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0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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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란 무엇일까요? 나면서부터 물론 일정한 자질을 타고나는 게 천재의 본연적 정의에 맞아떨어지겠지만, 그저 하늘로부터 재능을 부여받은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재능이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잘 자랄 수 있도록, 그 부모와 가정, 학교, 사회가 세심한 배려를 베풀어야만, 자아실현과 공동체 기여가 동시에 가능한 소중한 인적 자원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J S 밀은, 그 부친 제임스 밀에 의해 천재 교육을 받고 자라난, 어찌 보면 성장 과정에서부터 과도한 관심을 의식하고 자라난 프로젝트형 인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삶이 과연 행복하기만 했을까요? 사실 꼭 천재로 자라난 이들뿐 아니라, 왕실의 후계자, 재벌가의 2세, 3세 등이 다 같은 운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나친 축복과 시선, 관심은 오히려 당사자의 성격과 심성에 상처를 줄 만한 재앙일지도 모르며, 실제로 이 부담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해 보통 사람만도 못한 폐인의 행로를 걸은 숱한 예들도 우리는 접하곤 합니다.

J S 밀 역시 그런 위기를 소년, 청년기에 여러 번 겪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자유 의지가 아닌, 마치 신(神)과도 같은 부친에 의해 세심하게 꺾꽂이되듯 자라나는 인생이, 아무리 병충해로부터 안전하고 겉모습을 화려하게 꽃피워도, 생의 매 단계를 자유의사로 누리며 정직한 감성으로 제 삶을 부대끼지 못한다면, 그저 야생의 비천한 잡초보다 더 불행한 영혼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J S 밀이 논하는 자유는, 그래서 다른 이들의 피상적이고 위선적인 도덕 철학 논의보다 훨씬 절실한 깊이를 가집니다. 창조주에 의해 통제되고 관리되는 인생에 무슨 자유가 있을까 싶은 회의 속에서, 그래도 자신은 그 와중에 진짜 자유의 의미를 찾아 나간다는 대견스러운 자각, 통찰, 더 나아가 자신만 못한 모든 타인들에 대한 동정과 공감 가득한 시선으로의 이행, 이 전부가 어쩌면 "지적인 괴물"에 그칠 수 있었던 J S 밀이란 한 개인의 위대한 환골탈태요, 대오각성을 통한 인류와 사회의 구원이라 평가해 봄직한 것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보다 이백년 앞서 태어나고 활약한 영국의 시인, 사상가로 존 밀턴이란 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저서 <아레오파지티카>는 1644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해는 명나라가 이자성의 농민반란에 의해 망한 연도이기도 하죠. 이 저서는 이른바 "사상의 자유 시장 이론"을 처음 체계화하여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절대 권력(정치든 종교든)이 미리 정하여 대중에 강요하기보다, 백인 백색의 사상과 주의를 자유롭게 표방하도록 하여 그 중 가장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은 이념이 사회를 이끌도록 하자는 취지입니다.

1644년 당시에 이런 파격적 주장을 그나마 가장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용하고 널리 퍼뜨릴 수 있었던 게 영국 사회이며, 이후 유럽과 세계를 통해 가장 왕성한 경제와 문물의 발전을 이룬 것도 다 이런 정신적 인프라의 건전성에 기인한다 해도 과언이 결코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이웃 중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어느 나라는, 특정 검색어를 인터넷 상에 일절 노출되지 않게 한 조치를, 마치 자랑이나 하듯 관변 매체를 통해 홍보하는 중입니다. 엄연한 독재자를 독재자라 부르지 못하는 사회, 이걸 어디 사람 사는 세상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2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자랑스런 우리 촛불 혁명의 참된 의의와 기치가 가장 절실히, 최우선적으로 수출되어야 할 곳이 바로 저런 체제속이라 하겠습니다.

그로부터 이백여 년이 지난 후, "대체 자유로운 개인과 사회의 의의란 무엇인가?"를, 여태 이뤄 온 모든 도덕철학과 인식론을 총동원하여 명료한 언어로 새로이 규명한 저작이, 어느 "세기의 천재"에 의해 다시 집필되었습니다. 이름하여 <자유론>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의 본질은 바로 자유이며, 자유를 박탈당한 인간은 벌써 인간이 아닐 뿐 아니라, 혹여 우리의 곁에 이 소중한 천부인권을 누리지 못하거나 박탈당한 이들이 있다면, 그 자유의 달콤하고 유익한 숨결을함께 나누고 늘려야 할 사명감을 다시 인식하는 게, 우리 모든 자유인의 본분임을, 이 고전은 준열하고도 품위 있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정치 공동체들의 규모가 커졌고, 무엇보다 영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가 분리되었기 때문에, 법률을 통해서 개개인의 사적인 삶에 속하는 세세한 부분들에 지나친 간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중략).. 하지만 지배적인 여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가해져 오는 도덕적 압력의 기제는 더욱 집요해졌고, 심지어 그런 압력은 사회 문제보다도 개인과 관련된 문제에서 더 심각해졌다." (p54)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개인과 대치하는 사회적 권력의 압박"이란, 반드시 야만적인 독재 체제의 탄압이나 폭력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개인을 억누르는 "전체의 의견"이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일 때에조차, "사적인 영역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시도"는 결국 그 도덕이나 종교의 건전한 기반조차 무너뜨릴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손톱만큼의 정당성도 갖추지 못한 독재정권의 전제적 횡포야 새삼 일러 무엇하겠습니까. 개인의 양심이 누리는 자유는, 비록 그것이 전체의 시선에서 일탈이나 방종으로 비춰진다 해도, 그 소중한 개체 자유의 존중으로부터, 사회 전체가 누리는 인권과 자유의 기반이 비로소 생성될 수 있음을 J S  밀은 일찍부터 통찰한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전처럼 아주 많은 수는 아니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조에 대해 아무 합리적인 근거를 내놓지 못하고, 타당하며 온건한 반론에 대해서조차 묵묵부답인 채, 심지어 피상적인 반박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대꾸를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권위자로부터 한번 의견을 이식 받은 후에는 마치 광신자가 도그마를 숭배하듯 아무 의심 없이 죽은 정신의 맹종으로 이를 받들며.... " J S 밀은 이처럼, 대체 아무 합리적인 성찰의 계기조차 갖지 못한 채 무슨 음울한 짐승마냥 정체 불명의 주문을 읊조리며 "어설픈 꼰대짓"을 하는 일부 무지한 계층에 대해,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아둔한 과거의 잔폐라며 신랄한 비판과 건전한 우려를 표방합니다. 이런 자들은 때로 겸손과 소탈을 가장한, 그 속은 거짓으로 가득찬 유사 반성의 표백을 통해 무리의 신망을 모으려 책동하지만, 그 본질이야 설익은 자기 연민, 나아가 오만과 독선의 비겁한 위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썩은 위선자들의 행보가 마치 사회 정의의 목소리인 양 통용되는 사회는, 참된 의사 소통의 자유도 없고 건설적 토의의 장도 폐색된, 죽은 망령들의 섬뜩한 염불만 가득한 공동 묘지에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천재의 본질은 독창성입니다. 독창성은 당연하게도 개개인 고유의 특성에 대한 섬세한 존중과 배려에서만 싹틀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는 이미 이룰 것을 모두 이룬 완벽한 사회일까요? 만약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욕망을 충족받고 성장한 이라면 그리 여길 수도 있습니다만,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겠으며, 설령 그런 이라 해도 성장 과정에서 새로 생기는 욕구를 매번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사적으로 소유한 자원에도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의 편익 체계가 그의 눈높이를 미처 만족 못 시킬 수 있으며, 오히려 이런 이들일수록 더 높은 차원의 희구를 품게 마련입니다. 예술이나 기발한 테크닉이 이런 환경에서 최상의 성과를 꽃피우는 건 오히려 당연하며, 천재(말하자면 이 책 저자 J S 밀 같은 이) 역시 본연의 잠재력을 최대 범위로 달성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개성들이 하나같이 점잖은 도덕률에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았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J S 밀은 이런 사례에 대해서조차, 개성과 사적인 영역이란 엄격히 존중되어야 하며, 어설픈 자신만의 독단을 함부로 타인의 삶에 잣대로 들이대지 않는 절제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하물며, 무엇을 올바로 판단하거나 바로잡을 힘, 지혜도 없는 주제에, 마치 관용을 베풀며 참아준다는 식의 가당찮은 허세를 떠는 작태란, 진정 하나의 코미디일 뿐입니다. 그렇게 개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존중해서, 사회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창의력으로 인한 혁신입니다. 완벽한 사회라면 이런 걸 억눌러도 됩니다. 사회와 체제가 완벽하지 못하기에, 개성은 자유롭게 뛰놀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진화와 발전과 도약이 이뤄지기 마련입니다.

p162를 보면 당시만 해도 만연했던 중국 여인들의 전족에 대해 비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미친 폐습의 경우에도, 이를 합리화한 봉건 체제는 마치 여성의 미(美)를 소중히 배려나 한다는, 참으로 가당찮은 썩은 구실을 들먹인 게 아니었겠습니까? 억압과 순치의 시도는 비단 성(性)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전쟁이 아니라, 사회 도처에 분포한 계급과 계층 간의 갈등 구도 속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탈 코르셋" 운동이 여성들 사이에서 널리 확산되고 있다고 하는데, 이처럼 자유의 가치는 모든 억압과 통제의 기제를 썩은 문짝처럼 걷어차 버리려는, 인간 통성의 의기와 어느 하나 통하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오늘날 인류가 봉건적 정체와 빈곤을 탈피하게 된 건, 개개인의 자유와 권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자각하고부터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자신의 전족을 늠연히 벗어던지는 그 순간, 나도 자유롭고 남들도 행복해지는 공존 공용의 터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악독한 미세먼지를 깨끗이 정화하고 타고난 천분을 마음껏 발휘하는 출발선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오로지 자유, 자유의 덕목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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