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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가 - 달라이 라마와 유전자의 생명토론
아리 아이젠.융드룽 콘촉 지음, 김아림 옮김 / 영림카디널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예전부터 현인들은 그런 질문을 던져 왔습니다.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 질문 중에서 이것보다 더 근원적인 수위는 없다고 하며, 이 의문이 해결되면 다른 모든 (하위의) 문제들은 절로 답이 찾아진다는 거죠. 헌데 이 정도 레벨의 아득한 의문에 대해 과연 인간의 지혜로 답이 찾아질 가능성이란.....
존재의 근본과 기제를 찾는 아찔한 사유까지에는 못 미쳐도, "우리는 죽고 나서 어디로 가는가? 죽음은 정녕 모든 여정의 끝이며, 아무것도 남지 않는 종결인가?" 같은 질문 역시, 우리 필멸(아니었으면 좋겠지만)의 인간들이 그 곁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DNA에 대한 지식이나 분자생물학에의 이해가 진전되기 훨씬 이전, 명징한 언어 체계가 아닌 정직한 직관으로 이미 붓다, 바르다마나 같은 대각성인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놓았을지도 모릅니다. 불가에 입문하여 평생을 정진 수련하는 스님들 역시, 해법을 구하셨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여튼 마음의 평안만큼은 진즉부터 확보하셨을 터입니다. 이런 분들께 한 번 정도는 저 아득한 근원의 의문을 여쭙고 조언을 구하는 것도 현명한 시도입니다.
"생물학자들과 티베트 승려들이 만나 생명과 죽음을 논하다!" 흥미진진합니다. 생물학자들이라고 해서 생명의 탄생과 사멸, 혹은 이후의 어떤 과정(그런 게 있다고 일단 가정한다면)에 대해 일반인들보다 깊은 통찰을 얻기에 딱히 유리한 지점에 서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며칠 전 93세의 나이에 말래이시아 총리로 북귀하여 "적폐 청산"에 시동을 건 마하티르(의사 출신입니다)는 젊었을 적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과학은 '어떻게'만 열심히 설명할 뿐, '왜'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렇다고 딱히 과학을 폄하하는 취지로 받아들일 건 아닌 게, 과학이야 본디 "왜"에 대해 설명할 이유가 없는 분야이기 때문이죠. 여튼, "어떻게"에 대해 다른 어떤 직업인보다도 할 말이 많은 이들이, 평생 동안 "왜"마 생각하고 탐구해 온 분들을 만난다면, 정말 흥미롭고 진지하며 유익한 대화가 이뤄질 법합니다. 당사자들도 당사자들이지만, 보는 우리들이 더 알뜰한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p92를 보면 앙드레 지드의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인간은 바닷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리 나아가지 않는 한, 새로운 대양을 발견하지 못한다." 사실 바닷가에만 서도 그 막막한 바다의 볼륨에 인간은 넉넉히 압도됩니다. 해안 지역에 이웃한 산악지대에 올라 바닷가를 내려다봐도, 어쩜 저렇게 엄청난 물의 더미가 저편에 뭉쳐 있나 하는 느낌에 사람은 누구나 아찔해집니다. 그러니 바닷가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노 저어 간다 해도, 인간은 그 대영의 깊이와 폭을 감히 직관으로 재지 못합니다. 대양 한가운데에서도 이곳이 대잉인 줄 모르는 게 인지의 한계입니다.
한계의 극복이란 자기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개체는 길어봐야 백 년을 살 뿐이지만, 인간이란 종(種)은 지금의 기본 틀을 갖춘 후에도 무려 이백만 년 이상을 생존해 왔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희생하여 자손을 낳고, 그 자손들은 부모 대(代)의 형편을 조금씩 조금씩 개선하여 이만큼이나 번듯한 외양과 내실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개체의 삶은 유한해도 종의 생육과 번성이 장구하고 성공적(현재까지는요)이었기에, 인간은 상상 속에서나마 불멸을 꿈 꿀 자격이 있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현명한 이기주의자가 되세요." 이는 다분히 리처드 도킨스의 유명한 인문 고전(그 책은 과학책이 아니라, 인문 분야의 명저라고 평가해야 마땅합니다)을 다분히 의식한 언명이겠습니다. "자기가 죽으면서 그 유전자가 생명의 순환 고리를 계속 돌 수 있으니(p95)" 개체의 유한한 발버둥으로는 감히 닿을 수 없는 경지를, 이미 종의 설계와 작동 매커니즘은 진즉부터 예비, 가늠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세균이 인간으로 환생한다?" 이 책의 저자는 첫째 불교의 사유 체계에 대해 그저 지적 호기심이나 건조한 교양 수준을 넘어 체질적, 정서적으로 교감, 몰입할 수 있는 분들이며, 다음으로 미국에서 손 꼽히는 명문대에서 정통으로 생물학을 전공, 교수하는 학자들입니다. 두 세계를 넘나들며 그 가르침의 정수를 다른 차원에서 음미, 탐색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이란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식 사고에선, 공감하고 교분할 수 있는 그 어떤 의식도 "다른 생명체로의 환생"이 가능하므로, 이론상 내생(來生)에 인간이 세균으로 다시 태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저자는 "의식(consciousness)"를 깊이 탐구하며, 이른바 세포의 항상성(homeostasis)와 이 개념을 연결지어 봤습니다. "대체 순환과 윤회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사실 천 수백여년 전 티벳 승려들은 지사에서 가장 현명하고 방대한 지식을 교습받아온 엘리트 집단이었고, 날란다 승원이라는 최고(最古), 최고(最高)의 대학에서 부단히 수련해 온 문명의 담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계승한 현재의 승려들 역시 지상에서 가장 오랜 지혜와 비의(秘義)의 수호자들이기에, 저자는 이분들께 현대 생물학의 정수를 가르치고 공유하는 작업이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다. 마치 구글이 인공지능을 개발하여, 유한한 인간의 연산 능력으로 채 알아내지 못한 각종의 시나리오와 묘수를찾으려 들듯이 말입니다. 일단 승려들이 생물학 원리의 심오한 정수를 습득하면, 그들의 깨우침은 보다 선명하고 더 깊은 곳을 향하겠으며, 이는 다시 평균적 인류의 정신 성숙으로 피드백, 선순환될 수 있습니다.
대체 불교와 생태학 사이에 어떤 유기적 관계가 있을까요? 책은 1980년대에 이탈리아 과학자들이 발견해 낸 "거울 뉴런"에 대해 짚고 넘어갑니다. 이 이슈는 과학 대중서, 심지어는 자계서에서도 워낙 인기 있게 다뤄진 터라 구태여 중등교과 과정에서 배운 적 없어도 누구나 입에 올리며 화제로 활용하곤 합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핵심 교의 중 하나가 "제행무상 제법무아"입니다. 사람은 자아, 개체에 집착해서는 결국 자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타인 타물에 활짝 열린 마인드를 가지면, 공감 능력이 향상될 뿐 아니라 나도 살고 남도 사는(live and let live) 윈윈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벌써 당대에 타인과 동족, 나아가 생물 보편과 공생할 수 있는 이는, 수직 차원(종족 번식) 이전 수평 범위에서 불멸에 한 걸음 다가가는 것입니다. 물론 덜 떨어진 분자는 생명과 화합이 아닌, 범죄에의 부화뇌동으로 일신도 망치고 남에게도 해를 끼치는데, 본인은 이 어리석음을 죽었다 깨어나도 모릅니다. 이런 자는 정작 필요한 공감 능력과 참여에 대해선 유전자가 태생부터 그리 조작된 듯 청개구리 행보를 합니다.
CBCT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cognitively-based compassion training의 약자로서, 이 책의 저자도 핵심적으로 참여하는, 바로 에모리 대학 소속의 핵심 프로젝트입니다. CBCT의 중요 성과는 특히 저자의 친구분(ㅎㅎ)인 계세 롭상 박사와 저자의 학술 동료인 찰스 레이전 교수 두 분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 책 후반부에서는 내내 "롭상과 척(찰스의 애칭입니다)"으로 불리니 유의해야겠습니다. 웹에서 자료를 찾으실 때는 Charles L. Raison으로 키워드를 삼아야 자료가 잘 발견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서양도 동양 문화도도 본연의 제 색깔을 유지할 때에야 가장 고도로 기능한다." 그래서 에모리 대학의 이 프로젝트를 두고 "오리엔탈리즘"이라며 거의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사실은 책 읽기 전 저부터도). 저자는 그런 반응도 다 예상했다는 듯, "다분히 낭만적인 편견과 윤색, 왜곡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라며 서양인의 눈으로 걸러진 미화나 곡해로 치닫지 않기 위해 각별히 신경을 쓰는 태도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Enlightened Gene"인데, 불교의 영어식 용어(번역)에서 부처님, 혹은 크게 깨달은 이를 두고 The Enlightened One이란 표현을 본래 씁니다. 사람이 진정 세상사와 자기 마음 가는 길을 거리낌 없이 이해하고 수용하며 원만의 경지에 이르려면, 장내 미생물이나 심지어 분자, 세포 단위까지 하나하나 깨달아 광명에 의해 밝아지는 체험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리수 아래에서 석가모니 부처님도 깨달음의 그날 그런 느낌이 아니셨을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