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인물 열전
소준섭 지음 / 현대지성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은 세계 그 어느 문명권보다 유장한 역사를 가진 고장입니다. 역사가 길면 해당 역사가 배출한 인물 또한 많은 게 당연합니다. 이 무수한 인물, 인걸 들 중, 어느 누구에 특히 주목하여 현재에 되새기고 현창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지는, 안목 있는 전문가의 도움을 따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천여 년 전 세계 최고(最古)라 할 체계적 역사서를 집필한 사마천의 경우, <열전> 파트를 따로 두어 고금의 인물 중 그 찬연한 족적 또는 흉악한 죄업으로 후대인들에게 각별한 경각의 대상이 될 만한 인물들의 생애를 멋진 필치,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체제에 맞춰 정리한 바 있습니다. 이 모범을 근간으로, 후대의 정사서 집필, 편찬진들 역시 반드시 "열전"을 기전체 사서의 필수 요소로 편입하여, 살아 있는 역사의 핵심 추동력인 "인물"을 집중 조명하곤 했습니다.

현대에는 중앙 정부가 역사 편찬에 간여하여 정(正)과 사(邪)의 관점과 체계를 가르지는 않습니다만, 역시 신뢰할 수 있는 필자의 솜씨로 정제된 "열전"이 필요하다는 사실만큼은 불변으로 남습니다. 소준섭 선생의 이 책은 제목에도 "열전"이란 어구가 들어갔을 뿐 아니라, 내용과 형식, 혹은 인물을 엄선하는 안목 역시 역대 중국 정사서 저자들의 그것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할 명저입니다. 단 한 권으로 중국 인물사 퍼레이드를 일별, 조감하기에 이보다 더 요긴하고 권위 있는 참고서도 아마 찾기 힘들 듯합니다.

"유(儒)"란 무엇인가? 저자는 너무나 친숙하면서도 그 뜻이 모호하게 다가오는 이 개념을 두고, "중국 고대시대에 일정한 문화지식을 소유하고, 예(禮)를 이해하고 있으며, 관혼상제 등의 의식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을 총칭"한다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민간 서민으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한참 후대 한 고제 유방이 항적과 겨룰 무렵 유자(儒者)를 멸시하며 "썩은 선비"라고 일갈했을 때도 바로 이 직업 집단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을 텝니다. 헌데 저자는 이 유림을 살피는 과정에서 공자, 맹자, 그 이전의 주공 등을 분석하며 비할 데 없는 사상적 탁월함도 짚지만, 시대정신으로서 한계도 똑바로 응시합니다.

"刑不上大夫 禮不下庶人"

"형벌은 위로 대부에까지 미치지 않고, 예법은 밑으로 서민들에게 이르지 않는다." 예가 서민에게 이르지 않음은 첫째 평민들에게는 번거로운 예법을 준수할 의무를 면한다는 뜻도 되고, 동시에 예법을 지키지 않는 서민에게 합당한 존중을 베풀 필요도 없다는, 계급 차별 의식의 선포이기도 합니다. 공자 자신은 서민들에게도 예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p66), 후대의 유교는 법의 융통성을 빙자한 자의성(姿意性)을 오히려 강화함으로써 시대에 역행했다고 저자는 비판합니다. 저는 이처럼, 중국사의 전형적, 통속적 관점에 전혀 맹종하지 않고, 현대 한국인의 비판적 시선으로 중국사를 통찰하는 저자의 주체적 안목이 참 존경스럽더군요.

항룡유회(亢龍有悔). 지위가 높이 오른 자는 반드시 근심이 있다는 뜻인데, 명문 거족 출신으로 학식도 높고 재능도 뛰어났던 자로서, 진 효공의 눈에 들어 인신으로서 누릴 수 있는 극한의 영화를 모두 맛봅니다. 허나 일찍이 그 후계자인 태자 영사에게 밉뵌 바 있어, 혜문왕 즉위 후 비참한 도망자 신세가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다 마침내 자신이 강화한 통행법 규율의 희생자가 되고, 급기야는 거열형에 처해집니다. 중국 역사는 이처럼 엄혹한 실정법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유가의 다소 느슨한 규율, 융통성을 따르느냐의 갈림길에 선 적이 많은데, 법가의 추종자들이 대개 말로가 좋지 못합니다. 마치 현대사에서 파벌을 형성하여 반대파의 축출, 탄압에 열심이던 장칭 같은 이가 법정에서 치욕적 선고를 받고 몰락한 예와 비슷하죠.

사대부가 몰락하는 것도 한순간이라서, 예컨대 "중국 최초의 과학자"로 평가 받는 장형(張衡)의 경우 본디 명문가의 핏줄이었으나 부친 대에 급락한 가세 때문에 초년 고생이 매우 심했다고 하는군요. 이 시대 지식인들이 보통 그렇지만 장형 역시 (후대인들이 주목하는) 과학 분야에만 정통한 게 아니라 사장의 창작에도 특출한 소양을 보였으며, 몰락한 가세에도 불구하고 효렴 추천을 여러 번 받을 만큼 문인으로서의 자질, 사회 지도층으로서의 행실 등에서 매우 빼어난 인재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과거제 같은 선발 시험이 도입되기 오백 년도 훨씬 전입니다. 다산이 경전, 시문뿐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능했던 것처럼, 장형 역시 설계와 발명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뽐냈는데, 이를 가리켜 중국인들은 목성(木聖)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허섭쓰레기가 주제도 모르고 과학을 사칭하며 허황된 낭설을 늘어놓는 요즘, 참으로 만인의 귀감이 될 만한 위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한 문제의 치세에 총애를 받아 무려 화폐 주조권 같은 큰 직책을 사사로이 점하고 전횡할 수 있었던 등통이란 자의 행적도 재미있습니다. 업무에 무능하고 오로지 윗사람에게 어설픈 아첨을 늘어놓는 외에는 아무 재주도 없던 등통은, 황제들이 종종 앓던 피붓병인 종기를 두고 자신의 입으로 고름을 직접 빨아내는 단세포식 과잉 충성을 즐겨 보였습니다. 그 결과는? 그 한심하고 속보이는 처신에 염증을 느낀 후계자 경제의 즉위 후 바로 가산을 적몰당하고 내쳐져 하늘 타령이나 일삼는 실업 거지로 떠돌다 목숨을 잃는 한심한 꼬락서니였죠. 요즘도 이런 사람은 드물지 않게 보곤 합니다.

당 태종이 위대한 이유는 바로 방현령이나 위징 같은 명신을 곁에 두고 국정의 핵심 인재로 부릴 수 있었던 그 큰 도량과 안목에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당 태종 이세민이 천하를 통일한 후 창업과 수성 중 어느 편이 더 어려운 과제인지를 두고 두 명신과 의견을 주고받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방현령은 창업을, 위징은 수성의 어려움을 더 강조했죠. 솔직히 이런 질문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가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모든 이가 "그 정도는 나도 생각해 둔 바 있다"며 논의에 끼어들 만큼 대중적인 주제이며, 잡된 실직자조차 사마천을 거명하며 한 마디 정도는 거들 수 있기에 소모적인 논쟁이 그치질 않는 거죠. 당 태종은 과연 거인, 명군 답게 딱 적절한 시점과 단계에서 논의를 종합하고 일을 마무리합니다.

당 현종은 저자의 평가에 따르면 기이하게도 명군과 암군의 면모가 동시에 존재하는 묘한 군주입니다. 초기 28년은 "개원의 치"라 하여 그보다 더한 태평성세가 없을 만큼 매끄러운 정치가 이뤄졌는데, 이후 양귀비와 그의 척족이 득세한 후에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망국 직전까지 나라가 몰렸습니다. 일개인의 처세도 가장 잘나갈때 발걸음을 조심헤야 후환이 없다고도 하며, 이런 패턴은 이때로부터 약 180년 전 양 무제의 통치 기간 중 추세 변화와도 비슷합니다. 초반에 극히 안정된 정치가 이뤄지다 급속한 몰락이 뒤따르는 건, 일단은 통치자의 자만과 방심에 기인합니다. 다음으로는 한번 정착하고 안정된 시스템이 이후의 상황 변화에 대응을 못 할 만큼 낡았는데도 관료층이 이를 간과하는 탓이 큽니다. 책에서는 전반기의 세도가 이림보의 부덕한 행실에 비판의 초점을 맞춥니다.

당이 몰락한 후 오대(五代)가 중원의 패자로 군림했으나 어느 하나도 중국인의 자존과 위신을 세우지 못하고 지리멸렬했습니다. 그 중에는 여러 임금을 섬기고 심지어 성씨가 다른 조정도 누대로 섬긴 풍도 같은 인물도 있었는데, 왕안석은 이후 그를 두고 "살아 있는 부처"라고까지 평했으나, 현대 중국인들, 또 저자의 평가는 천하에 둘도 없는 간신이자 민족 반역자라는 쪽입니다. 우리 역시 저런 주관 없는 처신으로 제 몸을 욕되게는 하지 않는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하다 하겠죠. 풍도처럼 출세나 축재나 다 이루고서 욕을 먹어도 먹으면 그나마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말입니다.

조광윤은 그가 섬기던 군주(후주의 시[柴] 세종)의 아들 종훈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권좌에 올랐습니다. 대개 양위는 피의 숙청을 동반하는 게 중국사의 정석이다시피했으나 이 왕조 교체는 어떤 정치 보복도 뒤따르지 않은, 거의 미담에 가깝기까지 한 모범 사례입니다. 조광윤은 또한 전대의 당나라가 절도사들의 할거 발호로 망국에 치달았음에 착안, 이른바 배주석병권을 통해 부하들의 무력을 성공적으로 해제시킨 고사로 또 유명합니다. 이처럼 송나라의 초반은 덕을 바탕으로 한 정치가 최고통치자의 솔선수범으로 인해 가능했습니다.

각각 구법과 신법의 옹호자인 사마광과 왕안석은 어느 하나를 선하고 악하다 분별하기 어려울 만큼 그 나름의 위대성을 갖춘 인물들입니다, 먼저 책에서는 6대 신법을 도입하여 적폐를 청산하고 국가의 재정을 일신한 왕안석의 개혁을 소개합니다. 한동안 그의 개혁 행보는 나라를 망친 주범으로 지탄받았으나, 무려 천 년이 지난 후에야 그의 혜안이 사가들로부터 새삼 주목받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책 앞에서도 그런 서술이 있지만, 맹자는 유가의 오랜 계보 중에서도 혁명 지향, 개혁 성향이 유독 강한 인물입니다. 사마광은 이 맹자에 대해서조차 지나친 면이 있다며 다소 꺼리는 기색도 노출할 만큼 보수 성향으로 기울었습니다. 명저 <자치통감>의 저술이란 업적도 퇴색게 할 만큼 유감스러운 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 태종에게 방현령과 위징이 있었다면 천 년에 한 번 나오기가 힘들다는 칭기즈칸에게는 야율초재가 있었습니다. 몽골 관리들이 중원 일대를 초원으로 만들고 중국인들을 도륙하자고 했을 때, 그는 극간하기를 농경 인구를 살려 두고 그들로부터 조세를 징수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논거를 들어 참사를 피했습니다. 야율이라는 성씨를 봐도 알 수 있듯, 그는 멀리 요나라 시절부터 왕족의 혈통이었고 여진족의 금나라 조정에서도 그의 선대들이 승승장구했을 뿐 아니라, 이제 몽골의 천하가 열리자 다시 자신의 인품에 칸이 반하게 만들어 세계사의 큰 줄기를 바꿔 놓기까지 한 것입니다.

마오는 일본과의 항쟁에서 불굴의 투혼을 보였으나, 막상 통일된 인민 공화국을 일군 후에는 대약진운동, 문혁 등 파멸적인 행보를 취해 국가를 오히려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런 마오의 과오를 보완한 인물이 바로 저우언라이 같은 명재상이고, 그 뒤는 덩샤오핑 같은 실용주의자가 이념에 눈 멀지 않고 똑바로 현실을 본 후 오늘날 G2로 일컬어지는 대국 도약의 발판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처럼 뛰어난 인걸들이 즐비하게 이어져 오늘의 영화를 만든 중국사는 확실히 남이 쉽게 넘보지 못할 어떤 저력 같은 게 돋보입니다. 우리는 첫째 강대국 중국의 본질과 생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의무가 있으며, 둘째 숱한 인물들의 명멸과 부침 속에 무엇이 인간 처세의 바른 길인지 냉철히 검토할 절실한 필요가 또한 있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