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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여성 과학자들 - 직접 만나서 들은 여성 과학자들의 생생하고 특별한 도전 이야기
막달레나 허기타이 지음, 한국여성과총 교육홍보출판위원회 옮김 / 해나무 / 2019년 9월
평점 :
"여성의 신경계는 전혀 달라서, 여성들은 중요한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서 걱정이죠." (p193) 위의 말은 이 책 중 마리아 괴퍼트메이어(=괴페르트마이어)를 다룬 챕터에 실려 있습니다. 마리아 괴퍼트 메이어는 괴팅겐 대학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낸젊은 학자였고, 그녀의 장래성에 주목한 컬럼비아 대학 물리학과가메이어 부부를 미국으로 초청한 시점에서도 해당 학과 소속 이시도어 라비 교수가 이런 견해를 여전히 가졌던 거죠.
과학자는 아니고 수학자였지만 러시아의 소피아 코발렙스카야, 독일의 에미 뇌터 등도 당대의 편견 때문에 그 찬란한 재능을 발휘할 때 여러 장애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미들마치>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조지 엘리엇도 본명이 따로 있었는데 그저 출판의 편의를 위해 마치 남자처럼 들리는 저런 필명을 내걸어야 했죠. 어떤 시대, 사회, 문명이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유지한 탓에 직장과 조직에서 배척한다면, 이는 오롯이 그들 자신의 손해로 돌아오며 큰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성에의 평등한 채용은 윤리적 의무 따위가 아니라 조직과 공동체의 생존 전략의 차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책에도 나오듯이 괴팅겐은 독일에서도 대학 도시로 유명합니다. 얼마 전 법무부 장관에서 퇴임한 박상기 교수도 괴팅겐에서 형법학 박사를 딴 분이죠. 책에도 역시 나오지만 양자 역학에 대한 유력한 해석 중 하나를 발전시킨 곳이기도 합니다(코펜하겐, 뮌헨, 레이던, 취리히와 함께). 이처럼 첨단 물리학의 심장부였던 곳에서 "교수보다 더 양자역학을 잘 알았던" 뛰어난 젊은 여성이 두각을 나타낸 사실도 놀랍고, 그런 여성이 남편과 함께 발디딜 터전을 찾아 기어이 신대륙으로 건너와야 했던 사실도 놀랍습니다. 왜 사실과 진리 앞에 겸손해야만 할 과학자들조차 (20세기 전반까지도) 이처럼 고루해야만 했을지.
지은이인 막달레나 허기타이(Magdolna Hargittai) 교수 본인이 여성 과학자이기도 하며, 1945년생으로 올해 73세이니 꽤 고령이십니다. 이 책은 그저 여성 과학자들의 일대기를 간략히 편집, 소개한 책이 아니라, 허기타이 교수가 직접 만나 본 분들에 대한 개인적 상념과 평가까지 곁들였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 있습니다. 원자핵 껍질 모형에 대한 업적으로 노벨상까지 받은 저 마리아 괴퍼트메이어를 직접 만났다면 꽤 연로한 분이라는 점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는 마리아 괴퍼트메이어 말고도, 부부가 함께 소개된 챕터가 많습니다. (제1장은 그 유명한 퀴리 부부부터 시작해서 전부 부부 이야기이며, 이후에도 십 수 명의 경우가 더 나옵니다) 아무래도 여성 과학자를 아내로 맞아 충분한 이해와 배려를 베풀고 나아가 "외조(?)"까지 가능하려면 동종 업계 종사자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예전이었다면 말이죠. 이를테면 달렌 호프먼- 마빈 호프먼 부부입니다(p203 이하). "미안하지만 우리는 그 부서에 여성을 채용하지 않습니다!" 이때는 이미 2차 대전이 끝난 지 6년이나 지난 시점인데도,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 인사과에서 그녀는 이처럼 냉랭한, 어이없는 답변을 들어야 했습니다. 사실 이때쯤이면 미국은 소련과 함께 치열한 무기 개발 경쟁을 벌일 시점이라 한가하게 성차별 스탠스를 유지할 형편이 아니었는데도 말이죠.
p119부터는 이다 - 발터 노다크 부부의 사연이 나옵니다. 이 두 분은 특히 그 유명한 엔리코 페르미의 로마 실험과 "다른 설명"을 제시한 사실로 잘 알려져 있죠. 저자 막달레나 허기타이는 이를 가리켜 "통찰"이라 부르는데, 천재들만이 가지는 신기한 특징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형식 논리를 동원하여 왜 A라는 사실에서 B가 나오는지 낑낑거리며 연결 고리를 찾아나가는데, 천재들은 C, D를 건너뛰어 H, I까지 직행하는 겁니다. 이런 천재들은 그저 직관으로 결과를 앞서 볼 뿐 아니라 증명까지도 능숙합니다. 이런 천재 부부들도 대공황의 여파로 제대로 된 직위를 얻지 못해 젊은 시절 긴 시간을 고생했을 뿐 아니라 무식한 나치의 검열까지 받아야 했던 점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p82이하에는 결정학자 부부 이저벨라 - 제롬 칼 부부의 사연이 나옵니다. 특히 막달레나 허기타이 교수는 이들 부부를 가리켜 "친구"라 부릅니다. 이 챕터에서 허기타이 교수는 자신의 남편 이스트반(헝가리인에게서 흔히 보는 이름이며, 저자 허기타이 교수 역시 헝가리 국립대에 재직 중입니다)을 언급하며 "기체상 전자회절(원, 외계어가 따로 없네요)" 분야를 같이 연구하는 학자로서 큰 친밀감을 표시합니다. "과학자 부부의 자질"이라니 대체 뭘까요? 같은 대학에서 젊은 시절 만나고, 실험을 좋아하는 기질을 공유하고, 그 많은 기체 분자 중 특히 이산화탄소를 좋아하고(?)... 사실 톨스토이의 유명한 말처럼,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으나,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한" 법입니다. 이처럼 이 책에는, 그저 성공한, 그러나 고독했던 여성 과학자들의 다소 어두운 이야기보다는, 자신을 잘 이해해 주고 업적의 높이를 더욱 북돋워 준 유능한 "동료이자 남편"을 가진 분들의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다들 깨가 쏟아지게 금슬도 좋았던 편이라 우리 독자가 읽기에도 재미 있습니다. 세상은 본디 불공평한 볍이지요(?).
이 책에는 동양인 과학자도 여럿 나옵니다. p412부터 40페이지 가까이 이어지는 부분은 아예 인도인들로만 채워졌고, 중국의 우젠슝(吳健雄. 특이하게도 끝 글자가 수컷 웅입니다), 일본의 구로다 레이코(?田玲子)도 있습니다. 특히 구로다 레이코의 경우 젊어서부터 영국에 유학하며 많은 업적을 내었고, 이후 귀국할 때 "너무 오랜 동안 외국 생활하면 일본에 적응하기 힘들 수 있으니.." 같은 이상한 이유로 조기 귀국을 종용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분은 첫째 여성이라는 핸디캡(!), 둘째 외국물을 너무 먹은 부적응자라는 당치 않은 선입견까지 이중고와 싸워야 했던 셈이죠.
발견은 탐정소설처럼 흥미진진했다(p206)
상을 받는 게 일하는 것만큼 재미있진 않아요! (p197)
이처럼, 사실 재능, 천재성이란 워낙 압도적인 장점이어서, 설령 어떤 난관, 애로가 있다 한들 그런 게 그 재능을 꽃피우는 데 결정적인 좌절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불과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특히 젊은 여성 천재들에게는 만만치만은 않은 장벽이었을 텝니다. 이 책에는 당연 예전 사람들만 다뤄진 건 아니라서, p154 이하의 이본느 브릴의 경우 그 옆에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버락 오바마가 서 있는 사진도 있습니다. p290에는 미리엄 로스차일드란 분이 나오는데, 물론 동명이인 아니고 나폴레옹 시대부터 세계사를 무대 뒤편에서 주무른 바로 그 가문 출신입니다. 뭐 유전자 자체가 우수하다 보니 저런 재능을 가진 이도 배출하는 거죠.
책을 다 읽고 보니 우리가 부족했던 건 그저 여성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우리가 가장 기대어야 할 "과학"에 대한 열정이라는 점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어릴 때만 해도 과학 도서 읽기를 장려해서 방학 숙제 목록에 특별히 끼워 넣을 정도였는데, 요즘은 수능 점수 높은 인재가 의사 선생님, 아니 미용실 원장님만을 선호하는 추세입니다. 이런 판에 제대로 된 "여성 과학자"가 양성될 수 없죠. 이 책에는 따로 한국어판 서문도 실려 있으니 꼼꼼히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