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관 하세국 - 광해군의 첩보전쟁
박준수 지음 / 청년정신 / 2018년 7월
평점 :
신분제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이를 십분 발휘하거나 체제의 인정을 받고 성공하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일단 유명세를 얻어 흐뭇해하는 일탈 분자가 많은 현대와는 큰 대조를 이루죠. 역관은 본디 고관의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일개 중인의 신분이었으나 명, 청 등 대국들과의 외교를 원활히 유지하는 데 이들의 기능은 필수 불가결의 요소였으므로, 집권 세력은
언제나 각별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은 광해군 연간을 배경으로 다룹니다. 작품 속에서 중심 캐릭터 중 하나로 등장하는 정충신은 물론 실존 인물입니다. 그는
천출이라서 온전한 대접을 받기 어려웠는데, 목사(성직자가 당연히 아니고 지방관) 시절의 권율을 어린 시절 훌륭히 보좌하여 출세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과연 막강한 군사력을 행사할 깜냥이 되었는지는 의심스러우나, 여튼 대륙의 중국은 엄청난 동원 능력(광대한
영토와 자원, 인력 등)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소국 조선으로서는 그들과의 의사 연락이 원활히 이뤄져야 체제 안전 보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러던 게 갑자기 요동 지방에서 누르하치의 건주의 세력이 기존 여진 진영을 모조리 통합하고 명과 대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선으로서는 (동족도 아니고 누백 년 동안 천시, 비하하던 상대이긴 하나) 이 여진 보기를 마치 현재의 북한이
미국과 대립하는 양상을 지켜보듯 했을 겁니다. 제아무리 야무지고 간 큰 지도자를 만나 사회 구조를 잘 정비했다고는 하나 대국을
어떻게 상대하겠냐는 거죠.
여진이
명과 조선의 오랜 교통로를 차단하자, 모문룡이 무단 점령한 철산 가도는 무척 중요한 성격을 띠게 됩니다. 우리가 후대에 역사를
배우기로는 변방을 지키는 타국(그러나 상국)의 일개 장수에게 영토를 점유당한 치욕을 거론하지만, 이처럼 국제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므로 일일이 국제 규범과 민페상을 지적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또, 원숭환 장군이 황명을 받들어 해당 군기
문란자(물론 모문룡)을 처단하고 질서를 회복한 일을 극구 찬양하지만, 역시 긴 관점에서 보면 무엇이 국익을 위해 최선이었는지는
역시 속단하기 어렵습니다.
의사를
결정할 때에는 올바른 정보의 수집, 분석이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당시의 조정은 이념 논쟁에나 휘말려, 평생을
현장에서 봉직해 온 노련한 역관이 열성으로 정리해 상신한 팩트를 직시하지 못하고, 제멋대로의 정세 판단을 일삼아 끝내 국치를 맛
보고 말았습니다. 어리석은 역사가 또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이 책은 참으로 중요한 시사점을 우리에게 던져 준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