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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평점 :
영미권에는 "~맨"으로 끝나는 공포의 범죄 아이콘들이 많습니다. 이 중에는 실존의 범죄자들도 있고, 설화나 와전된 과거의 모티브만을 가질 뿐인 가상의 캐릭터들도 있죠. 헛된 보물의 망상에 젖어 자신과 타인의 장래를 끔찍하게 망치고 든 어느 낙오자도 언젠가는 어떤 "맨"의 칭호를 자랑스레 얻어 유취만년의 훈장을 이마에 새기고 다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운 여름에 몰입감 최고이기 마련인 이런 장르소설을 놓고 리뷰를 쓸 때는 항상 내용 누설 때문에 여러 모로 신경이 쓰입니다. 이 작은 워낙 흥미롭게 사연을 끌고 가는 터라 사실 어느 정도 줄거리를 알고 읽어도 본전은 충분히 뽑을 듯합니다만, 그래도 철저한 블라인디드 상태에서 읽어 나가는 스릴러를 능가하는 호사, 재미란 다시 비길 게 없습니다. 해서, 이 글 중에서는 최대한(최소한?) 알듯 모를 듯 지나가는 표현으로만 소개할까 합니다.
건강에도 좋지 않고 도시(demonstration) 기능도 그닥 시원찮게 발휘할 뿐인 분필, 즉 초크를 아직도 여러 교육 현장에서 쓴다는 사실은 의외입니다. 얼굴을 아예 하얗게 덮는 화장법은, 마치 핏기가 싹 가신 불건강한, 혹은 이미 죽은 얼굴을 연상시키기에 극히 일부 문화권을 제외하고는 그리 권장되지 않는 게 보통입니다. 여튼 이 "초크"에 특별한 집착을 지닌, 기분 나쁠 만큼 얼굴이 하얀 어느 남자는, 한적한 고장에서 끔찍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어떤 전조(前兆. herald) 노릇을 합니다. 전반부에서 우리 독자들은 비교적 명징한 어조로 사건의 추이를 전달 받습니다만, 이게 철없는 아이들의 그저 perception인지, 아니면 팩트 자체인지 살짝은 당혹하는 느낌으로 읽어 나가게 됩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순수하지만은 않다." 이 씁쓸한 진리는 아주 오래 전 솔직한 에세이류로 큰 인기를 끈 김동길 연대 부총장이 자신의 어느 책에서 특유의 톡 쏘는 어투로 독자들에게 역설한 적 있습니다. 당시 저는 "그래도 어른이라면 아이들을 최대한 이해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세태가 이렇다 보니 오히려 어른이야말로 아이들보다 몇 배는 더 순수해지고, 거기에 연륜이 안긴 성숙한 깨달음까지 더해서 소통에 임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긴 진짜 어른 노릇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나이 육십이 되어도 어이 없는 롤플레잉에만 몰두하며 모든 관계에 실패한 인생은 그저 감옥행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이 말은 1970년대 베스트셀러 작가로 큰 유명세를 떨친 에릭 시걸의 한 작품(새삼 제목 소개가 필요없을)의 첫문장입니다(또한, 스탠다드 팝의 황제 앤디 윌리엄스의 히트곡 가사 첫소절이기도 하죠). 한 사람의 기억과 추억으로도 "사연과 이야기"의 실체와 서두, 구조가 어떠해야 하는지 일관된 판단이 불가능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끔찍한 트라우마를 공유한 친구들(과연 친구였는지도 의문이지만)이라 해도 판단과 가치 평가에 어떤 합의가 못 이뤄졌다면(이게 중요합니다), 무엇이 그 사건의 발단이었는지 도저히 확정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며, "초크맨"이 문제가 아니라, 그 초크맨을 받아들이는 단일대오 공동전선 내부의 혼란과 갈등이 더 큰 공포를 야기할 수 있음을 소름끼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 내부에 있었던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