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의 역사 - 인간이 묻고 신이 답하다
리처드 할러웨이 지음, 이용주 옮김 / 소소의책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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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여튼 제한된 인지(人智)로 세계를 이해하려 애 쓰던 인류의 위대한 과거 발자취 중 하나입니다. 그뿐 아니라 본능과 충동을 조절하고 도뎍률을 정신 속에 심어 줌으로써 보다 오랜, 그리고 질적으로 수월한 개체와 종족의 생존을 도모해 준 유용한 제도이자 장치이기도 합니다. 비록 고유의 기능을 (그간 개발된) 다른 제도와 체계에 빼앗기긴 했으나, 여전히 인구의 많은 수가 이에 의존하며, 따라서 종교가 무엇인지 깊이 탐구하는 건 곧 우리 존재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열심히 들여다 보는 발돋움도 겸하는 것입니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인간과 종교의 역사!" 영어로 하면 undisputed일까요? ㅎㅎ 사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이 분야 결정판 레퍼런스북이 나오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아니, 기다린다고 나오기나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책의 저자 리처드 할러웨이 주교(성공회)님의 면면을 보고, 또 제법 두꺼운 책을 읽어 보면, 특정 교파에 소속된 성직자로서 이만큼이나 공정한 논조와 엄정한 근거를 들어 이 주제를 논하는 게 과연 앞으로 또 가능할지. 그 품격과 완성도의 수준에 아무 "논쟁의 빌미"를 보태고 싶지 않습니다. 일반인의 교양을 위해, 또 종교학과 신입생의 학문적 발판 마련을 위해, 이보다 더 풍성하고 균형 잡힌, 유익하기까지 한 서술은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모한다스 "마하트마" 간디를 모르는 이는 없으나, 정작 그가 신봉한 종교가 무엇이었는지 물어 보면 그리 쉽게 대답이 안 나올 듯합니다. 자이나 교 인데, 이 종교는 석가모니(싯다르타)보다 이른 시기 바르다마나 라는 대 성인에 의해 창시되었습니다(한자로는 대웅[大雄] 즉 위대한 영웅 정도로도 번역되는데, 불교의 대웅전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나 불교의 "대웅"은 여튼 석가모니를 가리키죠). 살생을 절대 금하고 청빈을 강조하는 점에서 불교와 비슷하나, 특히 옷을 걸치지 않고 살 것을 교리 일부로 삼는 게 특이하며, 현대에 와서는 이 교리가 많은 타협 속에 완화된 편입니다.

책에는 특히 "아네칸타바다"에 대해 긴 설명이 나오는데, 우리가 흔히 "장님 코끼리 만지기"로 알고 있는 그 지혜와 관련된 것입니다. 자이나 교에서는 이런 인지의 제약 현상을 두고, "우리 실존의 한계 때문에 지식의 한계가 빚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사실 지식의 한계는 수 없이 많은 인간사의 문제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다만 지식의 첨단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마주칠 때 비로소 그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나는 것뿐입니다. 이런 한계를 통감하고 나서야 인간은 존재 초극의 문제를 비로소 직시하며, 종교에 귀의한 후에야 영원한 난제,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늦게나마 깨닫습니다.

"예언자"란 누구일까요? 이 책은 물론 "종교의 역사"를 다루었고, 따라서 대체로는 시간 순으로 사항을 배열하고 설명하는 체제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규약에 얽매이지 않고, 예컨대 이 책 제10장처럼 "예언자들"이란 항목을 따로 분리하여 독립적으로(초시간적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주교님의 인상적인 설명은, "그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는 사람(foreteller)이 아니라, 앞서서 말하는 사람(forth-teller)이다."라는 부분입니다. 포어텔러라는 건 우리말로 점쟁이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어감입니다. 그러나 포스텔러는, 선각자, 선구자의 개념과 오히려 잘 통하죠.

예언자는 전통적으로 헤브라이즘에서 군주와 별개로 작동하는, 성(聖)과 속(俗)이 분리된 사회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또다른 축으로 기능했으나, 사회에서 언제나 존경만 받았던 건 아닙니다. 때로는 기이한 행적과 언동 때문에 조롱을 받기도 했는데, 책에 나오는 다윗의 선임 군주인 사울의 경우 이 경계를 공연히 넘다 "사울도 예언자의 하나더냐?" 같은 핀잔, 빈축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언자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 왜 군주가 품위, 본분을 잊고 예언자 흉내나 내느냐는 뜻이죠. 아무튼 저자인 주교님이 가장 뚜렷하고 전형적인 예시로 드는 건 밧세바를 취했던 다윗에게 나아가 직언했던 나탄입니다. 사실 이야말로 모든 예언자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나왔으니 헤브라이 본명이 사울이기도 한 바울이 또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정 종교의 입장을 떠나 (신학이 아닌) 객관적 종교학의 견지에서 바라본 중 첫째로 꼽히는 인물은 단연 이 바울입니다. 예수는 그 역사적 실존조차 의심을 받을 때가 있으나, 바울은 자타가 공인하는 기독교의 교단적 시조이며 이론가이자 아키텍트입니다. 유목민들에게 있어 "텐트"가 얼마나 중요한 물품인지는 새삼 설명이 필요 없을 텐데, 그는 이 필수품의 제조와 유통을 통해 큰 부를 모은, 세상사에 너무나도 밝은 비즈니스맨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 종적조차 몀확지 않고 현실에서 처참히 패배한, 예수라는 젊은이의 가르침에 매혹되어 그토록 극적인 회심을 보였으니, 초기 기독교가 지중해 세계에 몰고온 청신한 기풍과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능하죠.

현재까지도 신도들의 높은 충성도와 교리에의 헌신을 유지하고, 신도 수만 따져도 세력이 대단한 종교는 단연 이슬람입니다. 특히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은 입으로 암송했을 때, 특정 대목에서는 반드시 법열을 느끼며 무아지경에 들기도 한다니 해당 종교를 믿는 이들에겐 실로 대단한 영적 체험이 아닐 수 없고,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 전에 종교적으로나 정치적, 군사적으로 뚜렷한 업적을 남기고 간 그 "예언자"에 대해 새삼 경의를 갖게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꾸란에는 아름다움과 위안이 있다."

그러나 꾸란 속의 알라, 혹은 예언자가 대신 전하는 유일신의 목소리에는 그저 안온한 평화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예언자 모하메드 자신이 뛰어난 전략가이자 전사이기도 했는데, 이는 교리가 용납지 않는 불의, 패륜에 대해선 불 같은 진노와 징벌을 내린다는 뜻이고, 이게 바로 저들이 말하는 성전, 지하드입니다. 이 분야를 가리켜서 "투쟁의 신학 그 기원"이라고도 하는데, 제국주의가 세게를 휩쓸 무렵에도 서유럽에서 유독 이 이슬람의 전투적 성격에 주목했습니다. 기독교와는 대조적이라는 뜻인데, 기독교가 서세 동점 상황에서 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진행 중이긴 하나, 그 중 극단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비판한다 쳐도 이슬람의 교리에 대해서는 특이한 점이 여럿 눈에 띈다고 할 수 있죠. 예수는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고 했는데, 저 예언자는 교리로서 전쟁을 합법화했고 자신 역시 무엇이 바른 행동인지 스스로 생전에 추종자들에게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성공회가 이무리 로마 가톨릭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고 하나 엄연히 프로테스탄트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공유하는 교파입니다. 따라서 마르틴 루터는 성공회에서도 높이 받드는 큰 위인이며, 특히 저자는 "성경에 대한 발견"을 그의 가장 큰 공로로 꼽습니다. 유머러스하게도 저자는 "그가 나오기 전에는 성경책이 무슨 분실이라도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하며, "오로지 성경"이라는 핵심 원칙을 마르틴 루터가 새삼 기독교인들에게 환기시켜, 종교와 교회의 참된 자세를 일깨우고 이후 오백년이 지나도록 개신교가 고유의 원칙을 잃지 않게 이끌었다며 의의를 부여합니다. 당연한 말로 여길 수 있으나 위인이 핍박을 이기고 어떤 모범을 보이기 전까지는 이 당연한 게 다연하다는 듯 통념과 확신이 자리를 못 잡습니다. 또한 저자는 "성경의 발견" 못지 않게, "거대한 권력과 얼굴을 감히 마주할 수 있는 자유로운 개인의 옹호"를 중요 업적으로 듭니다.

이른바 주요 종교가 근세 초입에 자리를 잡은 후에도, 성장과 탄생을 멈춘 듯 보였던 종교 교단은 끊임 없이 새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제는 세계 대표 종교 중 하나로 어엿이 평가 받는 시크 교의 경우 그 신도들의 대단한 경제력과 건실한 풍속 때문에 특히 주목받는데, 서평 맨 위에서 예시한 자이나 교도 그 사정이 (양적인 교세는 다소 작으나) 비슷합니다. 역시 이 저자분의 진짜 장기는 이후 신교도의 다양한 분화를 설명하는 곳에서 제대로 드러나는데, 웬만큼 종교 관련 소양이 깊어도 도대체 재세례파, 청교도, 감리교, 장로교의 구체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이들 외 어디까지를 이단으로 잡고 경계해야 하는지 시원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이는 매우 드물겠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사회적으로 확립된 평판을 지닌 교단에 (혹 몸을 담는다 해도) 담아야 한다고 여기지만, 기성 거대 종교가 과연 제 소임을 다하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견이 엇갈리죠. 종교의 역사를 차분히 개관하는 작업은, 곧 바른 종교상이 무엇이며 종교의 초심이 어떠해야 하는지 재확인하는 결과로도 이어집니다. 신자 비신자를 가릴 것 없이, 근본의 원칙과 시야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돕는 멋진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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