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할머니가 비키니를 입은 것과 같았다."

영원한 삶도 일종의 저주일 수 있다는 모티브는 이미 그리스 신화의 캐릭터인 예언자 시뷜레에서부터 등장했습니다. 노인들의 가장 흔한 거짓말이라는 "죽고 싶다."가 아니라, "제발 날 죽여 달라." 같은, 가장 섬뜩하면서도 역설적인 절규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어도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주인공의 무기력함은, 아무것도 모르기에 아무것도 실행에 옮길 수 없는, 필멸의 존재가 느끼는 허무감과는 그 근원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입니다.

여태 타임루프는 문예 못지 않게 영화에서도 많은 걸작(적어도, 화제작)들이 나왔습니다. 자신에게만 같은 시간이 반복되는 성촉절의 저주에 걸린 필 코너의 이야기를 다룬 <사랑의 블랙홀>부터, 인류의 운명까지를 떠맡고 구원해야 하는 빌 케이지의 장엄한 투쟁을 그려낸 <엣지 오브 투모로우>까지. 타임루프물이 매혹적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과거로 돌아가 잘못된 선택을 돌려놓고 싶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루저의 미련을 갖기 때문입니다.

내 실수이건 남의 잘못이건 그 간발의 판단 착오로 결과가 크게 어긋났을 때의 안타까움은 기억에서 떨쳐내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모든 관계에서 실패하고 잔돈푼이나 아끼려는 망집에 사로잡힌 노파의 경우, 모든 악몽을 타고난 나쁜 기억력, 즉 리셋과 발뺌으로 해결하는 묘수를 지니고 있기에 어쩌면 주변 사람들이 죽을 지경이지 본인 자신은 속 편하게 잘 삽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책임감을 지닌 정상적인 활동자라면, 도대체 자신의 실수 하나로 모든 결과가 어그러지고 만 그 중차대한 전환점을 쉽사리 잊기 어렵습니다. 같이 일하기에 가장 편한 사람이라면, "지나간 건 잊어요."라는 한 마디로 상대의 실수를 포용해 줄 여유가 있는 그런 품성을 지닌 이입니다.

어쩌면 그런 생각도 듭니다. 내가 저지른 실수 하나로 모든 것이 바뀐 듯 보이지만, 이 모든 걸 알고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 원포인트를 교정해도 결국 사건은 똑같은 방향으로 귀결하고 만다? 어떨까요. 이 점을 확인한 후, 우리는 깊은 위안을 얻겠습니까, 아니면 더 깊은 무기력에 빠지겠습니까? 이 역시, 철저한 고립된 개인의 레벨에 사는 인간인지, 아니면 자신의 지성과 의식이 더 깊고 더 높은 맥락에 연결된 진지한 삶을 사는 인간인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입니다. 전자라면 책임회피의 치졸한 구실이 마련되어 아마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나아가 다시 회귀한 과거에서 더 악랄한 실수를 고의로 저지르며 결국 자신에게도 별 도움이 안 될 퇴행적이고 자폐적이며 오탈적인 쾌감을 맛볼 것입니다. 후자라면 이 과제를 아마 집단지성의 몫으로 이관할지 모릅니다. "왜 모든 것을 알고도, 여전히 문제가 풀리지 않는가? 우리는 과연 어떤 종류의 이치와 섭리에 의해 끌려다니는 노예인가?"

이 작품의 빼어난 성취는 바로, 개인의 고뇌와 번민이라는 정해진 궤도를 넘어, 칼라차크라라는 비슷한 운명에 처한 다른 개체들의 집단을 알게 되면서부터 전개되는 이야기들입니다. 책을 끝까지 읽어도, 그럼 우로보란에 속한 이들은 누가 설정한 틀과 규칙에 의거하여 이런 달갑지 않은 영원에 놓였는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몇 달 전에 다시 컴백했으므로 현 총리)는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여전히 과학은 '왜'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지금 못해 주는 건 상관 없는데, 우리가 불안한 건 "끝까지 파고들어도 여전히 설명 못해 준채 clue의 연속으로만 뱅뱅 돌게 하는 것 아닌가?" 같은 근원적인 의문에 엮인 것입니다. 작가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노숙함으로 "초연"을 권하던데, 역시 책을 다 읽고 자신만의 모델 속에서 끝까지 결론을 추적해 보는 건 또 독자만의 특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