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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케일 - 앞으로 100년을 지배할 탈규모의 경제학
헤먼트 타네자 외 지음, 김태훈 옮김 / 청림출판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Size does matter." 한때는 그저 규모가 커야 시장이든 어디에서든 승자가 된다는 철칙이 통하기도 했습니다. 경제학 분야에서는 오랜동안 "규모의 경제"라는 영역이 따로 존재하여, 어느 정도 체격을 갖추지 못하면 시장에의 진입도 어렵고 채산성도 맞추지 못한다는 냉엄한 규칙이 지배하기도 했죠. 1990년대 한국 경제는 재벌들이 영역을 가리지 않고 문어발식으로 활동 반경을 확장했기에, 정부가 따로 나서서 "업종 전문화"를 유도하기도 했지만 이른바 "대마 불사론"이 널리 신봉되어 이리저리 덩치만 키운 기업은 정부 차원에서도 못 죽인다는 나쁜 믿음이 만연했습니다.
현재는 그렇지 않아서, 실속도 없이 덩치만 큰 기업은 급변하는 시장을 흐름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진지하게 전략을 고민하는 기업들은 덩치를 줄이고 보다 선명한 목표에 주력, 집중하게 되는데 이런 추세를 일러 이 책 저자들은 "탈규모화"란 뜻에서 언스케일이라 명명합니다. 규모를 "보유"하지 말고 적절히 빌려 쓰(rent)면, 별 효용도 유지 이유도 없는 스케일을 내 어깨에서 덜어낼 수 있습니다. 규모에의 집착에서 과감히 벗어나자는 저자들의 주장은 그가 실제로 창투회사를 통해 여러 스타트업에 결정적 도움을 주고 놀라운 성과를 낸 실적이 있다는 이유에서 더욱 설득력을 갖습니다.
탈규모화를 촉진하는 트렌드는 예전부터 이미 징후를 드러냈습니다만 저자들이 주장하는 탈규모화, 언스케일은 특히 근자에 들어 발전을 본 여러 실물 기술상의 발전을 통해 훨씬 뚜렷한 동력을 갖습니다. 예를 들면 p68 이후부터 잘 설명되는 증강현실, 가상현실 같은 것입니다. "... 5만 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스타디움을 짓는 대신 가상 현실을 통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경기를 즐길 수 있게 해 주는 틈새 리그들이 생겨날 것이다..." 틈새 리그까지는 몰라도(왜냐면 미국에서도 아직은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올해 초 프로야구가 막 개막했을 때 모 통신사의 광고에서 우리는 이미 방구석, 사무실에서 환호를 내뱉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실생활에 성큼 파고든 가상현실(기술)의 위력을 어느 정도 실감했습니다.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도심 한복판에서 몇 평 채 되지도 않는 공간을 활용해 골프 연습을 할 수 있는 (몇 년 전의) 혁신 사례(실내골프연습장)를 보면 "탈규모화"의 생생한 현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공유 경제 역시 현대의 거스를 수 없는 추세인데요. 이 역시 "탈규모화"와 밀접히 닿아 있습니다. 산업화 시대에 개개인은 모두 사적인 공간, 이동 수단으로서 차량이 필요 했습니다. 1990년대에 카풀 운동이 소규모로 일었습니다만 이는 교통 정체에 대응하기 위한 소극적 몸부림에 불과했죠. 지금은 모바일과 네트워크의 발전으로, "애초부터 그렇게 많은 양이 필요 없었던", 따라서 적정 규모로만 생산되고 운행되는 자율 차량이 우리의 기존 수요를 대체합니다. 이는 자동차 산업의 경기 침체를 부른다기보다, 오히려 자원의 배분과 소비의 최적화를 야기합니다. 자동차 제조 회사들은 종전처럼 무조건 덩치만 키워 시장 셰어를 높이려 드는 게 아니라, 알맞은 규모의 플랫폼을 알뜰하게 갖춰 이를 유능한 파생 사업자에게 임대하는 데 주력할 것입니다.
블록체인은 그저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와만 연계된 기술이 아닙니다. 현재 대부분의 거래는 종이 문서에 문구를 작성하고 인감 도장을 찍거나 서명을 남기는 식으로 증빙이 이뤄집니다만, "전자 거래"는 이 모든 과정에 논란, 분쟁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는 식으로 진화합니다. 실제로 한국의 몇몇 강소기업이 이런 전자 결재 솔루션을 개발하여 정부, 지자체, 다른 기업에 판매를 위해 열심히 홍보 중인데 아마 이 책 저자들도 한국의 현황이 그 정도로까지 발전한 줄은 모를 겁니다(뭐 우리들도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저자는 이를 가리켜 "블록체인은 자동화된 상업의 또다른 형태"라고 말합니다. 자동화란, 이전 단계에서도 여러 불필요한 잉여, 슬랙을 줄이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블록체인 역시 경제 각 분야의 "스케일"을 감소하는 쪽으로 동력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탈규모화가 진행되면, 불필요한 에너지 생산, 특히 탄소 연료를 사용한 발전 등이 상당 정도 줄어 들어 결국 환경 보존에도 이바지합니다. 우리 현대인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환경의 아젠다에도 이 언스케일이 기여하는 것입니다. 책은 "탈규모화"가 에너지 생산에도 적용되어, 멀지 않은 미래에 각 가정이나 기업이 소규모 발전을 영위하는 식으로 완전히 대체되리라고 전망합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빼놓지 않고 가르치는 항목 중 하나가, "전력 산업 등은 한계비용과 한계수익을 맞추는 지점이 워낙 높아서 엄청난 설비, 자본을갖추어야 진입 장벽을 넘을 수 있고 이 때문에 자연 독점이 이뤄진다"인데, 이제 이게 석기 시대 타령이 되고 마는 겁니다.
의료비와 의료 서비스 문제는 여전히 해결 안 되는 딜레마를 갖습니다. 무작정 의료인 배출을 늘리자니 질(質)의 이슈가 우려되고, 공공화를 강화하자니 건보공단의 재정 고갈이 불을 보듯 뻔하고... 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의 발달은 의료인 수요의 상당 부분을 충족할 뿐 아니라 데이터 퀄리티의 향상으로 인해 맞춤형 진료가 가능해지리라는 전망을 낳습니다. 채산성의 악화는 기본적으로 과잉 투자, 낮은 효율성에 기인하는데 이 역시 기술의 발전과 "언스케일"이 척척 톱니를 맞춰 가는 조짐이 보이는 거죠.
한국도 그런 추세에 접어든 지 오래되었지만 금융기관이라는 게 중하층 소득 수준을 향해서는 획일화한 금융 상품을 팔고 이를 위해 점포 수 증가 등 뻔한 전략을 취합니다. 반면 고소득층 상대로는 이른바 PB로 접근하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비효율과 "규모의 증대"를 초래합니다. 그러나 소비자 금융의 혁신은 이를 지양하여, 일종의 뱅킹 클라우드 같은 개발하여 소비자와의 직접 관계를 포기하는 쪽으로 발전한다고 합니다(p191). 과거 규모화 시대에는 은행이 획일적으로 정한 상품 라인업에 고객이 애써 모색, 적응하는 편이었다면, 빅 데이터 관리, 해석 기술의 발전과 인공 지능의 도입은 고객의 니즈에 은행이 세밀히 맞춰 가는 식으로 진화하리라는 게 저자의 전망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반드시 거대 자본을 갖춘 금융 기관을 필요도 없고, 부도의 위험이 적절히 회피되면서도 P2P처럼 맞춤형 대출, 창입이 일상화할 것입니다.
데이터를 잘 모으고 해석하는 기업은 구태여 많은 돈을 들여 획일화한 상품을 개발한다거나, 엄청난 재고 비용을 들여 가며 한방을 노릴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에는 그저 규모만 키워 큰 시장에서 홈런을 치고 경쟁자들을 일거에 제거할 생각만 품었다면, 지금은 데이터만 잘 핸들링해도 수없이 많은 "1인 시장"을 내 품에 안아 예전보다 더 큰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의식 구조,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효율화이고 최적화입니다. 현재 지적되는 모든 기술상의 발전 트렌드를 놓고 공교롭게도 "언스케일, 탈규모화"란 키워드 하나로 이처럼 꿸 수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결국 알고 보니 한 방향으로흘러가는 뚜렷한 흐름이었다는 거죠. 군살은 빼고 영리하게, 기민하게, 맞춤형으로 움직이는 게 개인과 기업 모두에게 살아남을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