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과 변명의 인질극 - 사할린한인 문제를 둘러싼 한.러.일 3국의 외교협상 전쟁과 평화 학술총서 2
아르고(ARGO)인문사회연구소 지음 / 채륜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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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낯을 들 수 없는 부끄러운 문제가 있습니다. 이족(異族)으로부터 식민 지배를 받은 역사도 치욕적이기는 합니다만, 그보다 더 죄스러운 건 어떤 경로로건 식민 통치가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체제에 끌려가 온갖 고생을 한 동포들을 되돌아오게 하지 못했고, 아예 그런 일이 없는 양 까맣게 잊고 딴청을 피웠던 그 오랜 역사입니다. 미국은 여튼 자기 국적을 가진 "국민"들을 송환하기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않고 나서지 않습니까. 식민지로 떨어진 부끄러운 내력보다 더 심각한 죄의식을 가져야 할 게 바로 "동포에 대한 나몰라라식 방치"입니다. 이는 소위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이슈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분들은 엄연히 피해자인데도 일인도 아닌 동족에 의해 손가락질 당할까봐 그 오랜 세월 동안 숨어 사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 책은 어쩌면 우리 현대사의 진짜 아킬레스 건이라 할 사할린 동포 송환 문제에 대해, 국내에서는 거의 최초라 할 만큼 진지한 접근을 시도한 연구서입니다. 본격 연구서라서 현대사, 그 중에서도 2차 대전 후반부에 대한 소양이나 (이른바)북방 영토 문제에 대한 이해, (한국인이라서 당연하기는 하나) 식민 지배 기간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 어느 정도는 지식이 있어야 무리 없이 읽어갈 수 있습니다. 허나 좀 묘한 건, 설령 지식이 없어도 사명감이나 역사에 대한 죄의식만 갖춘 독자라면, 오히려 이 책으로 첫걸음을 떼어가며 공부를 할 동기, 수단도 마련할 수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제 주변에 그런 독자가 하나 보여서 하는 말이고요. 그 까닭이라면, 연구서라는 본분 외에 저자들께서 각별한 사명감으로 필치를 잇고 지면을 채우셨기에, 문외한인 독자에게도 어느덧 그 진의가 전해져, 무지와 자격의 결여라는 먼 도랑을 건너게 해 주는 일종의 다리 구실을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소련이 붕괴하고 나서 세계의 역사학자들에게는 대략 20년 전, 하나의 보물 창고, 크리스마스 선물 보따리가 왕창 주어졌는데, 그게 바로 구 소련 기밀 문서의 공개입니다. 한국전 발발 책임 소재에 대해서도 그간 남침설, 남침 유도설, 북침설 등 온갖 입장이 난무했으나, 저 사건(과 그로부터 얻을 수 있던 자료)을 계기로 특히 한국의 박명림 교수가 거의 확고부동한 정설로서 "남침설"의 기반을 세운 적 있습니다. 저는 이 책도, 사할린 한인 강제 억류 경위에 대한 가장 믿을 수 있는 입장으로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 분야 연구 성과 역시 마땅히, 늦어도 십수 년 전에 이 정도가 달성되어야 했으나, 워낙 관심들이 적고 관련 여건이 열악하다 보니 이만큼이나 늦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만시지탄의 느낌이 있으나 이런 알차고 멋진 연구서가 지금이라도 나왔다는 데에 큰 의의를 두어야 하겠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께 여쭤 보면, 해방 후 38도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의 경우 그렇게나 군기가 문란하고 미개인 같은 모습이었다고 하죠. 이래서 특정 연령층의 경우 소련에 대한 이미지가 (이후 반공 교육 등과는 무관한 별개 팩터 때문에) 매우 좋지 못한데, 이는 예컨대 베를린 함락 이후 대거 자행된 집단 성폭행이라든가(이런 걸 합리화하는 인간 쓰레기들도 있습니다), 어디서든지 비슷하게 노출되기 마련인 한심한 행태들 때문에 세계인들 사이에 대략 사정이 비슷합니다. 그런 삼류 체제와 민족에 의해 반 세기 넘게 지배를 받은 헝가리, 체코, 폴란드 등이 불쌍할 뿐이죠. 헌데 냉전 체제라는 게, 각각의 영역을 존중하자는 양(兩) 초강대국 사이에 공통적으로 책임이 지워지는 거라서, 미국 쪽 잘못도 없다고는 못 합니다. 동유럽 공산권은 미국이 조금만 도와 줬어도 언제 붕괴했을지 모르는, 매우 취약한 체제였던 겁니다.

제가 이 말을 왜 하냐면, 이 사할린 동포 송환 문제 역시, 해방 이후 한국 정부에서 약간의 성의만 보였던들 그분들이 그렇게나 오래 낯선 이방에 억류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이 책의 충격적인 결론 때문입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흉악한 적국의 마수를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어서, 그 오랜 세월 동안 문제를 가슴 아프게 방치한 게 아니라, 치졸하고 구차한 잔머리를 굴리느라 그 많은 동포들, 즉각 모셔왔어야 했을 우리 겨레들을 내팽기치고 있었으며, 이는 부작위범도 아닌 사실상 작위범의 소행, 사보타지나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제가 그 세대야 아니지만 읽으면서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이건 남의 겨레를 험지에 잡아간 일본인들의 만행보다 더 악질이라고 말이죠.

지금까지 사할린 동포 억류에 대한 통설은, 물론 소련 당국이 강제로, 어떤 필요에 의해 잡아두고 있었다는 게 지배적이었습니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에게 여쭤 보면, 왜 2차 대전 이후 소련이 갑자기 과학 기술 수준이 발전했느냐에 대해(핵무기도 만들고 우주 개발에도 앞장 서고), 종전 후 독일 과학자들을 대거 납치하여 그런 비약, 성장을 이뤘다는 대답이 보통이었습니다. 이는 아주 근거 없는 건 아니고, 실제로 베를린 점령 후 단지 자원과 지원이 부족해서 답보 상태에 머물던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공산주의 체제에서 지도부의 재량으로 마음껏 돌려 쓸 수 있는 국가의 후원을 바탕으로 놀라운 성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판타지이긴 하나) 영화 <젠틀맨 리그>에서 살짝 배경이 바뀐 채 언급되죠.

이 책은 그런 통설에 대해 여러 근거를 들며 그 바탕을 헤집어(undermine) 놓습니다. 우선 여태의 상식은, 광대한 영토에 비해 노동력이 부족했던 소련이 이를 확보하기 위해, 비적성 국가의 인력을 잡아다 놓고 활용했다는 쪽이었습니다. 그런데 책에서는 소련의  입장이 생각보다 아주 복잡했다고 전합니다. 군부에서는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북으로 보낼 것을 주장했고, 사할린 지역 정부에서는 잔류를 고집했다는 거죠. 책에서는 또한, "인력 활용을 위한 목적이라면 보다 교육 받고 우수한 직능을 지닌 체류 일인들은 (패전국이니만치 다루기가 더 쉬웠을 텐데도) 왜 그리 일찍 송환시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까 언급했던 "독일 과학자 문제"와도 맥이 닿은 이슈이지요.

책은 구 소련 외교 문서뿐 아니라, 근래 들어 시효 기간이 지나 하나 둘 공개되기 시작한 한국 정부 문서를 참조하여, 사할린 동포들이 돌아오지 못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낱낱히 해부합니다. 일단 이들이 한국(남한)에 돌아올 시, 거주 자활 공간의 마련이라든가, 경제적 지원 문제가 아주 난감했다는 겁니다. 사정은 뻔합니다. 당시는 한국 국내 인구조차 부양할 형편이 못 되어, 아이를 하나만 갖자느니 가족계획을 엄격히 시행해야 한다느니 세계 인구 밀도 몇 위라느니 하는 정책 홍보가 상당히 강압적으로 국민들에게 다가왔으니까요.

한국 정부는 묘한 잔머리를 굴렸는데, 일본더러 이들을 일단 "일본 영토 내로 불러들이고, 그들에 대한 피해 배상도 일본 정부가 알아서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아주 이치에 닿지 않는 주장은 아닙니다. 사할린 일대는 당시 일본이 영유하거나 강제 점거하던 형편이었고, 이들을 징용, 징병 등의 명목으로 끌고 간 직접 주체도 일본이었으니 말입니다. 여튼 일본이 이를 수용할 리도 만무했습니다. 그들은 일본 내 거주하는 "자이니치" 관련 문제도 마지 못해, 위선적으로, 피상적으로, 건성으로 다루던 판이었고, 재일 동포 일부는 북한으로 송환했다가(속으로 얼마나 앓던 이가 빠진 듯 후련해했겠습니까) 문제를 빚기도 했죠. 어쩌면 이는 현안을 회피하려는 양국의 "자고 치는 고스톱"에 불과했던 겁니다.

책의 제목은 "책임과 변명의 인질극"입니다. 인질극에는 책임을 져야 할 악한이 있고, 가슴 태우며 경과를 지켜 보는 피해자의 가족이 있습니다. 헌데, 피해자의 가족이 어떤 이유에서건 인질범과 내통하여 인질의 고통을 내내 증가시키거나 방관했다면,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불편한 진실은 애써 외면한다고 해결될 게 아니라, 관련 당사자들이 모두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야 합니다. 책에 보면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이후 록히드 스캔들로 사임합니다)의 유감 표시가 잠시 언급되는데, 어째 역사는 이 시절보다도 더 도덕성을 상실하고 후안무치해져가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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