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만나는 우리 땅 이야기 1 - 서울 두 발로 만나는 우리 땅 이야기 1
신정일 지음 / 박하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문화 유산은 인적 드문 시골이나 그윽한 산골에만 위치했으리라는 생각은 철저히 선입견에 불과합니다. 물론 도심에 소재한 건조물들은 전화(戰禍)나 경제개발 열풍에 밀려 소실 혹은 이전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쟁 같은 외부로부터의 사변이야 우리 의사대로 통제할 수 없으나, 여타의 정책 조치는 얼마든지 문화유산 보전이라는 목표를 더 상위에 두고 집행될 수 있습니다. 또, 본디 수백 년 동안 국가의 도읍으로 기능해 온 서울이야말로 숱한 문화재와 조상들의 흔적이 온전할 법한 공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울이라는 복잡한 도회지 속에서 오히려 조상들의 숨결을 찾아내는 안목이야말로 밝은 눈 탁월한 시선이요, 우리들 역시 구태여 먼 벽지로 발걸음하기보다 가까운 곳에서 각성과 감흥을 먼저 찾는 습관이 들어야 마땅합니다.

조선 왕조의 "파운딩 파더(founding father)"라고 부를 수 있는 삼봉 정도전이 경복궁 과 사대문 등을 설계했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저자 신정일 선생님은 역사에 남은 관련 기록을 꼼꼼히 검토하여, <세종실록지리지>와 <신 증 동국여지승람>의 서술이 미세하게 차이가 남을 지적하십니다. 전자에는 숭례문(세칭 남대문)을 "서남(西南)"으로 적으나, 후자는 "정남(正南)"으로 평합니다(p44). 독자인 제 생각에는 이는 호칭이 다소 엇갈려도 무방한 듯합니다(보는 관점이 다를 뿐이며 둘 다 맞습니다). 남대문은 현재건 과거 위치건 엄연히 방위상 종묘의 서북쪽입니다. 또 과거 기준 도성의 정중앙에서 봤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경복궁, 광화문 기준으로는 정남향이 맞으며, 이는 요즘도 우리가 광화문에서 스마트폰 지도앱 등을 이용하여 똑바로 남쪽으로 냅다 걷거나, 아니면 세종대로, 삼청로, 사직로 등을 따라 자동차로 이동해도 확인 가능합니다.

요즘도 강남과 강북을 나누지만, 조선의 수도로 기능하던 당시에도 남촌과 북촌의 나눔이 두드러졌던 듯합니다. 남부는 종가(현재의 종로) 이남에서 목멱산에 이르는 지역이며 부유한 상인들이 집결했고, 벽련봉(저자는 현재의 삼청공원 뒷산으로 설명합니다)에서 필운대(현재는 배화여고 경내, 혹은 배화여대 교정 남쪽에 위치합니다) 사이에는 협객(좋은 의미의 건달), 문인들이 몰려 살았다고 합니다. 둘 다 요즘 기준으로는 종로구 일대이며 현재의 강남북 구분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계층과 성향에 따라 거주지가 나눠지는 경향은 놀랍게도 닮았습니다. 운종가(이 역시 현재의 종로죠) 기준 남북촌 구별은 또 미세하게 다른데, 남촌에는 노론을 제외한 사색당파가 섞여 살았으며, 북촌에 노론이 집중 거주했다는 게 매천 황현(단, 구한말 사람임을 유의는 해야겠습니다)의 기록입니다. 북촌에는 또한 천민들도 거주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정쟁에서 패배하여 역적으로 몰려 노비 신분으로 떨어진 화족 출신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절도 있는 가문에선 이른바 북촌 천출을 과도하게 부리지는 않았다고 하는군요.

유명한 비숍 부인의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고 저자는 인용합니다.

모든 조선인의 마음은 서울에 있다.... 어느 계급이라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단 몇 주 동안이라도 서울을 떠나 살길 원치 않는다. 조선인들에게 서울은, 오직 그 속에서만 살아갈 만한 삶의 가치가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p60)

어떻습니까? 현재 대한민국 국민 거의 모두의 이상한(?) 정서와 별반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부동산 투기바람이고 학군 선호 현상이고 간에, 모든 부작용은 결국 일반 대중의 어리석은 심리가 빚어내는 것입니다. 또, 근거 없고 국가 장래에 해롭기까지 한 무분별한 서울 선호 현상이 얼마나 깊은 뿌리를 지녔는지 이 대목만 읽어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한성, 한양 등으로 불렸던 당시 서울에는 이처럼 천민, 서민, 중소 장사치뿐 아니라 고관대작, 부호들이 각자 거주 구역만을 달리해서 경내에 섞여 살았습니다. 누구라도 아흔 아홉 간 구조를 넘어서 집을 지울 수 없었으며, 단청 등의 호화 장식도 엄금했다는 점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자께서는 통설에 따라 "왕실의 위엄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혹은 검약과 절제를 강조한 유교 이념)"을 말씀하시지만, 그 외에도 이처럼 좁은 사대문 안 공간을 개인이 마음대로 전횡하듯 이용하면 공익에 현저히 반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현대의 서울(뿐 아니라 시급 이상 행정구역)에서도 엄격히 토지용도를 제한하고, 재개발을 규제할 뿐 아니라, 엄연히 사적 공간인데도 발코니 확장 등을 감독합니다. 많은 이들이 한정된 구역에 모여 사는 도시에서는 정해진 정책계획을 준수해야 하며, 안전 등의 목적도 별도로 신경 써야만 하죠. 모두 다 조상들의 실용적 지혜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연세 지긋하신 분들은 1980년대를 제패한 인기 발라드 가수였던 이문세씨의 히트곡 <광화문 연가>를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2006년 노무현 정부 당시 건설교통부가 주관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選)"에, 바로 덕수궁 돌담길이 선정되었는데 이곳은 저 히트곡의 노랫말속에도 들어 있습니다. 덕수궁은 본디 경운궁이었는데 이는 을미사변 당시 정비(물론 명성황후라 불리는 바로 그이)의 죽음을 겪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이후 경운궁으로 옮긴 데에서 그 뚜렷한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 십 년이 지나 고종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는데 이 일이 잘못되어 퇴위를 강요당하고 경운궁에 영영 거처를 정해버립니다. "덕수(德壽)"라는 허울 좋은 명칭과는 달리 고종은 다시 십 년 후 일제에 의해 암살당했으니, 이 우수 깃든 길목은 의외로 슬픈 역사의 사연이 스며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앞으로는 이곳을 지나도 그 심회가 편치만은 않을 듯하고, 특히 여자친구와는 같이 걷기가 망설여질 것 같아요(고종과 그 배필 되시는 분이 비극적이고 불측한 사변으로 헤어졌으니 말입니다).

<조선경국전> 같은 아주 오래된 책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여러 풍속을 담은 <경도잡지> 같은 출처에서도 우리 후대인들은 여러 흥미로운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경도잡지>는 우리도 국사 시간에 배운 실학자 유득공이 지은 책인데, 오늘날 매거진(magazine)이라고 할 때의 雜誌와는 한자가 다릅니다("雜志"라고 쓰더군요). 한양도성의 둘레는 약 18.6km에 이르는데(책 p120), 이 길이는 리(里) 단위로 환산하면 47리 정도입니다. 이 코스를 놀이삼아 하루 안에 완주하는 게 세시 풍습 중 하나였다는데, 잘 걷는 사람은 열 시간 정도에 마칠 수 있다고 저자는 말씀하십니다. 요즘 서울시에서 "차 없는 날", "차 없는 길" 등을 설정하여, 시민들에게 오백 년 도읍의 유서 깊은 고장 곳곳을 직접 도보로 체험하게 권장하는 건, 따라서 아주 바람직한 캠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세먼지만 싹 없어졌으면 더할나위가 없겠건만 말이죠.

사대문과 사소문은 이 긴 성곽을 통과하는 중요 시설이었습니다. 도성의 담장은 높기도 하거니와, 군사 정변을 일으키고자 한 세력조차 쉽사리 넘보지 못하여, 반드시 (적어도) 어느 한 관문을 골라잡아 수문 진영과 연통이 되어야만 진입이 가능했습니다. 이 중요한 시설이 지금껏 남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만 일제의 간악한 농간으로 인해 상당수가 철거되었지요.

동대문은 본디 흥인문이었는데 고종 연간에 개수하였고, 한참 앞서 세조 연간에 "한성의 동쪽 지세가 낮아 산세(山勢)의 형상을 가진 갈 지(之) 자를 넣어 낮은 지세를 높이고 강하게 만들려 하였다"는 서술이 책에 나옵니다(p138).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동대문(흥인지문)의 지명 유래에 대해 궁금할 때마다 여러 자료를 찾아 보았는데, 기록마다 개명 사실을 개수 사실과 혼동하여 모두 고종 연간으로 서술하여 어리둥절할 때가 많았습니다. 신정일 선생님의 이 책은 이 점을 명확히 분간하여 정리하셨기에, 앞으로 다시는 개인적으로 헷갈릴 일이 없을 듯합니다. 아주 속이 다 시원할 정도입니다!

2권 경기도편에도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중 한 분인 이식에 대한 서술이 나옵니다만, 이 1권에는 월사 이정구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성균관 연화방(蓮花坊) 집터에 그는 절묘한 설계를 베풀어 연못에 딱히 관리를 하지 않아도 항상 일정 수위가 유지되게 했습니다. 계일(戒溢)은 한자를 풀어 쓰면 "넘치는 것을 경계함"인데, p148에는 후학들을 일깨우는 장문의 수상록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요지는, "나 자신의 깨달음(주자 식의 격물치지이겠지요)이 청정함을 유지하면 태도에서 교만함이 사라지는데, 이처럼 베움을 통해 인격을 지키는 처신은 여간한 수양이 아니고서는 힘들며, 마치 저 연못의 상태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곳을 들를 때 유심히 보아야겠습니다. 위치는 우리은행 연남동 지점과 혜화경찰서 사이입니다.

고려 중기에도 이미 이곳 서울을 남경이라 칭하며 천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개경 중심으로 형성된 세력가들의 반대가 심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저자 신정일 선생님은 특히나 서울의 지세와 형국이 아름답다고 강조하시네요. "산과 강이 자연스럽게 도시를 감싸며 흐르는(p183)" 곳은 세계에 유례가 없음에도, 사람들은 외국의 산만 좇아 유람을 꿈꾸는 건 사실 실속을 못 차리는 우행에 가깝습니다. 외국에서 아웃도어 명품으로 유명한 어느 메이커가, 한국에서 상당 물량을 소화하겠다며 오퍼를 넣자 농담인 줄 알고 무시했었다고합니다. 주말마다 산을 오르는 엄청난 수의 등산객들을 보고서야 진지하게 계약에 임했다는 일화도 있죠. 서울의 그 숱한 명산을 놓치는 등산가라면 진정 가까운 곳의 보석을 놓치는 청맹과니와도 같습니다. 이 책의 저술 취지 자체가 "지척에 있는 소중한, 천금 같은 문화재부터 살피자"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그저 산수가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유구한 역사를 품은 고장의 명산 명수 답게, 숱한 명유(名儒)의 일화와 사연을 담았다는 게 또한 특기할 만하죠.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끌려가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라는 시조를 남긴 바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국어책에서 배운 내용이지요. 병자호란 당시의 기구한 역사에 대해서는 이 책 2권의 남한산성(경기도 광주 소재) 파트에 비교적 자세히 서술됩니다. 삼각산이란 이름을 가진 곳은 두어 군데가 있는데, 이 시조에서 읊는 삼각산은 북한산입니다(그러니까 이 책 1권 서울편에 나오지요). 북한(北漢)은 한성, 혹은 한강의 북쪽이라는 이유에서 그리 이름이 붙었으니 행여 북한(北韓)과 혼동할 일은 아닙니다.

지금도 서울 강동구에 백제 시대의 토성이 여럿 발견되어 문화재로서의 보존과 개인의 사유 재산권 행사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죠. 어쩔 수 없는 게, 이 서울 땅(경기도 일대도 마찬가지지만요)은 백제 시절부터 발달된 문명권이 여럿 자리하여 각축을 벌이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산성 역시 그 무렵으로까지나 역사가 거슬러올라가는 아주 유서 깊은 유적입니다. 개로왕(벡제 21대)과 개루왕(4대) 임금에 얽힌 사연도 언급(p147)되고요. 한음 이덕형 대감은 이곳을 고쳐 지어 도성 외곽을 방어하게 지시한 적도 있다고 나옵니다.

압구정 일대는 본디 한적한 경기 남부의 농촌으로서 번화한 도심과는 아무 연이 없던 고장이었습니다. 책에는 1970년대 당시 현대건설이 공유수면을 매립하여 강남 일대를 개발하던 이야기가 짧게 언급되었는데, 역사서에 곧잘 기록이 있던 저자도(1950년대만 해도 시민 휴양지로 애용되던)가 어찌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를 설명하기위해서입니다. 이 일대는 한명회 개인의 사유지였으며,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한림학사 예겸(倪謙)이 그의 청을 받아 이리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일화에서 "진압"은 물론 鎭壓이라고 쓰지만, 압구정의 "압"은 오리 압(鴨)도 아니고 狎이라고 씁니다. 비둘기(鷗)를 가까이한다는 뜻이죠.

오늘날 서울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 중 하나인 여의도는 고려 시대에는 귀양지였다고 합니다. 국회의사당뿐 아니라 방송국, 증권회사 등 중요한 시설이 대거 밀집했고 중산층 거주지인 아파트도 잔뜩 들어섰죠. 이곳은 1960년대 후반만해도 원거주자들이 있었으나 "불도저 시장" 김현옥 씨가 급하게 개발을 추진하면서 멀리 관악구 일대로 밀려났습니다. 여튼 양화나루는 한양의 "천연 방어선"을 이뤘는데, 이처럼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도 왜란, 호란 등을 겪으며 무력한 시절을 겪었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양화나루도 그저 한강변의 휴양지 중 하나이기만 한 게 아님을 알았으니 다음부터는 예사롭지 않게 보일 듯합니다.

보천교라 함은 조선 후기에 우후죽순처럼 생긴 증산교 계열의 신흥 종교였는데, 이를 민심 동요의 한 통로로 파악한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그 서울 본거지였던 십일전은 지금의 조계사로 개축되었다고 합니다. 현 조계사 터가 경기도 일원이었으니만치 설령 유서 깊은 사찰이 있다 해도 별반 이상할 바는 없으나, 왜 하필 거기 조계사가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았는데 그런 사연이 있다는 걸 책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곳은 물론 강남이지만 강북으로 올라와 인사동 쪽을 보면 태화관이 있는데,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 선언을 한 유적지이지요. 서울은 이처럼 근현대사의 주요 족적까지도 곳곳에 품은 실로 매력 넘치는 도시입니다.

현재 마른내로 불리기 시작한 건천동 일대만 해도 바로 충무공이 탄생한, 참으로 뜻깊은 지역입니다. 흔히 큰 인물은 지방에서 난다고 알려져 있으나, 옛 선인들도 상서롭기 짝이 없다고 본 빼어난 풍수를 두루 갖춘 곳이 바로 서울입니다. 그런 서울이니만치 나라를 구한 명장, 삼천리 이백만 생령의 살림을 두루 살핀 명재샹 등 숱한 인물을 베출한 명당 중의 명당입니다. 우리들이 서울에 사는 자부심은 그저 문화 혜택을 쉬이 입을 수 있다거나 비싼 곳에 거주한다는 속물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이처럼 천 수백 년에 걸친, 세상에서 가장 오랜 문명권 중의 한 자락에 산다는 참된 자각이 우선되어야 할 듯합니다. 당장 여친(남친)과 시내를 거닐 때도, 아득한 예전 조상들이 풍류를 즐기거나 목숨 걸고 지켜낸 숨결을 혹 의식한다면, 훨씬 더 재미나고 깊은 추억을 남기는 체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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