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요기의 자서전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지음, Self-Realization Fellowship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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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청마 유치환은 그의 시 중에서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오타 아님)"라 읊은 바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 존재를 초극하여 지극한 도, 궁극의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과연 극한의 사막, 높디높은 산악, 혹은 인도 곳곳의 성지와 같은 특정한 환경에서라야만 가능한 걸까요? 


이 책은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자서전입니다. 평범한 사람도 그 신묘한 환경과 기후 속에서 살다 보면 절로 득도한 선인이 될 것만 같은 인도에서 여태 얼마나 많은 구루, 리시(rishi), 스승 들이 출현했겠습니다까만 특히 이분은 크리야 요가를 구미에 전파한 업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안타까운 건, 본고장에서 위대한 스승으로 현지인들에게 널리 추앙받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면서, 꼭 이처럼 서양에서의 유명세라는 통로를 거쳐야 마치 어떤 검증이라도 받은 양 비로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책의 서문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처음에 비웃으려고 책을 접했던 이들이 읽고 나서는 찬사와 감탄을..." 공중 부양이니 득도니 하는 말들이 현대의 각박한 삶 속에서는 그저 허황되게 들리기가 십상입니다. 한국에서는 그 정도로 "비웃음"의 대상까지는 아니지만, 요가라고 하면 그저 미용 체조 정도의 인식에 머물러 있는 듯도 합니다. 하물며 요가의 스승이 트레이너 레벨을 넘어선,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 받는다고 하면 고개를 갸웃하는 게 보통이죠. 실제로 책을 읽어 봐도 파라마한사 요가난다란 분이 엄청난 세속적, 정치적, 혹은 사업적인 성과를 거두는 대목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양, 내면에의 탐구, 그리고 마침내 얻은 영혼의 평화와 안식 뿐입니다. 


바로 이 점이, 성공한 기업가의 표본이자 혁신의 아이콘으로 일컬어지는 스티브 잡스에게 큰 영감을 준 비결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잡스는 사업가로서 시련도 많이 겪었지만(실제로 1990년대에는 애플 사, 그런 애플에서 한때 축출된 그의 행적이 경영학 커리큘럼에서 비웃음의 사례로 더 자주 언급되었죠. 1990년대 후반에 와서야 그의 명예가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여튼 최종적으로 비즈니스계의 승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세속에서 이룰 만한 걸 다 이룬 그에게도 마음 한 구석에는 뭔가 허전한 갈증이 여전히 자리했던 것입니다. 


잡스까지 가지 않더라도 일상을 바쁘게 사는 평범한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루이스 캐롤의 <앨리스> 시리즈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우화처럼, 남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뛰지만 결국 제자리에 머무를 뿐인 현대의 살인적인 경쟁.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전신에 몰려오는 허무감(성취감이 아닌). 과연 무엇을 위해서 이처럼 정신 없이 나 자신을 몰아쳐야 하는가 같은 회의를 우리 모두는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종교를 믿어 봐도 결국 지도자가 신도들을 경제적 관점에서 대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한국에 불교 문화가 전래된지 1500년이 넘기 때문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어느 귀공자가 문득 생의 허무를 느껴 출가(혹은 가출. 책에서는 소년들이 가출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주인공 자신을 포함)하는 테마는 꽤 익숙한 편입니다. 앞에서 제가 "꼭 인도나 아라비아의 사막이라야 사람은 영원에의 추구 동기를 갖게 되고, 수양의 동력을 얻게 되는가?"라고 자문했지만, 유독 인도에는 이런 성자가 드물지 않게 출현하는 편이죠. 이 책의 주인공 무쿤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청장년이 되어도 그의 집안 어르신에게 금전 지원을 받아 여행을 떠나는 대목이 나오듯, 사실 어렸을 때 양친이 일찍 돌아가신 것 말고는 딱히 아쉬운 점 없이 자란 게 그의 성장 배경이었습니다. 뭐 어머니를 일찍 여읜 사실 자체가 정신적으로 가장 큰 시련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p80 이하에 보면, 요가, 요기, 혹은 득도의 길에 딱히 관심 없을 법한 독자라도 눈 크게 뜨고 읽을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과연 사자,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을 만한 인간, 장사가 있을까요? 기독교 구약에 보면 삼손의 설화가 실려 있고, 우리도 도적 임꺽정이 괴력을 선보였다는 식의 기록이 전해집니다만 그저 반신반의할 뿐입니다. 요가난다의 큰 스승님 중 한 분인 스와미라는 분의 일화에 대해 책은 비교적 자세히 서술합니다. 증빙이라곤 요가난다 본인이 스승님께 직접 전해 들었다는 점 뿐이지만 이들의 언행에 거짓이 없기에 우리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진지해집니다. 저보고 결론적으로 이 이야기를 믿냐 아니냐에 대해 잘라 말하라면, "믿는다" 쪽으로 기울어지겠습니다.


수련과 명상, 뒤이은 득도에 다다른다면 누구나 벵골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루 스와미처럼 강건한 체력과 단단한 체격을 타고나야 하며 이 점은 본인이 분명히 언명합니다. 당장 이 책의 저자, 주인공인 요가난다한테 시켜 봐도 그저 호랑이 밥이 되고 말았을 겁니다. 구루가 하는 말은, "나와 비슷한 조건을 갖고 태어난 장사라도 다 호랑이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 호랑이가 무서운 점은, 자신 앞에 놓인 상대를 노예로 만드는 능력이다. 약한 자는 물론, 강한 자마저도 이미 호랑이 앞에서 모든 자신감을 잃고 패배자로 지레 굴기 마련이다."입니다. 무식한 자신감만 갖고 만사가 성취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노력과 준비를 어느 정도 마친 후 최종적으로 일이 성사되게 하는 건 바로 정신의 무장과 확신임을 그는 강조하고자 했던 거죠.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념과 깨달음이 마련된다면, 애초에 안 될 일도 차근히 준비할 마음조차를 먹게 해 줄 소중한 출발점 노릇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안 될 일이라는 게 꼭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기"가 될 필요는 없겠지만요.


처음에 "꼭 인도나 아라비아의 극한 환경에서라야만 득도가 가능한가?"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에 대해 책은 오히려 정면으로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합니다. p185에서 청년 무쿤다는 오래 자신을 이끌어 주신 스승을 떠나 히말라야로 향하겠다고 합니다. 이 책은 그때로부터 오래 뒤에 쓰였으므로, 어조는 다분히 "어리석었던 젊은 시절에 대한 반성"의 기미가 농후하게 배어납니다. 그는 심지어 "참 스승을 버리고 흙덩어리(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겠죠)에 의존하려 들었다"며 신성한 자연에 대한 (온당한) 폄하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처럼 참다운 수련자는 환경이나 우상, 특정한 지표를 물신화하지 않습니다. 믿고 따를 건 오로지 마음, 오염 없는 깨끗한 의식 뿐입니다. 히말라야를 두고 한 점의 주저도 없이 "흙덩어리"라 규정하는 그의 호쾌한 선언을 보십시오.


이 책에는 유독 "과학"에 대한 언급이 잦습니다. 기존 현미경의 배율을 몇 만 배 개선한 분 이야기도 나오고, p209에는 노벨 상을 받은 샤를 리셰의 진솔한 고백도 제법 길게 인용되며, p335에는 고대 힌두 경전 베다와 현대 물리학의 연관성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명상과 사고와 깨달음 등의 실체는 무엇인가. 요가난다는 한마디로 "성능 좋은 수신기"와도 같다고 말합니다. 라디오 주파수만 잘 맞추면 한 채널에서는 클래식 음악도 나오고, 다른 채널에서는 연예인들의 수다도 들을 수 있듯,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르는 온갖 (좋은) 생각은 우주와 자연이 인간을 향해 보내는 끊임 없는 진동과 같다는 것입니다. 구태여 사고, 깨달음 등을 물리 개념인 "진동"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점이 눈에 띕니다. 1950년대 같으면 동양 사상과 문화를 "과학적"인 서양의 그것과 대비하여 다루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점을 고려해야 할 듯합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오해와 편견이 극복되었고, 그에는 바로 이 요가난다 같은 선구자의 공헌이 컸을 줄 압니다.


p130에는 요가난다가 그의 스승 발치에 앉아 온화한 표정을 짓는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본디 "우파니사드"라는 말 자체가 "가까이 앉다"란 뜻이라고 합니다. p57에도 그의 사진이 있는데, 확실히 어느 위인을 그저 텍스트로만 접하는 것과 실물을 (흐릿하나마) 관찰하는 건 차이가 있다고 여깁니다. 


이 책은 SELF-REALIZATION FELLOWSHIP이 인정한 정본입니다. 예전 1980년대에도 모 출판사에서 이 자서전을 펴내어 많은 한국인들이 읽은 적 있었고, 저는 책장을 여러 장 넘긴 후에야 전에 읽었던 그 책이었음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과거의 그 번역본과는 그만큼 차이가 많다는 뜻도 되는데, 그만큼 이 책은 권위 있는 분들의 치밀한 검증을 거친 흔적이 역력합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낸 기독교의 성경을 보면 "역자(들)"의 구체적 인적 사항을 책 표지에 명기하지 않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책은 600페이지가 넘는 꽤 두꺼운 분량이고 폰트도 작은 편입니다. 그런데도 오타가 거의 없고, 번역은 명징하고 뚜렷한 한국어로 이뤄졌습니다. 신은 대체로 "하느님"이란 일반 용어로 옮겨졌는데, "무엇을 믿어도 결국은 나를 믿는 것"이란 힌두이즘 특유의 통 큰 관용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기독교 성경도 여러 대목에서 인용되는데 예를 들면 p183의 잠언서, p210의 마태 복음, p604의 이사야서 등이 있습니다. 역주도 많이 달려 있어서 이 책뿐 아니라 인도 문화 전반, 지리에 대한 지식을 확충할 수 있습니다. "~지"는 존칭 접미사라는 점이 p127 각주에 나오는데, 이 점을 알면 p210 이후에 자주 나오는 "구루지"등의 호칭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오타가 아주 없지는 않았는데, p23 밑에서 네번째 줄에 보면 "하퍼 앤 콜리스"는 "~ 콜린스"의 오기입니다. 개정판이 나온다면 수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p176 이하에 보면 갑자기 믿음의 모임에 합류하게 된 쿠마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스승의 애정을 독차지했는데, 행간을 잘 읽어 보면 그런 쿠마르에 대한 요가난다(물론 그 역시 젊었던 시절)의 은근한 질투가 느껴져서 인간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 인용은 생략합니다만 마치 중국 고전이나 인도의 에피소드 중심 편집 일화집에 나오는 풍이라서 재미도 있고 느끼는 바도 많았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꼭 이 책을 성인의 자서전으로 읽을 게 아니라, 단편 단편으로 끊어서 교훈집 모음으로 읽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 편이 어떤 독자들에겐 오히려 부담이 적을 듯도 합니다.


여튼 라이벌(?) 쿠마르는 결국 깨달음을 얻는 데 실패한다는 건데, 명시적으로는 안 나오지만 결국 여색, 유흥 등의 유혹에 굴복해서였던 듯합니다. 이 쿠마르가 비중 있게 회고되는 이유는, 산스크리트어 학습에 곤욕을 치른 만큼 그렇게 공부를 잘 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 (책 초반 고등학생 시절 회고에 나옵니다) 무쿤다와 달리, 쿠마르는 꽤 총명했던 제자인 듯하기 때문 아닐지 저 혼자 생각해 봤습니다. 여색을 멀리하라는 건 옛 구루들의 거의 공통된 훈육이며 중국 유가의 공자도 예외가 아닌데, 요가난다의 스승님은 이 대목에서 놀라운 언급을 합니다. "아마도 그 말을 한 스승께서, 젊은 시절에 아픔을 겪은 탓이 아니겠느냐?" 현자의 가르침이라 하면 일점일획도 의심을 품지 않아야 한다는 고루한 태도가 전혀 없습니다. 쉽게 말해 "그게 어디 여자 잘못이겠어? 마음이 흔들리고 욕구가 충족 안 된 채 뒷정리도 잘 못한 남자 탓이지." 뭐 이런 뜻 아니겠습니까? 여성을 그저 객체, 대상 정도로 인식하지 않고 엄연히 대등한 인격체로 파악한 데서도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깁니다. 


p608에는 타계 후에도 20일 가까이 부패하지 않은 그의 시신에 대한 증언이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보면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던 알료샤(알렉세이)가, 그가 스승으로 섬신 스승, 사제의 시신이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남들보다 더 빠르게, 지독하게 부패하는 걸 보고 크게 믿음이 동요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과거 성철 스님이 입적했을 때 엄청난 양의 사리가 나온 과정을 마치 스포츠 중계하듯 보도가 이뤄져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건 물리적 이적(異跡)이나 그 강도가 아니라, 스승이 남긴 가르침의 진정성이겠습니다.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뭘까요? p286에 나오듯, "소년 무쿤다가 스승 요가난다로 탈바꿈하기까지"의 재미나고도 가슴 아픈, 때로는 뿌듯한 여정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구루의 득도기라면 따분하고 막막한 사연 가득이겠다는 선입견이 있지만, 이 책은 꽤 유쾌하고 흥미로우며 무엇보다 "가오 잡는" 엄격한 스승의 말투가 아닌, 인간적이고 솔직한 고백이 담겨 있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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