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명의 완벽한 타인들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역시 재미있습니다. 리안 모리아티 여사의 작품들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베스트셀러이고 니콜 키드먼 같은 명배우 캐스팅으로 드라마가 만들어질 만큼 화제작이지만(케이블에서도 자주 틀어 줍니다) 특히 우리 한국 독자들한테 큰 관심을 받는 건 따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서양식 각박한 삶이 개개인의 영혼에 남긴 상처는 아마 21세기 지구촌 어디서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가 봅니다. "평온의 집". 이제는 지긋이 나이 들어 웬만해서는 "여성"으로 대접받기보다.... 그저 노부인 정도로 누구한테나 받아들여지는 정도지만, 프랜시스는 여전히 활기 차고 새침하고 매력적인 "정신"을 지는, 고급은 아니라도 그 나름 스타일리시한 차를 직접 몰고 다니는 전직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작가는 대개 상처 입은 타인들, 특히 "독자"들을 잘 어루만져 주는 기술이 탁월할 것 같지만 여기서 프랜시스는 반대입니다. 자신이 누구한테 좀 힐링을 받아야 할 상황이죠, 그래서 그녀가 찾은 곳이 바로 "평온의 집"입니다.

별것 아닌 듯해도 나중에 벌어질 큰 사달의 꼬투리가 되는, 사소한 듯해도 사소하지 않은 충돌과 불편이 꼭 보면 있습니다. 이 책의 전작이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입니다. 사소했었는데 나중에 확 커져 버린 거짓말, 아무것도 아닌 듯했으나 결국 이후에 큰 재앙으로 번진 그 어떤 불편, 충돌... 리안 모리아티의 모든 장편은 부분이 전체를 슬쩍 암시하고, 전체는 다 읽고 나서 돌아보면 그 어느 한 사건, 장면으로 되돌아옵니다. "결국 그 지점이 이 모든 소동과 비극의 시작이었구나" 하는 깨달음 같은 것.

한때 불륜 소재로 큰 인기를 끈 <사랑과 전쟁>이라는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었었는데 저는 모리아티 여사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 등장인물들의 대화, 성격, 갈등 양상 등이 그것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긴 중년 여성의 수다, 허세, 다툼 등은 사람 사는 세상 어디나 서로 닮은 모습이긴 하죠. <섹스 앤 더 시티>에서도 마찬가지였듯이. 모리아티 여사의 작품들은 큰 사건의 줄기에서 소소하게 가지를 치는 에피소드와 대화 같은 게 깨알 같은 재미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배우자, 친구, 이웃, 이제는 소원해진 동창,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람, 그리고 "퍼펙트 스트레인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합니다. 때로는 무례하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애교를 부리고, 때로는 서로 챙길 걸 챙기고 우아하게 빠집니다. 그러다가 터무니없이 엉겨붙기도 하는데 사실 이분의 작품에서 요런 대목이 참 일품입니다. 물론 둔한 우리 독자들이 눈치를 채건 말건 진짜 사건의 큰 줄기는 배후에서 수면 아래에서 도도하게 흘러가다 뜻밖의 지점에서 머리를 확 내밉니다. 사실 작가는 이 모든 효과를 치밀하게 계산했으니 "뜻밖"은 전혀 아니지만 말입니다.

낯선 곳에 일단 들어가는 것, 입문의 지점이 일단 어렵긴 합니다. 들어가는 단계를 일단 통과하면 다음부터는 별 문제 없이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난제는 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어렵습니다. 우리들 현대인 대부분은 자신의 영역을 어느 정도 굳혀 놓고 일상을 영위하므로 대부분의 생활에서 큰 불편을 못 느끼며, 능력에 아예 부치는 일이야 멀찌감치 떨어진 세상일 뿐입니다.

힐링을 받으러 찾은 장소에서 프랜시스는 대뜸 이해 불가인 불편과 조우합니다. 그 불편은 우연히 마주친 교란이라 여기기엔 조금 복잡하고 예외적이며, 혹시 의도적으로 마련된 "불친절", 혹은 "거부"가 아닐지 의심까지 될 만큼입니다. 아마도 비슷한 체험을 공유하게 될 다른 젊은(상대적으로)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신이 방금 겪은 불편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남의 덕을 봤다는 만족감도 들 수 있고 이제 지긋한 나이인 프랜시스는 금방 자신의 감정을 성숙하게 추스릴 줄도 알죠. 헌데 심상찮았던 예감은 결국 존재 증명을 하고, 일은 희한하게 꼬입니다. 애초에 짜증 크게 내고 발길을 돌리는 만도 못했던 건지.

거절을 하는 방법, 우아하게 누군가와 "손절"하는 기술도 현대 사회를 사는 중요한 노하우, 아니 예의, 매너 중 하나입니다. 그저 당장 편해지는 부수적인 노련함이 아니라, 어쩌면 이게 본질일 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프랜시스, 어쩌면 리안 모리아티의 약한 페르소나일 수도 있는 이 부인은 그때 방향을 바로 돌렸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 역시 잘나갈 때는 남들을 기분 좋게 내려다 볼 수도 있었고 마음껏 과장된 에고를 남들에게 강요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배려를 받기보다 베푸는 지점에 더 신경을 써야 하며, 그래도 여전히 삶의 이런저런 지점이 팍팍하게 다가옵니다. 그렇게 조심하며 살아도 뜻밖의 재앙은 닥쳐 옵니다. 우리 독자는 이 난감한 상황을 프랜시스라는 인물을 통해 대신 치러 내지만, 우리가 저 상황에 실제로 떨어졌다 쳤을 때 과연 흥미진진한 소설과 함께 예습한 내용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여튼 결론은 "모리아티의 소설은 참 재미있다"입니다. 각자 취향에 따라 스릴러로 읽든 막장 드라마로 즐기든, 아니면 인생 독본으로 진지하게 "공부하든" 간에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