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경영 - 4차 산업혁명과 파괴적 혁신 대우휴먼사이언스 22
홍대순 지음 / 아카넷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파괴적 혁신"이란 말은 하버드의 크리스텐슨 교수가 체계적으로 개념화한 이래,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 핵심 과제로 여겨져 왔습니다. 기존의 성과에 집착하지 말고 모든 것을 원점에서 시작하듯 혁신하라는 뜻인데, 이는 종전의 금욕적 장인정신이나 성(誠), 경(敬)의 미덕과도 배치되는 면이 있어 더욱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강력한 시대정신이라면 이리 재고 저리 잴 것 없이 한 길로 내처 나아가야만 합니다. 마음에 끌리지 않는 구석이 있다면 그건 자신을 둘러싼 시대가 잘못된 게 아니라, 내면의 타성이 발목을 잡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든든한 자본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이를 상품화할 수가 없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생산 수단 소유의 독점화" 운운하며 자본가 계급을 맹비난하고 나선 건 이 때문이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3D 프린터의 발명(앞으로 갈 길이 아직 멉니다만)으로 만인 생산자의 시대가 성큼 다가왔으니 그의 이론은 중요한 기반 하나를 결정적으로 다시 상실한 셈입니다. 이제 시장에서 실패하는 건 본인의 창의성과 아이디어가 부실한 탓이지 다른 누구의 잘못이나 구조적 비리 따위 구실을 둘러댈 수 없게 되었으므로, 껍데기는 가고 알곡만 남는 진정한 경쟁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전부터 기업은 고객들에게 기획과 아이디어 참여, 개진의 기회를 열어 왔습니다. 이는 관심을 끌어 제품(아직 태동 단계도 아니지만) 홍보를 꾀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그보다는 기업/소비자의 경계 자체가 허물어지는 시대 대세의 반영이라고 봐야 더 정확할 듯합니다. 소비자는 기업의 상품을 팔아주기만 하는 타깃 집단, 배출구가 아니라, 그 일부가 이미 기업에 참여하여 함께 작업하고 이익 일부를 분여 받는 일종의 파트너십 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기업이 소비자를 그저 전략적 공략 대상으로 삼는다든가, 소비자가 기업을 반사회적이라며 적대시하기만 하는 태도는 이미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폐습입니다. 소비자와 소통 못 하는 기업은 결국 도태될 뿐이며, 이런저런 기업에 한 발짝씩 거치며 이익도 챙기고 자아실현도 하는 영리한 시민이야말로 미래의 바람직한 경제 참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걸 못 하면 본인이 무능한 탓일 뿐입니다. 맹목적인 반기업 정서 외에 아무 대안을 못 내놓는 어리석음이야말로 구시대의 프레임에 눈이 먼 낙오자의 우스운 몸부림입니다.

한편으로, 기존의 지식인 양성 시스템이란 주로 합리적이고 알고리즘 지향적인 좌뇌 우선형 인간의 현창에 그 초점이 놓였습니다(좌뇌/우뇌의 구분이 딱히 근거가 없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만 일단 통념에 기반하여 논의를 시작하는 게 편하죠. 이 책 p65에는 19세기부터 학계가 컨센서스를 이룬 좌우뇌 구분론을 잠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간 오래 억압되었던 우뇌의 창의력, 예술 감각이 다시 해방구를 맞아, 이를 잘 발휘하는 인간형이 대중과 시장에서 환영받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기존 좌뇌의 기능을 기계에 대폭 이양할 수밖에 없는 기술 진보가 누구 눈에도 뚜렷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계산 능력이 뛰어나도 컴퓨터의 연산 능력을 능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독특한 관점으로 사물과 대상의 개성을 포착하고, 타인의 감성에 독창적으로 호소하는 방식은 기계가 도무지 흉내낼 수 없는 재주입니다. 기계가 (아직은) 죽어도 못하는 걸 잘해내는 인간이 높은 대우를 받는 건 당연합니다. 소통 능력 공감 능력을 요즘 부쩍 거론들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종래, 시장에서 환영 받는 상품은 기능이 뛰어난 부류가 가장 앞줄에 놓이는 편이었습니다. 비싼 돈 주고 사서 쓰는 건데 내게 해 주는 일이 많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기능도 기능이지만 나를 감성적으로 만족시키고, 나의 심미안을 일깨우는 "예술적 효용"을 갖춘 상품이라야 히트작의 반열에 오릅니다. "와우, 이거 예술인데!(p32)"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한 건 애니콜 시리즈의 성공, 보르도 TV의 유럽 내 대히트 등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자나 후자나, 노키아나 소니 등 기존의 강자와는 달리 고객의 심미안까지 만족시키는 신의 한 수를 제품에 투영했기에 이런 쾌거가 가능했죠.

셀 폰 시장은 그후 애플이 프레임 자체를 통째 바꿔 놓았기에 다시 삼성은 추격자 레벨로 전락했지만, 정말로 다시 한번 도약을 이루려면 (애플을 제대로 "모방"하여) 현재 직사각형 구조에 머문 스마트폰 포맷을 근본에서부터 엎어버리는 혁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해당 회사 안에서도 폴더블, 플렉서블 모델 고안에 골몰했다고 하는데 아직 뚜렷한 진전은 없죠.

이번 2018 FIFA 월드컵에서도 중국가전 기업인 하이신(海信. 영어로는 특이하게 Hisense라고 표기합니다. 의도는 짐작 가능하죠)이 경기 내내 피치를 두른 광고판에서 "激光電視 中國領先, (激光電視: 앞 구절 반복) 換代首選"이란 구호를 게시하며 관중과 시청자 들의 주목을 끌었습니다(솔직히 중국인 말고 누가 그 카피의 뜻과 형태에 주목할까 싶었지만). "격광전시"는 디지털 TV 라는 뜻이며(지금 누가 아날로그 TV를 쓰나요), "중국영선"은 "중국이 앞장선다", "환대수선"은 "세대교체를 이루며 먼저 (시장에서) 선택받는다"란 뜻인데, 삼성이나 LG가 십여 년 전 정말로 해외 시장에서 영선, 수선, 환대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만 요란히 앞세운다고 현실이 그대로 바뀌는 건 아니죠.

"복잡함은 그저 과잉일 뿐이며 결코 명품이 아니고 조직의 성과를 지향하는 기업에서는 엄청난 걸림돌이 된다(p57)" 그래서 대략 십 년 전 인도에서는 불필요한 기능을 다 빼버리고 정말 필요한 피처만 넣은 이른바 "역 혁신(리버스 이노베이션)"을 구현한 제품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는 또한, 최근의 이른바 "가성비 트렌드"와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뭐 영리한 소비자라면 사실 숨어 있는 다양한 기능을 매뉴얼 찾아가며 남들 안 쓰는 효용을 찾아먹는 게 똑똑한 짓인데, 다들 그렇게 따라할 수는 없겠으니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스마트폰 역시 PC에의 리버스 이노베이션이 성공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PC를 정말 100% 활용하며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스마트폰을 놓고 답답하게 생각하겠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소비자들은 그렇지 않겠지요.

기계적 합리성의 시대는 바로 좌뇌를 우대하던 시대입니다. 시골에서 농사 짓고 소를 팔아 대학에 자녀를 보내던 어르신들은, 인문이나 예술 등 추상적이고 모호한 전공을 매우 경원시했고, 반면 자녀의 공대 진학은 이런 이들의 로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공부를 잘하기나 하면 모르겠는데 그렇지도 않고 그저 입으로 다 때우며 정작 문제를 풀어보라고 하면 손도 못 대는 가짜, 사이비가 너무 많아서 문제죠. 여튼 이런 사람들은 좌뇌형도 우뇌형도 뭣도 아닌, 입으로 다 때우는 밑바닥 사기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용을 이해도 못하면서 IT 전문가니 보험 설계니 뭐니 사기를 치고 다니는데, 아마 태중에서 사이비의 지독한 태교 테러를 받아서 용모도 흉해지고 지능도 떨어지는 광대짓을 하게 된 것 아닐까 싶습니다. IT 전문가라면서 정작 초등학생들이나 배우는 함수 기초 개념을 읊고 앉았으니, 어느 천년에 진짜 IT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요?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이유는, 사이비한테 태교를 잘못 받아서(태교가 아니라 테러 ㅋ) 인정 욕구만 강해지고 열등감이 하늘을 찌르게 된 게 다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류사의 현인들은 "일과 놀이"를 범주적으로 구분해 왔습니다. "호모 루덴스"라는 인문적 학명이 말해 주듯 인간은 태생부터 놀기를 즐기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대왕 등 전제 (계몽) 군주들은 (체신 없게도) 벌판의 농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왜 일을 안 하고 놀고 있니? 왕인 나도 이처럼 돌아다니고 있는데!" 하고 매를 치며 꾸짖었다고 하지만(본시 호언촐러른 가의 군주들이 촐싹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 중 어떤 분은 전쟁놀이하다 나라를 다 말아먹고 가문의 문을 닫기까지 ㅋ), 진짜 혁신과 창의성은 "노는 중에 불현듯" 찾아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은 처사이죠. 책에서도 네덜란드의 사상가 호이징가(하위징아)를 인용하며, "놀이를 하는 정신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 활동을 하게 돕는 원천"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태네에서 테러를 당한 늙은 열등 종자는 그저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아무도 안 믿는) 사기나 치고 불륜(아무도 호응 안 하는) 상대나 쫓고 조회수(아무도 안 보는)나 걱정 하고 다니며 큰 웃음을 줄 뿐입니다만.

요즘은 책에서 읽는 지식이 아니라 밖에서 몸소 발로 뛰고 겪는 "경험의 가치와 각성"이 그 무엇보다도 중시되는 시대입니다. 어느 백화점에서는 연극의 형태를 도입해서(p190), 직원들이 왜 고객이 불편함을 느끼는지 고객의 입장이 되어 직접 느끼고 자각하게 하는 방식도 도입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례는 직원보다, 이런 방식까지 고안하여 직원 자질을 높여야 하는 CEO나 관리직, 기획진의 고충이 더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책에서는 우뇌 중심 예술 경영의 좋은 예로 디자인 씽킹을 듭니다. 디자인 씽킹이란 1) 발상하는 이 자신도 창의적인 산물을 내어 놓기 유리하며, 2) 이를 이해하는 이들도 딱딱한 문자 안에 갇혀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이해에 그치는 게 아니라 발화자, 창안자의 의도를 직접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몇 걸음 더 나아가 진전된 새 단계의 발상도 빚어낼 수 있습니다.

p204에서는 "알레아토릭"이란 미학 개념이 소개됩니다. "알레아"는 라틴어로서 본디 주사위를 뜻하는데, 시저에게 수에토니우스가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했을 때의 바로 그 단어이기도 합니다. 세렌디피티란 말도 있는데 "우연히 발견한 행복의 기쁨"이란 뜻입니다. 진짜 가치 있고 아름답고 절묘한 창의는 그저 "우연"에 의해 빚어질 수 있다는 뜻인데, 사실 영감이야 뜬금없이 찾아와도 그 이면에는 지독한 노력과 모색과 땀이 스며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자신이 애써 죽을 고생을 해서 얻어내었다고 여기기보다, 나는 운이 좋아서 이런 게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자랑하기를 오히려 즐깁니다. 책의 결론은, 구시대적인 기계적 합리성을 추구할 게 아니라 자유롭고 창의적인 감각을 길러야 4차 산업혁명 트렌드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며, 역시 이를 위해선 초기 방향(종래의 좌뇌 지향 강박이 사라진 채)이 올바로 잡힌 출발에서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쪽이겠습니다. 노력은 안 하고 쓸데없는 인정 욕구만 X차 안에 채워 넣는 동물에게 무슨 캐스팅의 요행이 찾아들겠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