 고전이 역경과 위기 속에서도 건전하고 생산적으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여성의 흐뭇한 사연인 반면, 이 책에 담긴 사연은 여튼 해피 엔딩이긴 하나 내내 어둡고 무거우며 끔찍한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이 책의 배경이 무슨 백 수십 년 전이 아니라 우리와 동시대라는 점, 더군다나 세계 최선진국인 미국의 한 지방이라는 점도 놀라움을 더합니다.

장애인 헬렌 켈러의 경우 신체적으로 가장 비극적인 곤경에 처한 분이었지만 가정 환경은 유복했고 가족들도 대체로 상식적인 위인(그 이상이었죠 사실)이었다는 점에서 이 저자, 주인공만큼 불우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한 사람의 인생 성패가 자신의 의지와 노력, 재능에 달렸다 해도 이분만큼 환경이 나빴다면 도무지 방법이 없을 듯도 합니다. 여튼 이분은 그 모든 역경을 딛고 최후의 승자가 되어 이런 멋진 책을 우리 독자들에게 선사했으며, 그 자체가 위대한 업적이라 할 만합니다.

모르몬 교 신도들은 그 출발 시점에선 이단 취급을 받았으나 현재는 버젓이 미국 주류 사회에 편입되어 존경을 받는 집단입니다. 가깝게는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사업가 밋 롬니가 있었고, 불과 며칠 전 지병인 암으로 세상을 떠난 크리스텐슨 하버드 경영대 교수는 한국에 모르몬 선교사로 체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개인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벽촌에 머물며 근본주의적 삶을 고집한 분이 있었고, 보편적 삶의 원리를 거부한 그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아내, 부모(특히 그의 모친, 즉 저자의 할머니), 자녀 등 모든 가족을 궁지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습니다(본인은 결코 그리 여기지 않겠으나 제3자 입장에서는 다른 판단의 여지가 없을 듯).

외골수 신념으로 세상을 살려 하니 그들 가족에게 남은 일거리란 험한 노동밖에 없을 테죠. 부친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데, 이를 두고 그는 "중앙 정부의 독재, 압제를 거부하는 자유인의 결단"이라며 의미 부여합니다. 이 역시 전혀 뜬금없는 스탠스는 아니어서, 본디 미국이라는 나라가 중앙 정부에 대한 반항을 계기로 삼아 세워진 나라이고, 시민들의 자율적 삶이 권리 장전에 헌법적 권리로 보장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런 삶을 무작정 막을 수는 없는데, 다만 부모로서, 시민으로서 양심에 과연 어긋나지 않는 결단인지 그 시민이 정직하게 성찰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죠.

이 가족의 삶은 비참합니다. 오빠 중 하나인 션은 위험한 환경에서 노동하다(그 부친의 책임이 크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크게 다칩니다. 기묘한 건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도 외견상 아무 이상 없는 듯 보인다는 건데, (당시 아직 사리 분별을 하기에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쳤어야 할 게 저리 멀쩡히 보인다면 안 보이는 부분(내장 기관이나 정신)이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을까 하는 걱정(정확한 판단)을 이 소녀, 주인공, 저자가 이미 하고 있다는 점이 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의식이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도 션은 아끼는 여동생 타라의 이름을 부릅니다.

한 번도 부족해서 션은 한참 후 위험한 기계를 다루다 또 팔을 크게 다칩니다. 본인뿐 아니라 그 여동생도, 혈육이 이런 사고를 자주 겪어 육체적 정신적 모두 정상인 삶이 어렵게 되면 그걸 지켜 보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리기 직전까지 갈 만하지 않습니까. 모친도 이런 사람과 살다 보니 건전한 판단을 못 합니다. 딸(이 책 저자)이 지금 몇 살인지도 모르고 독립해서 나가 살라고 하다가 이제 겨우 열 여섯이라는 걸 일러 주자 "그랬구나, 내일 당장 안 나가도 좋아."라고 말합니다. 종교도 좋고 다 좋은데 사람이 일상을 살아나갈 때 최소한의 맑은 정신은 붙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가정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경제적 곤궁은 둘째 치고라도) 과연 어떻게 정상적 삶이 가능할지 참 읽는 내내 마음이 막막해졌습니다.

이 책의 배경이 무슨 에이브러햄 링컨이 통나무집에 살 무렵도 아니고 20세기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독자로서 기가 막히기도 했습니다. 여튼 타라는, 자신의 삶에 가로놓은 그 숱한 장애를 오로지 배움에의 열정으로 헤쳐 나갑니다. 말이 쉽지 이런 환경에서 뭘 배우려고 해도 제대로 책이 읽어나지겠습니까. 제가 관심 깊게 본 건, 이 어린 소녀 타라가 과연 뛰어난 지능을 가지기는 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그녀는 이런 책도 쓰고, 지성의 전당인 대학(그것도 명문)에서 자기 자리를 굳힐 만큼 성공한 인생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특히 "고등 대수학" 등에서 고전했다는 말로 보아 그리 엄청난 지능을 갖고 태어난 편은 아닌 듯 보였습니다. 물론 그렇기에, 즉 탁월한 머리라는 무기도 없이 나쁜 환경에서 이만큼 왔기에 더 위대한 성취가 되는 거겠죠.

경제적으로 겪는 어려움은 그 과정에서 터득한 강인한 의지, 자신만의 지혜 등이 부산물로 따라올 수 있기에(꼭 그런 건 아니지만) 마냥 불리한 여건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을 가장 살뜰히 돌봐 줘야 할 부모가 뭔가 비정상적인 가치관을 가졌기에, 정서적으로 베풀어야 할 보호를 등한히하고, 나아가 남들 다 받는 교육마저 부실하게 받게 한다면 그 밑에서 자라나는 애가 정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비뚤어지고 왜곡된 인성은 물론, 사리 판단을 합리적으로 할 수 없기에 자신의 과제도 제대로 해결 못 합니다.

미국은 개인주의적 삶이 지배적인 데다 광대한 영토에 남 일 신경 안 쓰는 분위기라서 이런 비극적인 가정(에서의 위대한 성취)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한국은 좁은 땅에 남들 눈치 보고 살며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 사람 취급을 받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사실 타라 웨스트오버 박사님 같은 비극적인 출발점을 맞이하는 인생은 거의 없습니다. 이분이 어린 소녀 시절, 배움이 얼마나 간절히 목말랐겠습니까. 그런 분이 만약 한국처럼 입시 위주의 교육, 줄세우기 풍조 같은 걸 겪었다면 아마 천국도 이런 천국이 없다며 환희에 찼을지도 모릅니다. 한국의 교육 풍조가 마냥 좋다는 게 아니라, 우리는 혹 배부른 푸념에 젖어 더 중요한 걸 잊고 있지나 않는지 반성을 할 일입니다.

책 속에는 대체로 보편적 지혜와 상식, 인류 공통이 동의할 만한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어린 타라 웨스트오버는 이 점을 알고 그 희미한 불빛을 제대로 좇았기에 지옥으로부터 광명의 세계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제발 부모님 감사한 줄, 내가 처한 환경에 감사한 줄 알고 주어진 여건을 소중히 활용하며 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무섭고도 치열한 책을 읽으며 독자로서 제게 남은 감상은 그것뿐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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