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마지막 날들
그레이엄 무어 지음, 강주헌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현재 경제 전반에 몰아치는 메가트렌드를 일러 "4차 산업혁명"이라고들 합니다. 그럼 앞서 1~3차의 파고도 이미 지나갔다는 뜻인데, 그 중 "2차"의 거대 물결을 특징짓는 요소는 바로 "전기의 발명(과 철도의 건설)"입니다. 예전 분들은 어린 시절 발명가나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며 이 분야의 많은 위인전기를 (강제로) 읽은 기억이 있을 만한데, 강제건 자발이건 위대한 사람의 생을 반추, 공부하는 체험 자체는 나쁠 게 하나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렸을 적 오리의 알을 품어 부화시키려 든" 토마스 앨버 에디슨이야말로 아동용 전기의 쳄피언격 소재였습니다. 하도 많이 읽어서 "앨버"라는 다소 드문 그 미들네임까지 덩달아 유명해질 정도입니다.

헌데 이 토머스 에디슨, 즉 불요불굴의 발명의지를 갖고 인류의 일상에 장애가 되어 온 모든 불편을 걷어내려, 수천 수만 번의 실험과 실패와 시행착오를 마다하지 않았던 거인 역시, 그 인격에 어두운 면까지 함께 갖춘 영혼이었습니다. 위인전에는 그의 가정이 그저 평범한 농가 정도로 묘사되었으나 사실 먼 내력을 파고들어가면 꽤 이른 시기에 식민 아메리카에 터잡은 명문가 출신인 그는, 천재가 흔히 그렇듯 아랫사람의 실수에 너그럽지 못하고 경쟁 상대를 파멸시키려 집요히 시도하는 등 타의 모범이 되기에 결격인 점도 많았습니다. 이 소설은 그런 토머스 에디슨의 생을 소재로, 예나 지금이나 섬뜩할 만큼 승부욕을 불태우는 의지, 살인적인 두뇌 싸움이 펼쳐지는 장(場)인 법정을 무대로, 한 초보 변호사가 가망 없어 보이는 의뢰인을 돕는 사연을 담았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한 영화 <프레스티지>를 보면, 두 직업 마술사가 자존심과 명예를 걸고(돈은 두 사람 모두에게 결국 의미가 없어집니다) 벌이는 일생의 대결, 혹은 그레이트 게임이 묘사됩니다. 말 그대로 그레이트 게임이라 이 미친 대결 과정에서 한 사람은 다리 한쪽을 못 쓰는 불구가 되고 한 사람은 감옥에 갇혀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죠. 그런데 이 무익한, 아무 소용 없을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한 사람은 지상 최고의 전기 공학자(를 넘어 거의 마법사에 가까운 아우라)인 니콜라 테슬라를 찾아갑니다.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 "순간 이동 기계"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청부)인데, 직업 오락인 마술이 "과학, 기술"을 넘어 아예 "마법"의 영역으로 접어드는 순간이라고 해야겠죠. 여튼 이 니콜라 테슬라 역은 2년 전에 타계한 글램락의 창시자인 가수 데이빗 보위가 맡았는데, 연기가 과연 좋았는지는 의문이나 여튼 뭔가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만큼은 잘 자아내었더랬습니다.

니콜라 테슬라는 발칸 반도에서 이주해 온 당대 이민자 출신이고, 마치 저 먼 러시아(같은 슬라브 족)의 드미트리 멘델레예프처럼이나 괴이할 만큼의 천재성을 지닌 기인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2차) 산업혁명 파고 한복판에서 산업계에 몸 담으며 그처럼이나 많은 업적을 내고, 실력이 아닌 "정치"에서 밀려 은둔자 신세가 되었기에 그의 삶을 둘러싸고 온갖 설왕설래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죽고 나서 그의 연구 업적이나 원고를 미국 정부에서 나와 다 쓸어갔다는둥, 그의 이론대로 시도해 보다 정말 (자기장의 이상 작용으로) 순간이동이 일어나 수병(水兵)들의 신체가 철제 기둥에 떡처럼 들러붙었다는 둥 온갖 확인 안 된 루머가 다 나돌았습니다. 대개 천재는 남들이 A, B, C 를 하나하나 밟아나갈 때 혼자서 Z, 아니 아득한 외계의 표징으로 도약하는 정신이므로, 그가 정말 근거가 있어서 내뱉은 예언인지 아니면 그 광활한 정신 세계에 떠돌던 수많은 영감 중 하나인지는 앞으로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과연 판명이 날 수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미국 대중문학 장르가 가장 멋지게 발전시킨 장르가 바로 법정물입니다. 한국은 그저 판사 개인의 편견이나 정치적 동기, 여론몰이에 의해 결과가 좌우되는 수가 많지만, 미국 법정은 심지어 18세기 것을 읽어봐도 바늘 하나 꽂을 틈 없는 치밀한 논리의 대결이 펼쳐지며, 판사의 판결 역시 솔로몬의 재림 같은 현명한 진리의 재확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재판은 어쩌면 미국인들에게 있어 일상의 스포츠와도 같이 친숙하며, 개인 간의 분쟁이 이처럼 치밀하고도 합당한 절차를 통해 해결되는 나라이기에 오늘날과 같은 선진 시스템을 마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나라, 이런 풍조에서라면 허황된 보물선 사기나 바라보며 저질 범죄에 가담하는 자폐증 환자 따위가 설 땅이 없는 게 당연합니다.

다들 아는 것처럼 미국의 국가 표준 방식을 둘러싸고 직류냐 교류냐 하는 싸움으로 한때 온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에디슨 측은 직류를 내세우며, 교류는 자칫하면 큰 사고를 부를 수 있다고 야비한 선전을 했지만 결국 진리가 이기는 법이라서 당시의 미국, 또 대부분의 문명 국가는 (니콜라 테슬라 등이 옹호했던) 교류 방식을 채택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아동용 위인전에서는 이 점(억지로 우기다 패배한 에디슨의 망신)을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혼란스럽지 않게 전달할 수 있을지 하는 고민 끝에 여러 무리수를 두기도 합니다만, 오히려 이 소설에서는 (미국 대중 문학이 가장 찬란하게 발전시킨) 법정물, 또 이 장르가 가장 애정하는 "세상 물정 모르고 정의감에만 불타는" 신참 변호사를 등장시켜, 더운 여름 청량제가 필요한 우리 독자들을 즐겁게 해 줍    니다. 그 신비한 베일을 아마도 영원히 벗지 않을 테슬라라는 소재와 함께, 우리 독자를 들었다놨다 하는 빼어난 스토리텔링으로 본전은 충분히 뽑은 멋진 읽을거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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