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츠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3
예브게니 그리시코베츠 지음, 이보석.서유경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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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생각에 젖을 때가 있습니다. "왜 이처럼, 시대를 앞서 가는 조류와 각성이 꼭 러시아에서 비롯할까?" 역사 중 그러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면 유일하게 공산주의 체제가 지배하던 구간이며, 심지어 이 시절에도 (지난번 리뷰에서 말한 것처럼) 디나 루비나 같은 빛나는 여성 작가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일각을 이끈 사례를 보기도 했습니다. 두 세기 전 활동한 고골의 단편들 역시, 지금 읽는 감각으로도 얼마나 모던, 아니 포스트모던한지 모릅니다. 멍텅구리 바보나 그저 제 하찮은 감각에 낯설다고 해서 당치도 않게 "예전 작품" 운운할 뿐이죠.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작가"란 직종은 따로 구별되지 않고, 만인 창작 만인 향유의 구조로 바뀔지도 모릅니다. 이런 게 꼭 좋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수련이나 소양이 불비한 채 그저 어리석은 대중에게 말초적인 어필이나 하는 영리한 통속물의 생산자나, 무책임한 선동가가 고작 득세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예브게니 그리시코베츠가 스스로를 일러 "현대 러시아 인문의 선구"를 자처하는 건 그래서 한편으로 마음이 든든합니다. 러시아 문학 같은 유서 깊고 뼈대 탄탄한 가문에 자격 있는 적장자가 출현한 셈이니 말입니다.

안톤 체홉의 단편 <약혼녀>가 대뜸 떠오르는 건, 꼭 등장인물 샤샤가 이름이 비슷해서만은 아닙니다. <약혼녀>애서 집안의 결정에 따라 알렉세이와 혼인하기로 정해진 나쟈는, 한편으로 나의 인생이 이렇게 타의에 의해, 다른 어떤 가능성도 꽃피워 보지 못한 채 고정된 궤도만 운행하는 게 과연 올바를까 하는 깊은 회의에 잠깁니다. 이 나쟈에게 "당신 생각대로 의지대로 해 보세요!"라며 마치 남자 팅커벨처럼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히치콕 감독의 <서스피션>에서와는 달리, 나쟈는 대단히 파격적이고 과감한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러운 미래를 꾸려 갈 수 있었지만, 아마도 많은 경우 현실은 나쟈 아닌 리나의 경로를 따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샤샤는 이혼남입니다. 대도시에서 그러저럭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었으나 이혼 후 실의와 회의에 젖어 낙향하는 이들은 종종 봤지만, 샤샤처럼 반대로 기존의 터전을 떠나 모스크바 같은 대처로 이전하는 건 처음 봅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시골, 중소도시를 떠나는 건 차라리 흔해도, 샤샤는 "거대한 모스크바"에서 오히려 그 빈곤하고 틀에 박힌 가능성의 영양실조에 몸부림을 칩니다. 허나 독자인 제 생각에, 이런 샤샤의 호들갑은 그저 에고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호들갑, 혹은 사전 정지 작업에 가까웠던 듯합니다. 실제로 그는 "기적과도 같이" 그녀를 발견했기 때문이죠.

기적과도 같이 발견한 그녀와 함께, 샤샤는 전혀 새로운 일생의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을까요? 혹시 이 작가 예브게니 그리시코베츠를 영화에서 보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분은 사실 무대에 더 자주 서는 배우이고, 출연한 영화는 러시아 영외에서 잘 상영되지 않습니다만(흥행 전망이 불투명하니 당연하죠) 운 좋게 몇 년 전에 개인적으로 한 편을 감상한 적 있습니다. 이분이 어떤 배역을 맡든, 그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배역보다는 배우 자신의 이미지가 관객한테 깊이 다가와서 박힙니다. 소설을 읽으며 소심한 주인공 샤샤가 지금 뭘 말하려는지 감이 안 오는 분들은, 한번 그의 영화를 구해서 연기를 구경해 보십시오. 샤샤가 꼭 그리시코베츠의 페르소나 같아서 지금 하는 말입니다.

잘 차려입고 즐겁게 외출하려는 찰나 꼭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청하는 고향 친구에 대한, 약간 죄스러운 짜증 경험해 보신 적 있습니까? 제 생각에는 이 소설 속에서 "현실"을 대변하는 건 친구 막스와의 소통과 접촉뿐입니다. "기적처럼 만난 그녀"는 과연 현실이 맞을까요? 전처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생의 동력 주요 부분이 꺼져 버린 샤샤에게, "기적"은 그런 현실을 탈피할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 정도 아니었을까요? 기적과 유쾌한 도락은 사실 샤샤가 "잠" 속에서만 체험할 수 있었고, "현실"은 따분하고 부담스러운 친구 막스와의 접촉이 고작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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