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톨로지 (스페셜 에디션, 양장) - 창조는 편집이다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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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부끄럽지만 김정운 교수님의 저서 <에디톨로지>가 이미 2014년에 초판이 나온 책인 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받아보니 그 책의 개정판이더군요. 제목만 잊은 게 아니라, 김 교수님 특유의 생기 있고 발랄한 필치로 세계 문명사, 최근의 산업 발달사의 주요 국면을 힘 있게 요약하며 통찰을 제시하던 그 구체적인 내용도 많이 잊은 상태라는 걸 책을 읽어 가며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내용을 잊었다면 다시 새로워진 기분으로 그의 제언에 귀를 기울이며 독자로서 생각할 거리를 다시 챙겨 가면 그만입니다. 이런 걸 두고도 (저자의 말씀처럼) "행위가능성(Handlungsmöglichkeit)"이 하나 더 생긴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습니다.

"쓸모보다는 디자인이다." 아이리버 역시 우수한 성능과 (저도 써 봤기에 알지만) 이런 것까지도 다 배려하나 싶은 부가 기능 때문에 유저들에게 큰 만족을 준 기기였습니다. 그러나 모 회사의 모 기기에 의해 시장에서 후순위로 밀려나는 신세가 되었지요. 저자는 당시(초판 기준으로도 여전히 회고적 시점입니다) 소비자들의 반응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OOOO가 예뻐도 너무 예뻤다." 사실 큰 히트를 기록하지는 못했지만(운영 체계의 한계) 1998년의 아이맥 역시 "예뻐도 너무 예쁜" 디자인을 자랑하던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 과연 예쁜 디자인"만"으로 OOO이 시장을 제패했을까요? 저자는 바로 이어, 감압식과 정전식이라는 인터페이스상의 차이를 거론합니다. 무엇인가를 사정 없이 두드리는 것과, 그저 "만져 주는 것" 사이에는 상당히 큰 차이가 가로놓여 있다는 겁니다. 어느 누구나 (좋아하는) 무엇인가를 만져 보고 싶어하며, 또 누구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로부터 "만져짐"을 당하고(좋은 의미에서의) 싶어한다는 겁니다. 이런 유저의 원초적 감수성에 어필한 전략이, 유례 없을 만큼 시장을 완전 장악한 애플 사의 필살기였다는 게 저자의 분석입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애플 사의 성공 비결"만을 용비어천가처럼 늘어놓는 일부 자계서의 태도에 거부감(정도가 아니라 엄연히 팩트상의 오류)을 느껴 왔습니다만, 이 책(의 이 대목)은 그런 류의 책들과 달리 "한때 MS에 밀려 고전하기도 했던 애플의 과거"까지 균형감 있게 다루어서 더 신뢰가 가더군요.

올해 FIFA 월드컵에서는 비디오 판독(이른바 VAR)도 도입되고, 중계 시스템도 현저한 발전을 보여 시청자들이 큰 만족을 얻었습니다. 이미 2014년 시점에서, 저자는 "한국 축구가 중흥하려면 먼저 중계를 신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사실 축구는 아무 생각 없는 이들이 (그 나름으로) 즐길 수도 있지만, 제대로 그 맛을 알려면 생각을 많이 하고 큰 그림을 볼 줄 알아야 완전한 몰입이 가능한 스포츠입니다(게다가 동체 시력도 좋아야..). 저자는 "축구는 마치 바둑처럼, 공간 편집을 잘하는 쪽이 이기는 스포츠"라고 단언합니다.

이 대목에서 크게 공감하게 되었는데(기억도 나고요), 요즘은 인터넷 게시판에도 고수들이 여론을 주도하는 편이라서 예전처럼 맹목적인 국뽕, 반대로 근거 없는 국까 모드의 매우 일차원적인 반응은 보기 힘든 경향입니다. 축구를 재미있게 시청자들에게 보여 주려면, 일반인들이 보기 힘든 빈 구석, 혹은 (게임이 이렇게도 전개될 수 있었다 같은) 대체 현실(평행 우주?)를, 완전히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연상, 상상이 가능하게 돕는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야구처럼 상당 시간이 정적으로 진행되는 스포츠에서는 해설(컬러 코멘트)를 통해 빈약하나마 말로 이게 가능한데(물론 엉터리 해설자도 과거에 있었지만), 축구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결정적 순간들이 지나가기 일쑤이니 말입니다.

책에 나온 지적들이 거의 다 맞는 말씀이나, 사실 중계 시스템의 기술은 저 서유럽이나 우리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게 있다면 선수들의 기량이고, 그 선수들이 속해 있는 클럽(구단)에 대해 일반 팬들이 바치는 충성도입니다. 물론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분들은 지금도 그들 혼자서 팀(그리고 나아가 K리그 전체)을 지킨다고 할 만큼 열성적입니다. 그러나 저변 확산이 (프로야구 등 타 종목에 비해) 미흡합니다. 이 역시 "에디톨로지"의 관점에서 어떤 혁신을 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의미한 공간을 의미 있게 만드는 편집 전략". 사실 이 구절이야말로 책 전체를 요약하는 키워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합지졸"이란 말이 있듯, 수만 많다고 그에 해당하는 위력이 마치 물리법칙 F=ma에 수반하여 생기는 게 결코 아닙니다. 잘 정돈되고 조직화한 자원, 역량이라야 본래의 힘을 발휘하며, 책에서 잠시 소개하는 일본 전국시대 일화처럼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혁신적인 성과도 가능하기 마련입니다. 일본에서는 "잡단행동"이란 말이 우리와 달리(저자의 지적처럼, 우리는 확실히 저 단어에서 무슨 갈데까지 간 집단이 막무가내로 저항이나 하는 험악한 경우에나 저 말을 쓰곤 합니다), 파편으로 흩어졌을 시 별 힘을 못 쓸 자원이 고도의 효율을 발휘하게 돕는 비결, 비책처럼 통용되곤 합니다. 저자는 "한 번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면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군대 가서 고된 훈련을 한 경험을 (아들이 군대 갈 무렵에서야 서서히) 잊기 시작하는 것처럼" 머리가 아닌 몸에 배워 둔 요령, 지식은 결코 그 사람을 떠나지 않는다고도 말합니다.

"사회적 경력, 학력을 제외하고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과연 그래서인지 요즘 나오는 책들을 보면 학력 소개가 빠진 경우가 많습니다. 따로 찾아보면 의외로 명문대인 경우도 부지기수이지요. 저자의 뜻은, 경력도 좋고 학력도 우수하지만 구태여 그런 말을 간판에 걸지 않고도 "나는 어떤 사람이오"라고 내세울 수 있는 이가 인생을 제대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텍스트는 고립된 채로 아무 뜻이 없고, 오로지 콘텍스트 속에서나 바른 의미를 찾습니다. 조작, 날조가 아니라, 진실되고도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콘텍스트, 사연, 스토리를 누구 앞에서나 자랑할 수 있는 에디톨로지의 대가야말로, 이 혼란스럽고 갈팡질팡인 세상에서 타 성원에게 어떤 지표, 지향점을 제공할 수 있는 등불 같은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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