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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영혼을 꿈꾸다
임창석 지음 / 아시아북스 / 2018년 6월
평점 :
"지구는 살아 있다." 사상가나 철학자들뿐이 아니라 자연과학자들 상당수마저, 표면에 기생하는 하잘것없는 생명체들을 거대한 힘과 호흡으로 굽어보는 지구의 "영혼"을 두고 가이아 이론으로 체계화한 바 있습니다. 이는 그 실체나 논거가 구비되어 있느냐 여부와는 무관하게, 양식 있는 지구인들로부터 옹호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지구 온난화 이론 같은 것도 사소한 논거 흠결을 빌미삼아 반대진영으로부터 트집을 잡히기도 합니다만, 우리 대부분은 탄소 원료 저감 등의 실천을 통해 이 추세가 반드시 가로막아져야 한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생존의 절박한 문제 앞에서 논거를 따지고든다는 건 참 한가한 짓입니다. 말 안 듣는 못된 아이들은 엄마한테 호되게 엉덩이를 맞는다는 건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진리 아니겠습니까.
임창석 저자는 (지난번 리뷰에서도 말했지만) 현직 정형외과 전문의이자, 이 책의 유려한 문장에서도 잘 드러나듯 등단 시인이며, (아마도 우리 독자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사진을 참 잘 찍으시는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수상록(잠언서?)마저 읽고 나서 든 느낌은, "은근한 예언자"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단지 무슨 구약성서 등에 나오는, 눈빛 심상치 않고 거동 살벌한 그런 예언자풍이 아니라, 잔잔히 지혜를 일깨우고 좋은 말로 엄마처럼 타이르는 단정(端正)한 현인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과연, 우리들은 선지식처럼 어머니 지구에 영혼이 있음을 알았지만, 세파와 이기심에 부대끼면서 우리 자신에게 영혼이 있는줄조차 까맣게 잊고 지냈습니다. 이 책, 즉 "지구의 영혼"에 대해 자근자근 싱기시키는 가르침이란, 먼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궁극의 진리를 다시 상기시킵니다. "너 자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서로와 연결된 하나이며, 인간들 역시 자연과 일체가 된 존재이다." 그러니 개인만 살겠다며 스스로의 몸을 해쳐 대는 짓거리란 얼마나 우습고도 어리석습니까.
이 책은 겉으로 보아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실제 소설로 읽어도 됩니다. 아주 두드러진 사건이 없어도, 등장인물들이 담담히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의 자신을 짚어가는 포멧은 역시 익히 확립되었던 전통 중 하나입니다. 마치 저자 본인의 페르소나라고 봐도 될 듯한 "의대생(레지던트) 제임스"의 회고 액자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제임스는 장래가 창창한 예비 의사이고 역량과 솜씨도 좋지만 알지 못할 한 가닥 회의를 마음 속에서 지우지 못합니다. 온갖 인종이 모여드는 뉴욕 허드슨 강가에서 각종의 정물, 혹은 역동적 풍경을 스케치하는 그의 모습 역시 저자 자신의 상(像)을 어느 정도는 반영하는 듯합니다. 해부, 해부,... 제임스는 마치 전역 후 얼마 안 된 군인이 다시 내무반 생활로 돌아간 악몽에서 깨어나듯,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 반복되는 루틴과, 칼을 쥐고 낯선 노인의 시든 육체를 가르는 역겨움에서 벗어날 방법이 무엇일지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이런 그에게 느닷 다가온 건 어느 소녀의 일기장이었습니다. 소녀의 이름은 "마티"인데, 마티는 들으면 꼭 남자 애 이름 같지만 Matrha의 애칭으로도 볼 수 있으므로 여자애한테도 흔히 씁니다. 남자는 Marty라고 살짝 철자가 다르다고도 하는데 뭐 꼭 그렇지만고도 않습니다. 여튼 이 소설에선 일부러 Marti라고, 소녀 이름의 정확한 철자까지 제시됩니다.(성씨는 "하비". 마치 해부학의 아버지 윌리엄 하비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마티는 엄마가 없습니다. 어느날 생전의 엄마와 함께 놀던 뉴욕 바닷가를 떠올리며, 새로 이사 온 오하이오 주 이리 호수 근처에서 뛰어다니다 구덩이에 빠져 크게 다칠뻔하고 기절까지 합니다. 뉴욕은 바다에 면해 있지만 이곳 이리(Eerie) 호수도 바다처럼 넓기에 소녀에게 기시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여튼, 정신을 차려 보니 큰 몸집의 갈매기가 자신의 아래에 깔려 죽어 있느데, 따스하기도 했고 푹신하기도 하다가 이제는 싸늘해진 무엇이 바로 지금 갈매기의 사체인 걸 알고 소녀는 놀랍니다. 이 사실을 아빠에게 말해주자 하비 씨는 차분히 딸의 머리를 어루만집니다.
"엄마가 너를 지켜 줬나 보다...."
"네에....?"
한편, 장면이 바뀌어 소녀 마티와 리처드는 그전부터 자주 만났지만(?), 이번에 제대로 인사를 나누며 통성명까지 거칩니다. 무슨 소린가 하니, 리처드는 본래가 오하이오 출신이고 거기서 학부까지 마쳤지만 의대(콜롬비아대) 공부 때문에 뉴욕까지 온 거고, 아까 말했듯 마티는 뉴욕에서 나고 자랐으나 어머니를 잃은 후 이곳 오하이오로 아빠 따라 이사 온 겁니다. 그러니 둘은 고향과 거주지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교환(?)한 셈입니다. 리처드가 오하이오 체류 시절 호숫가에서 뛰놀던 마티를 먼발치에서 본 건데, 그때는 리처드 본인도 개인 마티를 의식한 건 아니었고 그저 풍경의 일부로 받아들인 듯합니다.
앞에서 마티가 엄마를 잃은 소녀라고 했는데, 리처드 역시 비슷한 상실의 아픔을 안고 자랐습니다. 형 에릭이 전쟁터에서 죽었는데, 주변에서는 영웅의 죽음으로 떠받들지만 어린 리처드에게는 영문 모를 큰 시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소년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현인 아첵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문까지 닫았습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작가님의 다른 책 <자신의 영혼에 꽃을 주는 100가지 이야기>의 한 대목을 들춰 보게 됩니다. 사람은 정신과 육체 외에 "영혼"이라는 구성 요소를 갖는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문화권에서, 양심이나 행동 원칙의 일관성 같은 게 결여된 채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사람을 두고 "영혼을 악마에게 판 자"라는 비난을 하곤 했죠. 겉치레로 반듯한 예의를 지키고 치밀한 계산 하에 행동하기는 하나 결국 이웃을 해칠 궁리만 하는 사람에게 영혼이란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치가 어찌 기독교 문화권에만 통하겠습니까? 바른 마음을 지니고 공동체에 속하며, 이웃과 가족에게 뜻있는 결과를 남기려 애 쓰는 인간 문명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치이겠습니다.
저런 나쁜 유형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영혼을 잃기로 작정하고 이기심만을 키우는 사이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런 인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영혼에 꽃을 주는" 행위와 마음가짐이 때로는 의식적으로 필요합니다. 척박한 황무지에 절로 꽃이 필 수 없습니다. 딴에는 정성스레 가꾸는 화분에 꽃 한 송이가 피기까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실제로 꽃을 다뤄 본 사람이라야 실감합니다. 하물며, 악이 언제나 방문객으로 깃들기 쉬운 우리 인간의 경우야 일러 무엇하겠습니까?
저자는 말합니다. "인간이란, 우주에 플러스 효과를 일으키는 존재입니다.(p31)" 무슨 뜻일까요? 영혼의 안식이 깃들 여유가 없는 척박한 물리계에서 1+1은 언제나 2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따뜻한 마음, 풍부한 상상력,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여유 등은, 1+1의 결과를 때로 3으로 만듭니다. 자연 법칙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1+1=3이야말로 인간에게 맞는 산술법"이라고 합니다. 1+1=3을 때로 만들지 못하면, 그 사람은 인간으로서 어쩌면 결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사람이라면 기계적 산술 법칙을 때로 초월할 줄 알아야 합니다.
"원주민들은 죽은 이의 슬픔보다도,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 속에 남겨진 죽음을 더 비극으로 생각한단다.(p60)." 그렇습니다. 물론 돌아가신 분, 더 이상 우리와 살을 맞대고 조곤조곤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분의 죽음이란 그 자체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비극이고 아픔입니다. 그러나 먼 천국에서 여전히 우리를 내려다보며 그리워하실 망자의 마음도 마음이지만, 더 찢어질 듯 아픈 건 살아남아 여전히 이승에서 삶을 부대끼는 우리들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또 어디 내 마음만 잘 추스른다고 그게 다이겠습니까. 다른 유가족들, 친구들, 협업자들, 추종자들의 설움도 달래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구란 행성은 아직도 불완전한 단계란다... 이 넓은 시공간에 질서를 유지하고 착한 주파수를 쏘아대는 뇌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들처럼 진화된 집단 생명체의 조화된 뇌세포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단다.(p96)." 가슴이 뭉클해지는 말씀입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 적 있습니다. "우주는 너무도 광대하며 인간은 티끌보다도 작다. 그러나 거대한 공간인 우주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반면 그 작은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티끌보다 작은 인간이 우주 전체보다도 존엄하다는 것입니다. 생명체가 스스로를 복제하고 거의 끊임없이 대를 이어가며 심지어 우주 전체의 작동 원리까지 궁구해 낼 단계까지 이르렀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그런 존엄한 생명체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타 생명체와 교감하며 희로애락을 느끼고.. 이것이 그저 한 개인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런 순간에도 우주를 향해 주파수를 뿜어내는 것입니다. 그 주파수가 모이고 모여 감히 저 거대한 우주에 영향을 끼치며 마침내 어떤 운명조차도 바꿀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하찮은 개체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씀이나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의해서 벌써 우주에다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벌써 하나의 우주입니다. 함부로 살아서 될 일이겠습니까. 책임이란 걸 의식해야 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보다 성숙해지면 종교 간의 갈등도 사라질 것이고 지구의 영혼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인류 전체의 마음이 싹트게 될 것이다.(p115)" 인류의 마음입니다. 철수와 영희의 마음이 아니라, 70억 인구가 하나되어 뿜어내는 "하나의 거대한 마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마음은 저 차갑고 외로운 우주 검은 구석조차 온기로 데울 수 있습니다. 어떤 거창한 레이더나 인공 발열 장치를 통해서? 아닙니다. 그런 걸 만들려면 환경을 해치고 탄소를 다량 발생시켜야 합니다. 그건 자연과 우주와의 교감, 화해가 아니라 또하나의 전쟁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착한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이웃과 공유하고 우주로 향해 뿜어낼 수 있다면 그순간 우주는 환히 밝혀지고 암울한 팽창을 멈춥니다. 우리는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마침내 죽음도 넘어설 것입니다. 이 모든 게 다 우리 개인개인이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