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 대신 권총을 든 노인
대니얼 프리드먼 지음, 박산호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제목은 "지팡이 대신 권총을 든 노인"이지만, 아주 정확한 압축은 아닙니다. 왜? 주인공 노인은 엄마 배 아프게 하고 태어나서 "두 번 다시 다른 장례식에는 갈 필요가 없을(본인 자신의 표현)" 죽음에 이르기까지, 몸을 의지할 지팡이 따위는 손에 쥐어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그런 위인이기 때문이죠. 모르겠습니다. 성질을 못 참아서 남(젊은이든 거인이든 뭐든)을 두들겨패기 위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걸 들어야 할 때라면 또.

지팡이 같은 건 생전 들 일이 없을 성깔 괄괄한 이 노인은 전직 경찰입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1970년대 후반 미국에서 큰 인기를 모았던 영화 <더티 해리>의 감독이 돈 시겔인데, 같은 유대인이기도 해서 우리의 주인공 버크 샤츠(그땐 노인이 아니었죠)에게, 이런 화끈한 형사의 성격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도 했던, 또 지금까지도 손자뻘 형사, 경관들에게 레전드로 통하는 대단한 이력과 평판을 남긴 분입니다. 예전 관용어 표현으로 "누구누구도 나 앞에서 할아버지라고 하고 갔다"는 꼭 그 문면이 그대로 적용될 만한 인생이었습니다.

이 사람 성격 보통 아니라고 잔뜩 세팅을 꾸미고 소설이 시작하는 게 아니라(그런 시도는 여태 많이 읽어서 새롭지 않습니다), 독자의 눈살을 약간 찌푸릴 만한 당혹스러운 에피소드로 대뜸 소설의 문이 열립니다. 하기는, 모르겠네요, 망자의 가는 길을 꼭 그 마음 편히 해 주려고 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 주는 게 꼭 의무는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고, 사안이 사안인만치 죽어도(....) 용서 못 할 일이 따로 있기도 하겠죠. 우리의 주인공 노인이 '유대인'이란 점도 감안은 해야 하겠습니다만.

이 소설이 발표될 무렵, 폴란드에서는 "나치의 황금 열차"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고 이의 조사를 위해 공권력 일부가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알고보니 놈들은 그저 강도였어." 나치가 그토록 집요하게 유대인을 말살하려 들었던 이유는, 1차 대전 패전 후 완전히 파산했던 독일의 거덜난 경제를 메꾸려 들었던 게 가장 큰 동기 중 하나라고까지 (노인의 입을 빌려) 작가는 말합니다만, 여튼 꼭 나치 아니라도 전쟁이란 "남는 장사"를 벌이기 위한 셈속이 대개는 크게 작용했던 게 맞습니다. 사방에서 약탈한 물자를 금괴로 바꿔 은닉한 후, 패전이 가까워오자 장교들이 저마다 몇 덩이를 꿍쳐 남미 등으로 은신했다는 음모론은 그간 꽤 인기 있게 퍼졌고, 일부는 아마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여튼 죽어가는 친구에게 "차마 못 들을 말"을 들었고, 본인 자신은 살 만큼 살았으니 새삼 무슨 물욕 같은 게 없지만(젊었을 때에도 없었을 것 같네요), 죽어가는 친구를 더 잡도리까지 해 가며 저승길을 재촉한(보기에 따라선 버크 샤츠 노인이 죽였다고도 볼 수 있는...) 터에, 원치 않게 금괴 추적 소동에 그는 말려들게 됩니다. "한심한 성직자" 캐릭터가 하나 등장하는데, 나쁜 습관(도박 중독) 때문에 교회 살림을 거덜내기 생긴 카인드 목사(의사가 아니라 신학박사)가 또 우연찮게 이 금괴 이야기를 듣고 가당치 않은 기대를 걸게 되며, 목사에게 도박빚을 받아 내어야 할 또다른 사람도 이 미친 모험에 동참하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일확천금의 꿈은 사람 여럿의 영혼과 실제 삶을 망쳐 놓기 마련인데, 앞서도 말했지만 가장 담담한 평정을 유지하는 건 가장 성질 급하고 과격한 이 노인입니다.

"버크"는 별명이고 노인의 별명은 "바루흐"입니다. 글쎄.... 기독교 외경(제2경전)에도 "바룩 기"가 있기도 합니다만, 여튼 클린트 이스트우드와는 크게 다른 점이 이 "curmudgeon"은 종교적 의무감은 별반 의식하지 않은 듯합니다만 유대인으로서 인종적 자부심은 엄청나다는 점입니다. 말빨도 장난 아닌데, 87세의 나이에도 "원래의 치아를 그대로 유지할 만한" 대단한 기력이고(기력 좋다고 꼭 이가 그대로 붙어 있는 건 아니지만), 아마도 그의 성깔과 언변은 이 범상치 않은 "이빨"에서 연원하는 게 아닐지 ㅎㅎ(말 그대로 이빨 좀 까는 노인이죠)

노인에게는 아픈 사연이 많습니다. 보통 이런 이들이 승진 고과에 유리한 실적은 잘 못 올리고, 자신이 속 시원해지는 사건만 집요하게 매달려 결국 "나쁜 놈들"을 잡아내는 그런 타입이죠. 전설로는 남았지만 일생을 윤택하게 보낼 만한 승진이라든가 다른 세속적 기반은 마련 못 했고, 독자들에게 충격인 건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기까지 했던 과거입니다. 마치 오베 아저씨를 연상케 하는 이분 곁에 그러나 "2차 대전 직후 후송되어 와서 5주 동안 코마 상태에 빠졌을 때" 곁을 내내 지킨 아내분이 있습니다.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넘어지기도 자주하고 그것말고도 건강이 좋지 않아 이제는 거꾸로 자신이 아내를 돌봐야 할 때가 많습니다. 노인의 거침 없는 언동에 웃음이 나면서도 이런 장면에서 콧등이 시큰해지기도 했는데, 이 소설의 매력은 이처럼 독자의 감정을 들었다 놨다 하는 과정이 꽤 자연스럽다는 겁니다. 장르의 공식은 그간 독자들에게도 다 밝혀졌기 때문에, 현대의 독자를 매혹하려면 뭔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풀리는 맛이 있어야 합니다. 어디서 본 듯만 해도 버크 샤츠 노인의 동선이 계속 흥미진진한 건 바로 이 때문이죠.

아들을 일찍 보냈지만 명문대에 재학 중인 손자가 있는데, 할아버지처럼 사람 본성을 꿰뚫어 보고 능숙히 다루는 재주는 없지만(그건뭐 당연하죠) 머리가 좋고 지식이 많아 이 노인과 좋은 요철 궁합을 이룹니다. 구글, 와이파이, GPS 따위가 뭔지 말만 들어도 (그 맑던) 정신이 혼미해지는 이 노인은, 이제 멀리 이스라엘 당국과도 접촉하여, 반 세기 전 국가, 종족 차원뿐 아니라 개인 레벨에서까지 원한을 쌓은 지글러란 전직 나치 장교를 추척하러 나섭니다. 노인의 나이는 공교롭게도 87세인데, 왜 저기 에이브러햄 링컨의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이 "four score and seven years..."로 시작해서 학교 교과서에서도 가르치고 문예, 영화에서 수없이 패러디되기도 하죠. 노인의 성향과 기질이 심지어 작중 배경의 나이에서까지 암시되기도 하는 터라 웃음이 나왔습니다(작중에서 노인은 88세 생일을 새로 맞습니다).

대개 장르소설은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정해진 경로만 걷습니다(그래서 장르소설이죠). 허나 이 작품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여튼 주인공 노인의 성격 일관성 구현을 위해 좀 불편한 사건도 대뜸 앞에 배치한다거나, 카인드 목사의 생각지도 않은 끔찍한 운명을 느닷 제시해서 독자들을 경악하게 만듭니다. "정보를 좀 찾아 보려고" 옛 직장(경찰서)에 들러 새파란 후배들과 반가운 만남을 갖기도 하지만, 노인의 과거에 묻혔던, 결코 죽음의 순간까지도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악감정을 대를 이어 물려준 그 망령(을 대변하는 다른 후배)과 매우 불편한 조우(오가는 말까지 아주 험악한)도 하게 됩니다. 이런 장치가 확실히 다른 작품에서는 못 보던 것이라 신선하기도 했고, 한편으로 왕년에 그렇게 유명하셨던 분(그렇게 적을 많이 만들고 현재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하다고 그 손자가 말하죠)이 노년인들 무난히 평탄하게만 보낸다면 그게 더 설득력 없는 소립니다. 대사 속에 쉴새없이 유머가 구사되기도 하는 터라 독자로서 장르 취지, 성격을 충분히 착각할 만합니다.

반 세기 가까이 세월이 지나며 인류는 그간 나치만큼이나 질이 나쁜 인류의 공적(公敵)을 적지 않게 접해왔습니다. 어쩌면 특유의 우둔함 때문에, 세차게 질서를 휘저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에 파멸해 버린 나치는 다루기 쉬운 적수였는지도 모릅니다. 노인은 세상을 선명한 선과 악의 가름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결코 타협하지 않아야 할 악이 존재하고, 이러한 악과 비루한 내통을 한 자는 평생의 지기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게 그의 흔들리지 않는 소신이고 기질입니다. 이런 변하지 않는 "꼴통 기질"은, 1970년대 대중이 그토록이나 열광했던 지조 있는 영웅 "더티 해리"의 성공 비결이기도 하고, 때로 나치 같은 더러운 손에 장악되기도 하는 "변치 않는 황금"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영어 표현에 "솔리드 골드"란 게 있는데,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노인의 정의감이라든지, 유머나 플롯 등 어느 면에서도 딱히 버릴 게 없는 소설의 (의외로) 탄탄한 내실을 두고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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