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백신
스튜어트 블룸 지음, 추선영 옮김 / 박하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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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에게 맞히는 백신이라고 하면, 아 이런 게 다 나와서 접종이 되기에 지금 우리가 문명사회에 산다는 규정이 가능하구나, 그래도 이런 안심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게, 한 10년 전부터 애 키우는 어머니들 사이에서 불신하는 분위기가 생기더군요. 그 불신이라는 게 나름 근거까지 갖춘 것이어서, 원 이거 세상이 어떻게 뭔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게 아니라, 이런 중요한 분야에서 오히려 퇴보하는 것 아닌가 싶기까지 했습니다.

저희가 자랄 때에도 시스템에다 무작정 신뢰를 보냈던 건 아니었고, 좀 까다로운 동네(출신들)가 흔히 사소한 낌새에도 많은 동요를 보이듯이, "재활용 주사기를 쓴다더라" 같은 헛소문이 돌아 방과 후 대기하던 애들이 전부 도망가는 일도 벌어지곤 했습니다. 나중에 학부모회가 소집되어 조사가 개시되었지만 잡음 없이 깔끔하게 해결도 되었고요. 지금 생각하면, 인근 보건소에서 인력이 출장오는 건데 어차피 집행, 할당된 예산을 공무원들이 아껴서 착복할 여지, 동기도 없는 거고(돈 굴러가는 과정이 너무 뻔해서 불가능), 뭐 그런 걸 떠나서 제 생각에는 오히려 그 시절이 못된 잔머리를 덜 굴리던 분위기 아니었을까 생각도 듭니다.

이 책은, 어쩌다 이지경까지 사태가 나빠졌던가 싶을 만큼의, 백신의 위험성 그 근황을 주제로 삼습니다. 배경은 물론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영리 추구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되는 곳에마저 든 못된 버릇 등에 대한 고발입니다만, 그 외에도 "우리가 애초에 신뢰를 줄 만한 자격을 갖춘 곳에 신뢰를 주고 있었던가?"에 대한 근원적인 점검, 회고가 이어집니다. 의학사의 한 중요 섹터가 걸어온 길을 되짚으며, 독자의 교양도 넓히고 현재의 이슈에 대한 각성의 계기도 삼게 돕는다고나 할까요.

신자유주의 이슈가 꼭 아니라 해도, 이 책은 일단 백신 개발의 과거사를 꽤 오래 짚고 넘어갑니다. 이성, 혹은 오성의 개안으로, 당장 기초 단계에서 인간 생존을 위협하던 질병 이슈에 대해 얼마나 더 효율적인 대처가 가능해졌는지의 회고는, 현대인들을 가장 큰 감격에 젖거나 자긍심을 갖게 해 주는 부분입니다. 자라나는 아이들한테도 현대 문명에 대한 신뢰, 긍지를 함양하는 데 이만한 좋은 소재가 없을 정도지요. 그러나 당장 드러난 문헌상의 증거만으로도, "백신"은 태생부터 썩 믿을 만한 존재는 아니었음이 입증됩니다. 정확하게는, 이 분야 선구적인 종사자들이, 공명심이나 탐욕 등 다른 동기를 개입시키는 일이 (아직 영리주의적 풍조가 속속들이 침투하지는 않았을 무렵인데도) 잦았음에 대한 재조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코흐의 경우 아마 아이들이 보던 백과사전이나 위인전기에서 단독 항목으로는 잘 안 다뤄지고, 사항 설명의 곁다리쯤에서 그 이름이 언급되는 정도였습니다. 투베르쿨린 반응은 저희 때에도 널리 쓰이던 테스트 방식이었는데, 이 물질의 개발 초기 코흐는 테스트 시약이 아니라 "백신"으로 이를 활용했다고 합니다. 효과는 당연히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부작용까지 속출했으며, 흥미로운 사실은 캐릭터 홈즈의 창조주이며 본업이 의사이기도 했던 작가 코난 도일이 그 초기 단계에서부터 "효능 없음, 게다가 부작용"에 대한 지적, 예언(?)을 하고 들었었다는 점입니다. 코흐는 이 사건을 계기로 명성이 크게 실추되었다고 책은 정리하는데요, 역시 제 어렴풋한 기억으로도 이분이 그리 썩 좋은 평가로 정리하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빈곤 이슈는 19세기에 유럽 각국에서 꽤 중요하게 다뤄졌는데, 예컨대 맬서스 같은 경제학자, 성직자가 극단적인 회의론, 염세론을 기반으로 독특한 주장을 전개한 건 알고보면 당시의 거대한 담론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더 지독한 결론을 근거도 딱히 없이 제기했던 자들도 많은데 그나마 논거 비슷한 갖춘 고지식한 논자가 후대에 들어 남이 먹어야 할 욕까지 대신 먹고 있는 셈이죠. 여튼 빈민가를 중심으로, 각종 질병에 대한 예방 조치가 강제적으로 이뤄진 데 대해 반발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과거 오히려 취약계층일수록 "나라가 하는 일은 무조건 옳겠거니 "하며 묵묵히 순응하던 현상과는 큰 대조를 이루는데(지금은 또 오히려 반대라서 근거 없는 불신 풍조는 무지한 이들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되곤 하더군요), 이는 애초에 영국, 프랑스 등이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니라 국가 형성 단계에서 계급이 엄격히 구분되던 구조였던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때 당사자들이 "양심의 자유"를 들어 강제접종을 거부했다는 사실이 좀 이상하게 다가올 겁니다. 이는 영국은 물론 대륙법상의 이론체계에서조차, 우리와 기본권 표제 체계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른 항목도 이것저것 포함시켜 해석함) 사정이 있어서입니다. 우리 같으면 행복추구권, 혹은 일반적 행동 자유권 등으로 더 세분화한 조항에서 그 권원을 마련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자동차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것처럼, 백신이, 감염성 질환으로 인한사망자 수를 대폭 줄일 수 있다는 역량을 지녔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신을 독특한 무엇인가가 아니라, 공공보건을 보호하는 기술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문제는 사뭇 달라진다." (p209)

책 앞부분에서, 지난세기 코흐 측이 개발한, 부실한 효능만을 지닌 백신이 결국 파스퇴르 측의 더 완전한 솔루션에 밀려 퇴출된 예를 들고 있었습니다. 해당 섹터의 작동원리가 크게 달라지고, 의약학 분야의 발전상도 그때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인데, 적실치 못한 예(적어도, 시기적으로 너무 오래 전 일)를 든 게 아닌가 하는 의견도 제 주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련한 저자가 이 점을 몰랐을 리 없고, 그 의도는 p210 이하에서 자세히 드러납니다.

종래의 백신이 다른 더 나은 신약에 의해 자리를 내어준다면, 과연 어떤 수월성 요건을 갖추었기에 이런 대체가 가능한가? 여기에 대해 각국의 보건 당국이, 의식을 갖춘 시민들이 기대하는 만큼이나 잘 확립된 기준을 마련하고 사무를 처리하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과거에는 공신력 있는 제약업계가 많지 않았고, 이들의 전문성이라든가, 혹은 모럴 해저드에 쉽게 빠지지 않으리라는 일정 신뢰가 있었기에 비교적 안정적인 간격을 두고 재선정이나 검토가 이뤄졌다고 합니다. 그러던 게, 근래 들어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입법부(국가이건 지자체 단위이건)에 로비가 이뤄지고, 이 과정에서 확고한 컨센서스가 이뤄졌다고 보기 힘든 자의적 기준이 종종 개입한다고 합니다. 물론, 극한의 방식으로 영리를 추구하기에 이른 신자유주의 풍토가 이 과정에서도 크나큰 해악을 발휘함은 새삼 뭘 말할 것도 없고 말이죠.

이쯤에서 책은 다시, 1차 세계 대전 직후를 재조명하며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백신 불신 풍조를 언급합니다. 1925년 독일 뤼벡에서는 BCG 접종을 받았던 이가 "1년 후에"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졌는데, 이 원인은 일부 batch가 오염된 데서 비롯했을 뿐이라고(p232)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지역뿐 아니라 독일 전역에서 BCG 자체를 거부하기에 이릅니다. 영국 역시 북구권에서 해당 약품이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고 유병률 자체가 크게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임상 시험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전히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고 합니다(앞에서 예를 든, 이전 시기 빈곤층 상대 강제 접종은 사실 이 이슈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음을 상기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이 시점까지 여전히 각종 실용 기술과 학문적 발전이란 유럽각국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균형과 상호 자극을 받았을 뿐이며, 현재처럼 특정 국가군에서 성과의 과실을 독점적으로 향유하지 않았다는 점도 확인하게 됩니다.

냉전 이후에는 소련이 국제 무대(특히 WTO라든가)에 등장하며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기도 하는데, 당시 소련은 특히 저개발국들을 상대로 "앞선 보건과학기술과 이념의 필연적 귀결인 인도주의"를 들어 소련 주도의 백신 보급과 개발에 특히 역점을 두었다고 합니다. 이게 자연스러운 민간 외교의 전개라기보다는, 정치 선전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의혹의 시선도 받았고, 정작 해당 국가의 백신 기술이 썩 높은 수준에 이르지도 못했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p255). 여기에 미국, 영국 등의 "진영 논리"가 개입하여, 흔쾌히 인정해야 할 상대측(소련)의 성과마저도 부인하고 들기 일쑤였다는 점도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죠. 이러던 갈등상은 이후 1970년대에 들어서야, 인도, 방글라데시, 아프리카 등의 천연두를 퇴치하기 위해 미소 양국이 손잡는 국면에서 점차 해소되어 갑니다. 이는 꼭 천연두 예방, 치유라는 특정 질병이나 의학 분야에 한정된 게 아니라, 당시 세계를 강타했던 "데탕트" 무드와도 연결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아마비의 경우 요즘은 관측도 잘 안 될뿐더러 일찌감치 극복이 이뤄진 질병으로 치부하기 일쑤이지만, 1950년대만 해도 심지어 미국, 영국 같은 곳에서도 대규모로 환자가 발생하였으며 그 원인 규명도 명확히 이뤄지지 않은 채 엄청난 사회적 갈등이 발생하는 등 현대인의 평범한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는 소란이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하긴, 세계 10위권 무역대국인 한국에서도 고작 백신, 고혈압약 따위의 부작용 의혹을 말끔히 해소 못 해 이처럼이나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 걸 보면, 문제는 언제나 비슷한 양상으로 반복되었으며 다만 무지와 무관심 탓에 은폐되었을 뿐이라는 점도 확인 가능합니다. 완벽하게 가치중립적인 이슈, 혹은 그런 이슈의 해결 방안이란 불가능하며, 결국 이런 보건 방면의 문제들조차에도 "정치, 잇속, 산업상의 고려"가 반드시 개입하는 씁쓸한 현실을 엿볼 수 있었네요.

서평 중반쯤에, 이 책 p209를 인용한 대목에서 "백신은 그저 공공 보건 증진의 한 수단일 뿐"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가 분명히 와 닿지 않는 이들도 많았을 겁니다. 자연과학의 필연적, 유일 결론이 존재한다면 이는 다른 정책적 고려 같은 게 낄 수도 없고 끼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의 기술적 수단"으로 백신 문제를 본다면, 사회정책적으로 다양한 사정을 고려하여, 여러 대안 중 어느 하나를 시민사회의 합의에 의해 결정할 수도 있으며, 오히려 이쪽이 더 바람직하며 일반적이기까지 하다는 함의가 자동 도출됩니다. 이게 현실을 바로 보는 태도이며, 행정학에서 자주 논급되는 이른바 "만족 모형(완벽한 솔루션은 없으며, 현실의 여러 제약과 타협한 방안이 가능할 뿐이라는 주장)" 패러다임과도 일맥상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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