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사면초가 2 - 완결
소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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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될 듯하다가 이 2권 시작(27화)부터 뜬금없이 이남이와 여주가 가까워질 조짐이 보이고, 학교 안에서도 이미 일남과 여주를 공인 커플로 여기는 터라 놀라움의 분위기가 싹 쓸고 지나갑니다. 한편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면서도 정작 둘이 가까워질 기미는 전혀 없는 사남과 나비 사이에서는 우습고 황당한 대화가 오가는데요.

"그거 실존인물이었어?"
"애써 찾은 새 사랑이 더러운 니네 집안 핏줄이라니!" (p12)

일단, 자기가 먼저, 직접 눈으로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은 삼남 이야기를 꺼내놓고, 사남이 "그거 우리 셋째 형이야!"라고 하자 비로소 그 실존 여부를 따지는 저 말이 너무 어이가 없지만 귀엽긴 합니다. "존재감이 없다"는 게 꼭 매력 없다, 무시받아 싸다 등과 같은 뜻만은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설령 맘에 들어도 존재감 없다는 느낌은 그것과는 또 별개임을 이 컷이 우습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얘 입장에선 일단 여주에게 가버린 일남이한테 상처를 받았고, 바로 곁에 있는 사남이는 남자로 안 느껴지고, 그래서 설레게 된 "새로운 남자"는 전혀 다른 출신이었으면 했는데 하필 또 같은 형제 중 한 멤버였다는 게 충격일 만하죠. "더러운"이란 표현은 이 순정 가득한 형제들에게 전혀 안 어울리기에, 혹은 반대로 돌고도는 근친관계에의 불만도 담았기에 절묘하다는 느낌입니다. 그 실망하는 마음은 알고도 남지만 그렇다고 그런 극단적인 형용사를 쓰는 상대에게 경악하는 사남의 표정이 볼만합니다.

편의점에서 그냥 싸니까 원플러스원 칫솔을 고른 건데 이남이는 혹시 여주가 커플 아이템이라도 챙기는 것 아니냐며 마구 설레어합니다. 삭막한 원플러스원(가장 비루한 절약 패턴이자 동시에 결국 돈 낭비)에 그런 의미를 둘 수 있다는 게 재미있었고, (조금 뒤에 언급하겠지만) 유독 과자를 좋아하고 편식 습관을 못 고치는 이남이는 여주의 다른 한 마디에 또 심쿵합니다.

외모 하나만은 형제 중에 가장 볼만한 이남이는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멋대로 편할 대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인데, 생각을 좀 담아 두거나 성숙시킬 줄 모르고 마구 발설하는 태도가 보기에 민망합니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상대한테 던지는 말이 "있잖아, 넌 왜 귀여워?"입니다. 물론 모든 언행은 여주를 갖고 말겠다는 동기에서 비롯하는 지극히 단순한 기제입니다.

헤어질 이유가 딱히 없는데 일남과 여주는 합의 하에 친구로 남기로 별 뒤끝도 없이 결정해 버립니다. 이 웹툰의 가장 큰 매력인데, 서사도 딱히 없고 대화도 설명도 다 생략되지만 독자들은 급격한 상황의 변화에 일일이 납득하고 공감합니다. 전형적인 순정 만화의 필체이고 때로 짱구는 못말려 같은 명랑만화체로 단순화되지만 자신도 미처 캐치 못한 복잡한 감정의 변화, 변덕을 우리 독자들 역시 캐릭터들의 "눈빛"만 보고도 다 눈치챌 것 같습니다(이게 과연 가능한지).

담임쌤은 아이들의 성화 때문에 마지못해 상담 세션을 결정하는데, 이남이는 이 와중에도 여주 생각뿐입니다. "전혀 공부를 안 하는 것 같던데 성적이 좋네?" "찍었어요." "대학은 어딜 가고 싶지?" "그녀가 가는 곳 어디라도." 한편 나비더러는 "성적이 정말 쓰레기"라며 직설적 평가를 서슴지 않으시는데, 나비는 여주, 이남, 사남이 생각에 정신이 완전히 딴데 팔려 있습니다. 멋도 모르는 담임은 나비의 표정이 금방 밝아지는 걸 보고 "회복이 빠른 아이"라며 속단해 버립니다.

이남이와 첫키스를 나눴지만 어느새 여주는 다시 일남에게 생각이 기웁니다. "좋아하는 애한테 내가 한번이라도 먼저 다가간 적 있었나?" 이런 기특한 생각을 품고 1권에서 바로 일남이를 손에 넣은 여주입니다. 사실 이 단계를 결코 만만히 봐서는 안 되는데, 고1은커녕 대학생, 심지어 사회인이 되고 나서도 이 간단한 기본이 너무도 넘기 힘든 장벽으로 남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주가 독자의 성원을 한몸에 받는 건 여주(여자주인공) 보정을 받아서가 아니라, 아닐 것 같으면서도(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빠는 자주 근무지를 옮기는 등 상처가 큼) 이처럼 성격이 시원하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혹은, 원래 안 그런(안 그러던) 애가 우리 바로 보는 앞에서 "잘 크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죠.

언제나 동생 같은 사남이는 그새 키가 1cm 자라서(사실은 더 큰 듯 보입니다) 누나 누나 하며 계속 여주 주위를 맴돌지만 자신도 우리 독자들도 얘한테는 기회가 없겠음을 잘 압니다. 이남이는 한편으로 다시 일남에게 향하는 여주의 마음을 읽고 노심초사합니다. "이거 먹어." "괜찮아." "내가 일남이 혼내 줄까?" "아니(!).." "두 번 먹어!" 아무것도 아닌 듯하면서 짧은 말로 캐릭터들의 심리를 너무 잘 표현한 대사들입니다.

"그땐 왜 헤어졌던 거지."
"나는 뭘 어쩌고 싶은 걸까." (p165)

왜 사람은 좋은 머리를 갖고서도 자기 마음의 정체와 방향을 모르는 걸까요. 이 와중에 내 자신이 상처 안 받게 갈 길을 잘 챙기기도 해야겠으나, 저 아이의 형편도 살펴야 하니 숙제가 너무 어렵습니다. 내 마음도 갈무리를 못하면서 남의 마음은 어떻게 돌본다는 걸까요. 그래도 그게 맞다는 걸 애들도 알고 밖에서 구경하는 독자들도 다 압니다.

이 형제들은 스타일과 성격이 판이해도 자신들의 마음을 참 자주 들킵니다. 들키는 게 아니라 알아 주기를 바라는 거겠지요. p75의 편의점 씬에서 이남이는 여주가 당연히 과자 좋아하면 충치가 생기기 쉽다는 상식을 말한 건데, 자기 입 안 최근에 생긴 충치를 어떻게 알았냐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매우 부끄러워합니다. 어른들은, 상대가 당연한 추론에 의해 내린 결론도 그저 운이나 요행으로 치부하기 일쑤일 만큼 부정직하고 어리석은 데도 말입니다. p179에서 삼남이는 "이러다 여주가 더 좋아지면 어떡하지?" 라며 걱정합니다. 형들이 이미 찜한 여자고 여주 역시 그들을 (적어도 자신보다는) 더 좋아한다는 걸 아는데 괜히 민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너무도 착한 마음의 발로입니다. 임자가 있는 몸을 놓고, 한때의 이기적인 쾌락을 위해 눈독을 들이는 추한 어른들과 너무도 대비되죠. 갑자기 "(다친 팔이 빨리) 좋아졌으며 좋겠다"고 말한 여주 앞에서 마음을 들키려고 작정한 삼남이의 놀라는 표정을 보십시오.

인공지능처럼 타인과 세상을 어색한 과정을 통해 이해하는, 존재감 제로였던 삼남이가 결국은 최후의 승자로 남습니다. 이 역시 놀라운 반전이지만, 등장 인물은 모두 둘의 앞날을 축복하며 우리 독자들도 마치 "일이 마땅히 그리 풀려야 했겠거니" 라고나 하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름들은 여주, 일남, 삼남.. 처럼 무심히 붙었으나, 얘들은 결국 독자의 가장 보편적인 공감대를 터치하며 누구나 한때 지녔던 초심과 순정에의 향수를 마구 자극합니다. 하긴 이 장르는 본래의 소명이 이런 쪽이었으니까요. 가장 착한 마음이 실상은 가장 성숙한 마음인 법이고, 성장을 거부하는 이들이 알고 보면 가장 이기적이고 못된 영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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