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트럼프 성공을 품다 - 아웃사이더에서 세계의 리더로
도널드 트럼프 지음, 권기대 옮김 / 베가북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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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의사라는 게 많은 경우, 그저 드러난 분명한 문언(워딩)만으로 전달되지 않고, 오히려 표정 등 비언어적 매체라든가, 말 속에 숨겨진 다른 뉘앙스로 더 심각한 메시지를 상대에게 알리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건 우리 동아시아인들의 장기이며, 일본이든 중국이든 우리 나라든 "은근한 중에 본심을 알리는 기술, 그를 잘 받아들이는 기술"이 빼어나야 그게 커뮤니케이션의 대가라며, 소통과 관계의 달인이라며 때로는 대인의 풍모로 칭송받습니다. 야마오카 쇼하치의 <대망>에 보면 이 점이 특히 잘 드러나죠.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2년여 동안, 각종 기행과 터무니없는 언사로써 전세계인들을 놓고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는 그저 언더독이라든가 미미한 후보 정도가 아니라, 공당(公黨)의 경선에 참여할 자격도 없는 미친 광대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죠(그는 자신만의 일인 정당을 만들어 이미 대선에 참여했던 적이 있습니다). 다만 그가 공화당 후보로 확정되어 가는 대략 7월경부터, 전현직 유력 인사들이 그의 진영에 합류하는 모습이 뭔가 심상치 않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는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CIA 국장으로 재직한 제임스 울시도 끼어 있었지요(참고로 이 사람은 국장 시절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한 모습이 당시 한겨레신문 기자에게 사진 찍혀 세계적인 특종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사건이었죠). 거물들이 그를 돕는다는 건 첫째 일단 그의 승산이 의외로 높다는 점, 둘째 미친 광대처럼 보이는 그의 언행 이면에 뭔가 영리하고 일관된 전략이 숨어 있다는 점, 셋째 거물들의 자신의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여 유리한 제휴 관계를 맺게 하는 데 그가 탁월한 능력이 있기는 하다는 점, 이 세 가지를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강하게 시사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의사를 밝히기 전에 쓰여졌습니다(한국어로 번역된 것 중에는 당선 이후 기준으로는 처음 출판 허락을 맡은 책이죠. 그는 이미 성공한 청년 사업가 자격으로 1980년대 후반에도 자신의 저서 한국어판을 발간한 적 있습니다). 그리 학식이 깊지 못해서인지, 불필요한 미사여구나 번거로운 수식 없이 필요한 말만 간단하게 전달하는 특유의 어법과 스타일이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모든 서술에서 그런 (이 사람 나름의) 장점이 관철되는 건 아니라서, 어떤 대목은 너무 간명하게만 서술된 탓에 몇 번을 읽고 나서야 의미가 정확히 파악되기도 했습니다. 하긴 정확하고 명료한 문장을 구사하는 건 아랫사람들의 의무이자 덕목이지, 사장님이 번거롭게 차려내야 할 사항은 아니죠. 독자는 물론 그의 서비스(저술한 책 읽어주기)를 돈 주고 구매하는 "고객"의 입장이지만, 트럼프야 "까짓것 못 읽겠으면 그냥 관둬"라며 오히려 갑질을 할 만한 위치이니.

이 책을 읽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원서나 이 번역서의 편집 태도처럼, 저자(혹은 편집자)가 크고 굵은 글씨로 강조해 둔 결론에만 초점을 두어, 자계서처럼 읽어내는 것입니다. 둘째,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트럼프가 그런 결론을 도출한 "자신의 진짜 사업 경험담 회고"를 꼼꼼히 읽고, 어떻게 해서 세계의 경제 수도 한복판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이름 없는 땅을 관광이나 리조트 명소 등으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는지 꼼꼼히 분석해 가면서 읽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늘어놓는 말은 거의 80% 정도를 걸러들어야 현명한 태도이겠습니다만, 트럼프는 못된 소리를 지껄일망정 사업 관련 거짓말은 하지 않는 스타일 같습니다. 그가 새빨간 거짓말쟁이였다면 신뢰를 잃어 사업계에서 벌써 매장당했을 것입니다. 광대짓을 한 건 리얼리티 쇼 출연이나 정계에 데뷔한 후의 일이죠. 무엇보다, 그가 사업 관련 정직한 성공을 거둔 건 그의 이름이 새겨진 미국과 세계 각지의 명소, 랜드마크 건축물 등의 빛나는 성공에서 증명이 됩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그렇게 많은 성공을 그저 요행수나 투기꾼의 촉만으로 이뤄낼 수는 없죠.

트럼프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돈으로 투기꾼 짓을 해서 성공한 케이스가 아닙니다. 목 좋은 곳, 노른자위 땅을 알아보는 감각이 탁월하되, 일단 목표로 삼은 땅이나 낡은 건물이 있으면 이를 두고 최대한의 경제적 가치를 뽑아내는 방법(재건축 혹은 리모델링 방법, 혹은 용도 자체의 근본적 변화)를 상상하고(이 단계에서부터 비상한 크리에이티브가 요구되죠), 그 구상을 현실로 옮기는 실천과 집행의 대가, 마스터더군요. 말은 쉬워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당면의 현실, 현상에만 집착하지 그 이면에 숨은 가능성을 보지 못합니다. 망해가는 건물이나 부지를 보고 "여긴 뉴욕의 새로운 도심으로 확 뜨겠는걸?" 같은 확신을 갖고, 부지마다에 가장 어울리는 역할을 (시대의 트렌드에 따라) 정해 주는 능력과 센스("여긴 레스토랑, 여기는 호텔, 여기는 쇼핑몰이 가장 잘 어울리겠군")는 아무나 갖는 자질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도 신격호 롯데 창업주가 이런 스타일이지만, 그런 그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정도까지는 아니었죠. 신격호 씨는 전후 폐허가 된 일본, 한국에서 일어선 사업가지만, 트럼프는 이미 판이 다 짜여진, 난다긴다 하는 사업의 고수들이 대거 포진한 뉴욕 한복판에서 창업을 해 내 일인자로 올라섰다는 게 중요합니다.

설령 부동산 감식, 구상, 설계 감각이 탁월하다 해도, 그 다음이 진짜 문제입니다. 뉴욕 같은 곳에 부동산의 소유권, 혹은 용익 물권. 담보권 같은 게 어디 보통 치밀하게 짜여져 있겠습니까? 소유권은 (현재 소재도 파악 안 되는) 누군가가 갖고 있고, 애써 그 사람과 타협을 이뤄 놓으면 이번에는 그의 채권자나 동업자를 찾아 다른 이해관계를 해소하고 금전으로 마무리지어야 땅이 내 것이 됩니다. 사람들을 찾아내어 일일이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보통 사람 같으면 땅 한 필지에 무슨 이렇게나 복잡한 재산권들이 얽혀 있는지 아예 이해가 안 됩니다. 사람을 설득하는 것도 예사 기술이 아닐 뿐 아니라, 그렇게 설득하려면 법률 관계와 경제적 전망 등에 대해 정확한 파악과 사업 구상이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 노른자에 재산권을 보유한 이가 어디 바보라서 아무 말에나 넘어가겠습니까?

이렇게 어렵사리 내 땅으로 확보한 후라 해도, 이번에는 관청을 찾아가 어떤 규제가 내려져 있는지, 이를 완화하거나 최대한 유리하게 적용할 방법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건축 행정 법규에 달통한 수준이라야 하겠죠. 모든 여건이 마련되어 내 구상대로 일을 벌일 수 있다 해도, 가능하면 최소로(부실 아닌 범위에서. 트럼프는 싸구려로 원가를 후려치는 방식을 엄청 싫어하더군요. 이 책을 읽어 보면. 하긴 그런 편법으로만 일관하면 적당히 돈을 벌 수는 있어도 이 정도로는 성공하기 힘들죠) 비용을 들이고, 최대한 미관을 아름답게(트럼프가 아주 집착하는 면 중 하나입니다) 만들려면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걸 또 고민해야 합니다. 이걸 뜻대로 해내려면, 골조 시설, 자재의 특성, 토목 방식 등 건축 전반에 걸쳐 전문가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류 건축가(트럼프는 일류 아니면 고용을 안 하더군요)가 안을 들고 와도 이게 자기 구상에 맞는지 더 개선을 요구하든지 판단할 수가 있죠. 대충 일을 해서 그만큼 어디 돈을 벌 수 있었겠습니까. 집요하고 매사에 끝장을 보는 성품이 오늘날의 그를 만든 비결입니다.

트럼프는 리얼리티 쇼 출연 제의를 받고 엄청 망설였다고 합니다. 이 점도 우리가 선입견으로 가진 바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라 흥미롭더군요. 이런 멍청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왔다가 내 위신과 명성에 먹칠만 하는 건 아닌가? 이럴 때 그가 믿는 건 (일단 한 번의 의심과 회의를 거쳤다가) 정직하게 떠오르는 그의 감각이라고 합니다. "그거 괜찮을 것 같은데?"라고 열정, 의욕이 확 솟구치면 그때부터는 좌고우면 하지 않고 밀어붙인다는군요. 이런 건 사람이 타고난 자질이라서 누가 따라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남겨진 그의 명언 중 하나는, "열정과 의욕이 생기는 일은 누가 아무도 격려 해 주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추진할 수 있다."였습니다.

트럼프는 이 책에서, 그가 만나고 겪어 온 많은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실명까지 거론해 가며 회고합니다. 어떤 이는 교섭 상대자로서 깐깐하게 굴었지만, 일단 약속한 바는 반드시 지키는 인격자라면서, 이런 사람이 협상 과정에서는 힘들게 해도 결국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게 하는 조력자나 마찬가지라는 취지(트럼프는 좋다 싫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등 직설적인 표현만 하는 사람이라, 제가 이 서평에 쓰는 어휘처럼 추상적인 말은 책에 없습니다)로, "휼륭한 인격자"라 평하며, 자주는 아니라도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런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며 의외의 극찬을 합니다.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며, 리스펙트를 보내야 할 대목에서 정확하게 멈추며 겸손해할 줄도 아는 게 그의 장점이라 하겠습니다. 이게 가식이 아니라 그 나름으론 다 진심이라는 게 특이합니다. 반면, 제때 대출을 안 해 주며 앞에서 하는 말과 뒤의 행동이 다른 어느 은행장(여성이며, 이분도 꽤 유명한 인물입니다)에 대해선, "내가 아는 가장 무능하고 어리석은 뱅커"라며 가차없는 독설을 퍼붓습니다.

자계서를 읽으면서도 그 속에 담긴 팩트를 어렵사리 추출, 본격 경영서나 실무서처럼 읽을 수도 있고, 반대로 경영학 교과서를 읽으면서도 "인생의 지혜가 이 중에 담겨 있음"을 깨달으며 (고차원의) 자계서 독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트럼프는 세련되고 학식 높은 대화를 할 줄 모르는 인간이지만, 그의 말은 일단 허투루 들을 것이 없고, 좋든 싫든 반드시 말 중에 뼈를 심거나 유익한 제안을 담거나 하는 식입니다. 동양인들이 예로부터 즐겨하던 고맥락 소통(전혀 아닌 것 같은데)에 능한 유형이며, 이 사람의 개성을 잘 알아야 한국의 앞길도 순탄할 뿐 아니라, 일단 사업가로서 그가 눈부신 성공을 거둔 과정은 누구 눈에도 흥미롭고 유익하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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