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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더 나은 삶을 꿈꾸는 당신에게
로먼 크르즈나릭 지음, 강혜정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역사가 E H Carr는, 역사를 두고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요약한 적 있습니다. 그의 말 그대로, 역사는 과연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이며, 역사가 과거에만 묶여 있을 시 이는 참된 역사일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가 사는 현재와 끊임 없이 대화를 나누고, 그를 통해 우리에게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로먼 크로즈나릭 교수님은 좀 다른 면에서 저 유명한 말을 재해석합니다. 역사가 "현재"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매개를 통해 우리와 대화하는 게 아니라, 중간에 끼는 이 없이, 다이렉트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는 겁니다. 그럴 수도 있을까? 사실 저자의 모국인 영국 아닌 프랑스에서는 이미 "아날 학파"가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 거대 정치사나 형이상의 의미 부여가 아닌, "소소한 일상으로 이뤄진 역사"에 대해 집중 탐구를 시작한 적 있습니다. 그들과 이 저자가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역사적 사건(거대한 맥락의)과 일상사(의 메시지)를 애써 구별하지 않고, "당신들, 바쁜 현대인들은 왜 그렇게 무의미한 관념과 선입견에 파묻혀 인생의 소중한 의미를 잊고 사는가?"에 대해 정면으로 교훈을 추출하여 우리에게 건넨다는 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요? 역사책이나 그 역사책에 등장하는 철학자, 현인들은, 시대가 많이 흘러 다분히 이해가 어렵게 된 언어로 표현했었다뿐, 실제로는 매우 명쾌하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혹은, 여전히 어려운 관념이었으나 저자 크로즈나릭 교수님이 이 책에서 비로소 쉽게 풀어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개념은 물론 우리들이 고교 과정 "윤리와 사상" 등에서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 등의 구분으로 배우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개념사항들을 넘어, 사람이 사람에게 갖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공감, 순수한 호감, 도와 주고 싶은 마음, 연대 의식 같은 게 우리 역사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알려 줍니다. 어찌보면, 그런 순수한 가치를 담지 못하는 역사는 벌써 역사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악할까요, 아님 그래도 선하게 바뀔 여지가 있기는 한, 척박하게 버려진 땅 같은 걸까요? 저자는 p100에서 일단 비관적인 답을 내어놓습니다. 2차 대전 당시의 아우슈비츠, 십자군 전쟁, 식민지 개척 전쟁, 현대의 이기적이고 약탈적인 기업들이 저지르는 환경 오염... 인간이 악하다는 증거는 끝도 없습니다. 저자는 나아가 "타인을 해치는 비상한 능력을 지녔으며, 불의를 보고도 수동적인 태도로 수수방관하는 능력" 역시 인간이 탁월하다고 비판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봐도 부끄럽지만 타당한 지적이며, 우리 인류의 미래에 대해 암울한 생각을 비껴갈 수 없게 합니다. 이런 관점의 대표자로 책에서는 토마스 홉스 같은 이를 들며, 우리 동양권의 독자들이 잘 아는 논자로는 순자 같은 이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불길하게만 세상과 인간을 볼 일은 아닙니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인간 본성과 인간사에서 그와 반대되는 희망적인 불씨에 주목한 인물도 있으며, 그 대표격으로 경제학의 창시자인 애덤 스미스를 꼽습니다. 애덤 스미스가 직접 쓴 표현은 아니지만 저자는 그를 가리켜 인간을 "호모 엠파티쿠스"로 본 몇 안 되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스미스를 경제학 개조로만 알지만, 그의 시대에는 도덕철학이라는 게 지식인, 석학의 필수 논의 과제였으므로 그의 정력과 시간, 재능도 주로 이쪽에 쏟아졌던 게 맞습니다. 경제 관련 논변, 연구는 오히려 가외의 취미 비슷한 것이었죠.
저자는 이어 18~19세에도 상당수의 백인들이 노예제 폐지를 입 모아 주장했으며 이것이 바로 타인의 이유 없는 불행에 눈감지 않는 공감의 징표라고 말합니다(p122). 이런 공감의 목소리, 행동, 협력이 모이고 모여 변화를 이끌어내며 역사의 근본적인 흐름을 바꾼다는 취지입니다. 윌리엄 월버포 같은 당시 영국의 정치가가 실제 행동으로 보여 준 노력은 감동적입니다. 미국의 토머스 클럭슨 같은 분의 인도주의적 행적은 또 어떻습니까. 이분, 또 스토 부인 같은 사람들은 펜으로도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노예제의 비참한 실태를 알리고 고발했는데 이 책에도 얼마나 잔혹하게 노예들에 대해 태형이 이뤄졌는지에 대한 기록 인용이 있습니다.
퀘이커 교도는 한때 미국에서 소수파 이단으로 멸시, 탄압받았습니다. "퀘이커"라는 말 자체가 비칭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이 한때 멸칭이었던 프로테스탄트에 자랑스럽고 적극적인 아이덴티티를 새로 정립한 것처럼, 퀘이커 교도들 역시 "그래! 우리는 퀘이커다!"를 선언하고 오히려 주류 기독교인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사회 문제와 모순에 대해 해결의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p222에서는 존 울먼이라는 운동가를 소개하는데, 소신과 지조 굳은 한 인간이 세상을 어느 정도나 크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 주는 모범적인 예시입니다. 18세기 중반인 울먼의 시대에도 영국에서 아직도 인클로저 운동이 진행 중이라는 말을 듣고 울먼은 대서양을 건너기까지 합니다. 행동을 하지 않고서는 몸이 근질거려 못 견디는, 살아 움직이는 양심의 표본입니다.
우리는 행운의 숫자를 7로 여기지만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5에다가 세상의 비밀과 이치를 모두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자연계를 구성하는 요소도 다섯 개요, 인간의 (외부) 감각도 시, 청, 촉, 후, 미 다섯 개입니다. 그는 이런 전제 아래에서 인간에게 내부 감각이라는 게 있다는 주장을 해부학적으로 뒷받침하려 했는데, 근대에 들어 이 주장은 가차없이 버려졌습니다(하지만 현대 들어 뇌신경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런 황당해 보이는 학설도 어떻게 재조명이 이뤄질지 모릅니다).
특히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은 감각 세계와 정신 사이에 날카로운 선을 그었다"고 평가된다고 합니다(p241). 이 해석이 하도 근사하게 보여서 후주(p494)와 참고문헌 목록(p474)을 찾아 보니, 콘스탄스 클래슨이 36세에 썼던 책이 그 출처라고 나오네요.
서유럽 역사에서 부러운 건, 온갖 역경을 헤치고 먼 거리로 탐험을 떠나 기어이 (그들 입장에서) 발견을 해 내고 마는 모종의 용기입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에도, 막부에서 남만인(이베리아 출신), 홍모인(네덜란드인) 등을 폄하하자 "그래도 그 먼 거거에서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보통내기들이 아니"라며 감탄하는 장면이 있죠. 19세기 탐험가 메리 킹슬리는 첫째 정규 교육을 전혀 못 받았고 둘째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가득했던 시절 대담하게도 아프리카로 떠나 많은 업적을 이뤄냈고 현지인들에 대해 동조적이고 호의적인 평가를 기록으로 남긴 점도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반면 동시대인이라 볼 수 있는 찰스 다윈의 글은 대단히 심각한 편견을 드러냅니다.
개개 국민을 농노의 위치에서 끌어올리는 데에는 국민교육의 실시가 큰 몫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으며, 인종주의와 증오를 조장한 면 작지 않고, 국경 밖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대해 냉혹해지거나 오히려 적극 가담케 하는 기능도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결과 두 차례에 걸쳐 큰 규모의 전쟁이 벌어졌고 휴머니티 가치 자체가 훼손되었습니다. 이런 불의와 부도덕,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감과 연대의식 회복이 필수이며 우리는 그런 목소리와 교훈을 다름아닌 역사를 통해 실감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