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왜란과 호란 사이 - 한국사에서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
정명섭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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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격변 와중에는 항상 결정적 순간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그 간발의 사건이 반대 방향을 틀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만약을 쉴 새 없이 떠올려가며 판국을 복기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재미있을 뿐더러 오히려 진지한 반성, 성찰, 모색의 건설적인 과정이기도 합니다.

제목대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에는 38년의 간극이 있습니다. 왜 나라가 흔들릴 만큼의 큰 국난을 겪고 나서도 또 한 번의 큰 시련을 다시 치러야 했을까? 이 38년의 기간 동안에는 광해군의 즉위, 북인 정권의 수립, 북인 정권과 광해군 사이의 자체 갈등, 서인이 주동이 된 소위 "반정", 이괄의 난, 그리고 호란 등이 이어집니다. 정명섭 선생의 이 책에는 한편으로 치밀한 분석과 반추가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 당시 긴박한 사건을 소설처럼 묘사한 대목이 있습니다. 분석은 분석대로 치밀하고, 소설처럼 재구성된 장면은 그것대로 긴박감이 넘칩니다.

갑작스럽게 터진 왜란 때문에 전 국토가 유린당하고, 장정이란 장정은 모조리 국토 방어와 인명 보호를 위해 쓰여야 했기에 많은 소년들이 병장기를 잡아야 했습니다. 책 1장에는 어린 병사들의 사연이 짧은 소설처럼 삽입되었는데 마치 한국전 당시 소년병 징집도 연상됩니다. 작가도 이 점을 의식한 듯 그런 언급을 하고 지나갑니다. 이 "아동대"는 과연 어떻게 대우받았을까. 현재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소년병들은 정말 유감스럽지만 총알받이 이상이 아닙니다. 책에는 "군량도 충분하지 못하니 폐지하는 것이 어떠냐"는 윤근수의 진언이 나옵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로 당시 군량이 부족했을 수도 있었지만(그랬겠죠), 그보다는 인도애적 고려가 더 우선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자는 참 꼼꼼한 게, "부디 그들이 무사히 고햐향에 돌아갈 수 있었기를" 기원하네요. 소집해제(?)가 끝이 아니라 사실 이 점이 진짜 중요하죠.

여진족은 오랜 동안 명과 조선의 골칫거리였는데 책에는 "멧돼지 가죽"이란 이름이 붙었던 누르하치가 이 견제 시스템을 어떻게 깨고 나왔는지 설명이 자세합니다. 정명섭 저자의 책은 표준적인 내용을 다루면서도 자신만의 관점에서 "진짜 궁금해해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잡고 나서 재미있게 문제를 파고들어간다는 점이 뛰어납니다. 교과서 등에서 수동적으로 접한 이슈들이 그의 책에서는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또 상식의 관점에서 재해석되어 풀립니다.

이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광해군은 오랜 동안 폭군, 심지어 암군의 이미지로 인식되다가, 참 엉뚱하게도 일제 강점기에 들어 비로소 "비운의 개혁 군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즘은 몇몇 교수 등의 선창에 의해 아예 절대 선 비슷하게 과장되는 경향까지 있지만 말입니다. 정명섭은 이런 대중의 착각, 선입견에 영합하지 않고, "그는 폭군, 암군으로 이해될 이유가 분명히 있지만,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도 따로 있다"고 아주 또렷하게 선을 긋습니다. 어설픈 양비론이 아니라 오히려 무지에 의한 폭주를 경계하는 이런 신중한 태도가 그의 책들에 무게감과 신뢰도를 더하는 겁니다.

무엇이 그럼 높이 평가되어야 할 대목인가? 후금과의 충돌이 명에게 이로울 게 없다는 점을 일찌감치 꿰뚫어 보았다는 게 저자의 평가입니다. 사태를 관망하는 게 조선으로서는 현명한 태도였고, 다만 이를 넘어 무슨 광해군이 장차 후금에서 대륙을 다 차지하는 미래까지 내다보았다는 건 터무니없는 우상화입니다. 당시 조선에 무슨 전폭적인 참전, 나아가 대명 원조까지 할 국력이 있었겠습니까.

광해군의 집권 기반인 북인은 그럼 과연 실리 외교를 펼쳤을까요? 그렇기는커녕 정반대였습니다. 서인과 적대한 건 맞으나 이는 학문 지향성, 내정 방침, 그리고 궁내 문제(인목대비, 영창대군 처리 문제) 등을 놓고 벌인 대립이었을 뿐, 오로지 명분에 죽고 명분에 사는 남명 조식의 학통을 이은 북인들이 무슨 실리 외교를 주장했겠습니까. 저자는 이런 점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역사에서 가장 무모한 반응이, 무엇은 절대로 옳고 무엇은 절대로 그르다는 식의 극한론입니다.

인조가 잘못한 건 본래 타고난 인간됨 자체가 용렬한 근본적 한계가 있었겠으나(돌머리한테는 뭘 가르쳐도 못 알아먹는 법이죠) 자신을 옹립한 반정 공신들 사이의 다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적 무능을 드러냈고, 참 한심하지만 명나라로부터의 승인도 못 얻어내었다는 실책이 있습니다. 게다가 명나라는 뭔 생각인지 자신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광해군을 끝까지 버리지 않거나, 혹은 이를 기화로 조선, 인조에게서 뭘 뜯어먹으려 들었습니다. 소탐대실이란 이런 걸 두고 이름이죠.

이 책에도 나오지만 광해군이 저지른 가장 멍청한 짓은, 가뜩이나 피폐한 민생을 돌보지 않고 경복궁 재건 공역에 또다시 일반 백성을 동원했다는 점입니다. 흔히 말하는 "전란 복구를 위한 실리 정책"의 이미지하고는 정반대되는 사실이죠. 인조는 이런 것, 또 백성을 등쳐먹는 탐관오리 등을 징벌함으로써 마치 포퓰리스트처럼 일단은 민심을 달래려고 들었습니다만 근본적인 방책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왕만 바뀌었을 뿐 바뀌지 않은 조선" 저는 결국 이 글귀가 이 책의 핵심을 잘 요약한다고 생각되네요. 광해군 체제도 문제가 많았지만 그를 대체하고 들어선 인조 정권이 더 무능했던 게 비극이었죠. 서인은 사실 이후 북학파도 그 속에서 나오곤 했지만 오히려 유연하고 실용적인 편이었습니다. 그런 서인도 결국 경직된 숭명 외교를 고집했던 게 안타깝고, 이건 조선 사회를 이끈 유교 사대부 자체의 한계입니다.

인조 반정은 사실 아주 어설픈 쿠데타였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광해군은 그 결정적인 밤에 제대로 대비를 하지 않습니다. 이 책뿐 아니라 대부분의 시각이 "이전까지 허위 고발이 자주 들어왔기에 경계심이 해이해졌다"는 식의, 이른바 거짓말쟁이 양치기 비유(혹은 주나라의 폭군 유왕과 포사 설화도 있죠)로 설명하지만, 독자인 제 생각으로는 그냥 자포자기 상태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책 p122에 보면 "북문 혹은 자하문이라 불리는 창의문에서 북소문으로 진격..."이란 대목이 있는데, 북소문=자하문=창의문이고 북대문은 숙정문이라고 해서 따로 있습니다. 착오가 아닐까 싶습니다.

"... 역사는 과거에 대한 지양 또는 지향이라는 흐름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며 그 전후관계를 살피는 시도들은 많았으나 사건과 사건을 연결하는 틈, 사이의 시간 자체에 주목하는 경우는 아직 널리 소개되지 않은 듯하다. 《38년》에서는 이러한 ‘틈의 역사’에 주목했다.." 사실 우리 같은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사건 자체가 긴박하게 흐르는 그 내러티브에, 소설이든 역사서에서든 매료되게 마련인데 정명섭의 책은 이런 독자의 니즈를 언제나 만족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재미에 치우쳐 진지한 접근을 희생한 게 또 아니라는 건 앞에서도 거듭 말했고요. 아주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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