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공부하는 가상현실 개념사전 - VR도 모르면서 포켓몬을 잡는다고?
정동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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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깁슨은 "미래는 벌써 우리 곁에 와 있으나 다만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라는 명언으로, 기술 혁신의 일상성과 그에 따른 세계관의 절박한 변화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1990년에 제작, 개봉되어 큰 인기를 모은 오락영화 <토털 리콜>은 미래상의 가장 두드러진 요소 중 하나를 "사실이 아니면서 사실처럼 느끼게 하는 오락"으로 꼽아 극의 중추 소재로 활용했습니다. 이때 일반에 처음으로 그 가능성이 널리 인식된 이른바 "가상 현실"은, 이의 보편적 상업적 활용을 위한 여러 지엽적 기술이 간헐적으로, 혹은 제법 화제를 모아가며 개발되었지만, 이상하게도 근 이십 년이 지나도록 저 고전 SF에서 제시한 비전에 영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에도 그런 진단이 자주 나오지만, 심지어 한때 "가상 현실"은 잊혀진 영역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역시 이 책 중에서 시원하게 지적하듯) 페이스북이 뜻밖에도 오너의 강력한 의지에 바탕하여 이 분야 선도적 사업자로 나섬에 따라 다시 부각되는 요즘입니다.

가상현실은 물론 산업적, 혹은 국가 정책적으로 무궁무진한 응용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 많은 기업들이나 우리 같은 일반 소비자들이 관심을 두기로는 엔터테인먼트, 여가 선용, 오락 방면에서의 역할 쪽입니다. 사람은 못 먹어 본 것, 못 구경한 것, 못 느껴 본 것을 감각적으로 접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면서부터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종족입니다. 체험을 직접 해 보고 싶지만 여러 사정,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거나, 다른 절실한 과제나 업무 때문에 감행하기 꺼려진다거나(이 역시 기회비용의 문제입니다만) 할 때는 계획을 접는 게 보통이죠. 가상현실은 한마디로 말해, 비용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거의 진짜나 마찬가지인 체험"을 겪게 돕는 도구, 환경, 시스템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비용과 가격입니다. 가짜를 즐기는 데 진짜 체험이나 별 차이도 안 나는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면 아무도 그 상품을 사려 들지 않을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 혹 판매자 입장에서 가격을 타협할(낮출) 수 없다면, 그 서비스는 구매자에게 "진짜를 차라리 능가하는" 멋진 쾌감을 선사할 수라도 있을 만큼 효과가 좋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면에서 생산자들은 고객의 니즈를 충족 못 시켰기에, 여태 업황이 지지부진했던 거죠. "가상 현실"이 인터넷의 보편적 이용이라든가, 모바일 소통보다 더 가능성이 일찍 주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 이 정도에 머문 건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왜 다시 가상현실인가? 저커버그 같은 이들도 마냥 개인적 선호를 동기 삼아 모험성 투자를 결단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우리 동양인들보다는 서양인들이 특히, 머리로는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감각, 특히 시각적 속임수에 자발적으로 넘어가며 "속는 쾌감"을 즐기는 습성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세계화가 진전되고 보편적 대중 문화의 향유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일상의 기쁨이 된 지금, 놀이동산 방문이나 기존의 3인칭(이 말의 뜻은 책을 읽어 보면 명확히 다가옵니다) 게임 몰입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분명한 욕구가, 여러 채널을 통해 소비자들을 길들이고 나의 원 체질이나 기호인 양 침투를 압박해 옵니다. "이거 안 해 봤으면 말을 말지 그래?" 게임과 담을 쌓고 사는 이들에게조차 뉴스를 통해 "포켓몬 고"가 뭔지는 싫어도 개념 파악이 절로 되는 현실입니다.

virtual이란 말은 참 묘한 어감을 가집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사실상의" 같은 뜻이 맨 먼저 제시됩니다. 그럼 이건 사실이라는 걸까요, 그 반대라는 걸까요? 우리말 번역 "가상(현실)"을 보면, 아예 가짜라고 단정하는 명명입니다. 빤히 가짜인 줄 알지만 진짜 같고, 진짜보다 더 실감나며 (이게 중요한데) 신나는 효과, 이게 바로 virtual의 본질입니다. p20에는 폴 밀그람 예일대 교수의 규정을 빌려, 현실- 증강현실 - 증강가상(이는 아직 우리, 그리고 산업계, 학계에 낯선 phase입니다)- 가상 처럼, 네 단계가 전 구간을 채우는 개념스펙트럼을 제시합니다. 이 네 단계를 모두 합쳐 "혼합현실"이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띠의 양 끝에 위치한 두 단계도 100% 순도는 아닌 셈이죠. 이 스펙트럼이 우리에게 요긴히 가르쳐 주는 한 가지 포인트는,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이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대해 기술적(descriptive) 설명이 아닌, 어렴풋하나마 전체 구조의 그림이 그려진다는 겁니다. 기술적 설명은 바로 그다음 페이지에 도식화하여 자세히 나오는데, 이 역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핵심만 잠시 발췌하자면, 증강현실은 1) 유저의 시야를 완전히는 가리지 않고(=상당 부분을 그대로 드러내고), 2) 이동하면서 사용하는 게 보통이고 3) (생산기업 입장에서)위치 처리, 데이터 처리, 카메라 인식 같은 기술 개발에 주력한다는 점입니다. 가상현실은 정확히 그 반대이며, 3) 관련해서는 인체의 시각, 청각 등 기초 연구에 보다 집중하는 게 큰 차이입니다. 제 생각에는 개발자들이 주안을 두는 방향인 3)이, 이 책을 읽어나간다거나 혹은 벤처 투자에 관심 있는 분들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할 사항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의 감각이란 그 조작의 주체가 철석같이 믿는, 생존과 존재의 바탕이 될 기제이자 생리 작용이지만, 그 현실은 불완전함과 착오 투성이인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상현실이든 증강현실이든 이 인지 메커니즘의 틈을 파고들어 "(객관과 무관한) 주관의 쾌감을 극대화"하자는 상품이자 서비스의 승리를 목적으로 삼는 사업영역이므로, 어떻게든 나약한 인간을 최대한 즐겁게 속여 줄 방법을 찾아내는 게 최종 목표입니다. 책에 여러 언급이 나오지만, 이른바 지연속도(그 이하로 화면을 연결하면 단절을 연속으로 착각) 같은 이치의 발견은 벌써 지지난 세기부터 연구를 통해 주목되곤 했습니다. 특히 가상의 세계 하나를 머리속에 자발적으로 생성해 내는 게 VR의 과제이므로, 120도 이상의 시야각을 확보한다거나, 초당 90장 이상의 화면을 처리할 능력을 기기가 보유하게 만드는 게 "시각 기만" 방면에서 업계의 화두였습니다. 나머지 몰입감은 청각 기만이 처리하는데, 이 분야에서도 소위 3D 오디오의 개발 등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체험의 형성은 이제 상용화의 이름값에도 거의 부끄럽지 않은 수준에 다다른 듯 보입니다. 책 뒤 각론에도 나오지만, 화면 중 유저의 시각이 머무르는 그 부분만 해상도를 높인다거나 하는(시선이 머무르는 부분의 해상도로 전체의 선명도를 판단하는 인간 시각의 한계) 선택과 집중의 간단한 아이디어로 큰 호평을 얻은 한국 기업의 예도 나오는데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개별 단말기의 성능이 아직 아주 만족스런 정도가 아닌 만큼, 정해진(시장 가격을 맞출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최대 효용을 낼 수 있는 창의력이 요구되는 형편입니다. 아직은요. (아니라면 벌써 우리는 VR 기기의 즐거운 홍수 속에 파묻혔을 겁니다)

장기간 육상 대중 교통 수단에 탑승하거나 항해 중엔 왜 멀미가 날까요? 실제 동작과 뇌가 인지하는 내용이 불일치하는 데 그 원인이 있음은 우리가 다 알죠. VR도 마찬가지라서 소위 VR멀미(적절한 번역 같고요. 우원어는 simulation-sickness라고 이 책에 나옵니다. sea-sick[배멀미] 같은 기존 어휘를 잘 비튼 신조어죠) 문제가 오랜 동안 해결이 안 된 게 이 분야의 발전을 가로막은 큰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이 외에도 포컬큐의 혼란(실제 거리와 뇌의 인식 사이의 격차 설정 교란) 때문에 눈의 피로가 가중되는 게 여전한 난제 중 하나라고 하는군요.

전세계에서 3D 영화 <아바타>가 가장 큰 호응을 부른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었는데요. 이때 사실 3D TV도 일부 얼리 어댑터에 의해 호응을 얻고 붐이 일기도 했던 걸 저도 기억합니다. 책에서는 안경 착용의 불편함 등 여러 이유로 이 기막힌 호기를 업계가 살리지 못하고 결국 무위로 돌린 아쉬움을 지적합니다.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같은 게 몇 년 전에 업계 개발자뿐 아니라 유저 섹터에서도 논쟁의 불이 붙는 등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만 또 지금은 지지부진하고, 폴더블 스마트폰 등에 자리를 내 준 형편이죠. 이런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 혁신적 기술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시장에서 현실적 수요를 창출할 수 있게 얼마나 단가를 낮추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는 가상현실뿐 아니라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등 모든 분야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번역 서비스(일단 질적 측면은 차치하고)를 패킷당 비상식적 요금을 내야만 이용할 수 있다면 과연 누가 쓰려 들겠습니까. 부자들은 그냥 책임도 쉽게 따질 수 있고 융통성도 높은 사람을 쓰면 그만입니다. 책 후반부에서는 패기 있는 한국 기업들의 여러 사례를 소개하는데, 읽으면서 이런 현실, 즉 보유한 첨단 기술의 즉각 상용화가 어려운 한계에 대해 절감할 수 있더군요. 카카오는 어느새 법제상으로나 현실의 영향력에서나 "대기업군"에 속하게 되어, 이런 젊은 도전자들의 요긴한 기술을 사들여 벤처 생태계의 바람직한 양상을 구축해 가는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이뿐 아니라 재벌기업 롯데도 자신의 테마파크가 제공하는 오락의 방향성을 다변화하는 데 이 VR 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데서 엔터테인먼트 미래상의 분명한 비전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VR은 꼭 오락에만 쓸모가 궁리되지도 않습니다. 현재 한국 TV 정보 방송에도 자주 등장하는 내시경 치료술 홍보 영상을 보면, 어느 정도는 VR의 핵심인 그래픽을 최대한 채용한 것들입니다. 책에는 미국 어느 대학에서 VR을 활용한 수술, 동시에 이를 이용한 의대생 교육 현황에 대해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합니다. 다소 궁색한(?) 응용 같기도 하지만 고소공포증 환자 등을 치료할 때 이 가상의 "환경 구축"은 무엇보다 치료진에 큰 도움을 주는 기술이겠죠. 진통제의 오남용은 결국 환자에게 다른 질환을 초래하기도 하는데, "감각에의 기만"은 이 진통제 처방을 줄이는 데도 크게 도움을 준다는 대목이 특히 공감되었습니다.

VR은 사실 우리 일상에서 이미 바싹 다가온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스크린 골프 연습장"이 VR의 가장 생생한 응용이 아니고 뭘까 싶은데요. 이 외에도 저자는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사업화하려다 뜻이 꺾인 섹터가 바로 "플스방" 같은 예라고 지적합니다. 이는 저작권자인 소니가 강력한 제동을 걸었기 때문인데, 권리자로서 당연한 권리 행사이긴 하나 보편적 소비를 위해 어찌 보면 알아서 채널 하나가 구축된 셈인데 업자 모두가 상생하는 쪽으로 판로 생성, 정규화가 법제를 통해 이뤄지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운 점입니다. 뛰어난 기술이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현실에의 안착으로 해피 엔딩이 이뤄지기까지 이처럼 까다로운 고비가 많다는 점 다시 확인되었구요. 책에 소개된 구체적 정보 덕분에 당장 간편히 사용,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에 대해서도 더 구체적으로 아는 기쁨이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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