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의 정치학 - 권력이 강한 사람에 맞서 어떻게 스스로를 방어할 것인가?
잭 고드윈 지음, 신수열 옮김 / 이책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권력이 강한 사람에 맞서 어떻게 스스로를 방어할 것인가?" 아무래도 어느 조직이건, 사회의 어느 부문이건 갑(甲)보다야 을(乙)이 더 많은 게 엄연한 현실이므로, 이런 질문에 대해 "나 역시 그게 궁금했어."라며 동감 혹은 호기심을 가질 독자가 많을 듯합니다. 현재  저 질문에 대해 저자 자신의 체험이나 팁 등을 바탕으로 조언을 들려 주는 다른 책들도 적지 않게 출간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그런 책들은 현장에서 그대로 써먹기에는 좀 무리겠다 싶은 제안을 하거나, 실망스럽게도 "그저 체념하고 강자의 비위를 맞추라"는 결론으로 치닫기도 합니다. 하긴, 무슨 책 같은 데서 이 난문에 대한 정답이 행여나왔을 것 같으면 벌써 입소문을 타고 책의 비결이 실천에 옮겨져 온갖 사회적 갈등이 해소되었겠지 혼자서 속앓이하는 사람이 누가 남아 있겠습니까. 애초에 개인의 특수한 과제는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지, 어떤 일반적인 상황에 억지로 포섭시켜서 억지 해법을 만들고 혼자 만족할 일이 전혀 아닙니다.

성실한 독자가 그야말로 공부 한 번 제대로 하는 셈 치고 지금 이 책을 읽는다면, "사무실"뿐 아니라 인간사의 사회적 갈등 전반에 대한 현명한 깨달음이 아마 마음 속에 자리할 듯합니다. 가볍게 접근할 수 있을 듯했던 제목과는 달리, 또 얇은 분량과는 달리, 이 책은 생각 외의 깊이와 무게를 지닌, 전문가의 고뇌와 품격이 풍기는 내용이었습니다. 원제는 <The Office Politics Handbook>인데, 저 handbook이란 단어도 사람 헷갈리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영어권에서 이 단어는 말그대로 가벼운 참고서, 팁 모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예를 들어 독일어 서적이라면 웬만한 사전 한 권 분량인데다 내용 역시 꽤나 전문적입니다. 이 책은, 분량은 영어권(물론 당연히 미국 저자가 미국식 영어로 쓴 책이지만), 내용은 독일어권의 관행(?)을 따랐다고 보면 될 듯합니다.

한국과는 달리 영미권에선 본격 정치학 서적이 읽기에 그렇게나 어렵더군요. 정치학(외교학) 특유의 jargon이 자주 구사될 뿐더러, 간간이 곁들여지는 저자의 위트조차 (본의와는 달리) 독자를 혼란에 몰아넣곤 합니다. 이 책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나, 혹 편안한(안이한) 마음가짐으로 "회사에서 갑질 좀 할 수 있는 팁"을 얻고자 한 독자라면 좀 낭패를 볼 수도 있지 싶습니다. 최고의 지성인이 쓴 책 답게, 좀 고생해 가며 읽어내면 독자 입장에서 의외로 남는 바는 많겠지만 말입니다.

미국 역사에서 유명한 "모겐소"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두 명 있습니다. 하나는 FDR때 재무장관을 지낸 헨리 모겐소이며, 다른 한 사람은 국제정치학(외교학)계의 거물 한스 모겐소입니다. 후자의 경우 특히 그 저서들의 난이도가 엄청 높기로 유명한데, 난다긴다하는 예일대 학부생들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젖곤 합니다. 이 책 역시 그 한스 모겐소의 입장(워낙 클래식이니까)이 곳곳에서 자주 인용되는데, 저자분이 워낙에 정통파 학자이시라서 당연히 그러려니 하는 자세로 읽었습니다. 관련 전공자들에게는 익숙한 내용이지만 공부하는 자세로 한번 정리해 봤습니다.

1. 정치의 법칙은 인간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2. (생략)
3.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권력이며, 이 목적에 기여하는 사회적 관계라면 그 무엇이든 정치로 볼 수 있다.  (pp.39~42)

정치학에서 보통 하이 폴리틱스, 로 폴리틱스의 구분을 정하곤 합니다. 정치인들이 모여 상부 구조의 의사를 결정하는 건 하이 폴리틱스이며, 보이지 않는 하부에서 정치의 실체, 기반을 정하는 건 로 폴리틱스인데, 귀하다 천하다 혹은 높다 낮다의 개념이라기보단 드러나는 부분과 숨겨진 부분으로 해석하는 게 맞다고 합니다. 이 책에선 그 개념 말고도, 거시정치와 미시정치로 다시 개념을 나눕니다. 거시정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이며, 미시정치는 바로 이 책의 주제, 또 이 책의 제목에 끌려 집어든 독자들이 관심 있어할 만한 "사무실의 정치" 같은 게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몇 년 전부터 일반인들도 "저 사람 정치(질)하네" 라든가 "일머리는 없는데 정치머리는 대단해" 같은 맥락 속에서, 은연중에 이 "미시정치" 개념을 수용한 셈입니다.

책이 이론적으로 상당히 까다로운 접근법을 취하기는 하나, 다시 두 패러그래프 위로 올라가 보십시오.

3. .... 관계라면 그 무엇이든 정치로 볼 수 있다.

미시경제와 거시경제는 그를 관통하는 법칙 몇 가지가 공통이긴 해도, 작동하는 생리가 꽤나 다릅니다(이걸 같다고 보면 꽤 보수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스탠스이고, 다르다고 보면 케인지언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이 책은 저 인용문에서도 눈치챌 수 있듯, "당신이 씹어대는 여의도나 저 태평양 너머 DC에서의 정치이든, 당신이 사무실에서 지금 겪는 눈치싸움과 처세의 곡예이든 알고 보면 다 똑같은 정치임"을 일단 전제로 삼고 논의를 풀어나갑니다, 그래서 이 책 한 권 잘 읽으면, 정치학에 대한 소양이 꽤 늘 뿐 아니라, 곤란을 겪고 있는 사무실의 꼬이고 꼬인 관계도 냉철하게 풀어나갈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의도이겠습니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불확실성의 시대> 등의 명저를 통해, 탈냉전의 과감한 발상 전환을 처음으로 강조한 정치학자입니다. 이분이 남긴 업적 중에 권력의 개념 구분 시도가 있는데 책에서도 요령 있게 잘 간추려 소개하고 있네요(p77). 초보 경영 조직론 같은 데서 자주 나오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본래 경영학은 인접 기초 학문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니까요)

①징벌적 권력
②보상적 권력
③조종적 권력

1과 2가 가장 원초적 형태의 권력들입니다. 1과 2는 사실상 같은 권력 주체가 두 개의 탈을 번갈아 써 가며 구사하는 채찍과 당근(순서대로)이라 봐도 됩니다. 3에 대한 설명은 책 몇 페이지 뒤로 넘어간 후에야 나오는데, 이 권력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막후에서 행사되는, 가장 세련된 형태의 권력이라 불러도 되겠습니다.  행사하는 주체는 분명 의도를 달성하고 합당한(?) 대가를 챙기지만, 그의 전략 구사에 놀아나는 대상은 자신이 어떤 빅 픽처의 구도에 놀아나는지 전혀 감을 못 잡습니다. 1에 대해 저자는, 갤브레이스 본인이 쓴 condign이란 용어의 뉘앙스와 격을 지적하며 appropriate나 well-deserved 등보다 훨씬 고급임을 평가하는데 이뿐 아니라 정치학의 모든 용어들이 성격 면에서 다 이런 계열 구조입니다.

"나의 눈으로 바라보면 무수히 많은 시스템들로 이뤄진 상호 관게의 네트워크가 보인다.....  이 시스템엔 (다시) 바닥도 천정도 없는 하위 시스템이 들어 있으며, ..... 이 상호 의존 때문에 그들(하부 시스템들)은 정상적 상태를 방해하는 어떤 상황이나 자극에도 (일관되게) 대응한다. ..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시스템들은 창발적으로 대응한다..."

여기서 편집자는 창발적이라는 표현에 대해 "진화의 각 단계마다 그 전 단계를 기초로 해 이뤄지면서도, 전단계의 단순 총합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성질이 나타나며 이뤄지는 발전의 속성"을 가리킨다고 따로 설명(원주인 듯합니다)을 답니다. 아무래도 내용이 좀 어렵다 보니 수시로 편집자가 개입해서, 정치학의 jargon에 익숙지 않은 독자에 대해 어떤 배려를 베풀었어야만 했던 듯합니다.

인간 관계는 본시 갈등의 연속이다. (p93)
인간은 본래 정치적 동물이다. (p4의 서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며)

어떤 사람들은 (사실 그 본체에 대해 전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르지 않은 것, 소수의 탐욕에만 봉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협조할 수 없으며, 이 점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전제라도 가진 듯, 사무실의 정치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를 품기도 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이상 이런 태도를 나무랄 수는 없으나, 사무실의 정치에서 돌이킬 수 없는 패자로 낙인 찍힌 후에나 겨우 내뱉는 초라한 변명에 불과하다면 누구에게건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이겠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역량은 생각지도 않고 무모한 정치적 수를 두다 실패한 후에 고작 저런 서투른 변명을 일삼기도 하더군요. 책의 전제는 (다시 강조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정치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니 그저 받아들이고 룰에 따라 현명히 처신하여 행여 패자가 되지 않게 애 쓰라"는 쪽입니다.

p118에서 저자는 카를 융의 말을 인용합니다.

 "비록 생물학적인 본능 과정들이 인격 형성에 기여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성은 집단적 본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실제로 개성은 집단적 본능의 대척점에 위치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인격으로서의 개인적인 것은 집단적인 것과 언제나 전혀 별개의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말, "정치적 동물" 론을 다시 거명하는데, "... 저 아래 깊은 곳, 인간됨이 분화되지 않은 익명의 하나의 큰 덩어리 상태인 우리 종(種)의 집단적 상태로 내려갈 때, 당신은 당신 내면의 정치적 동물을 만나게 된다"면서, 자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명언을 언제나 이런 맥락에서 해석했다고 회고합니다.

사실 이 고백은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정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야말로 하이 폴리틱스이며 입장이 서로 다른 인간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화와 타협으로 갈등상을 해소하는 게 가장 고등 단계의 사회가 보일 수 있는 역량"이라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정치"에 담긴 용어의 다의성에 근본적으로 기인하는 혼란이며, 이 둘 중 무엇 하나를 택일해야만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본인 자신이 단세포라서 그런 고집을 피울 뿐입니다.

여튼 저자는, 마치 인간이 숙명적으로 진 업보처럼, 아직 무의식이나 하부 의식 구조에 도사리는 "동물적 본능"을 채 떨굴 수 없는 인간들인 만큼, 투쟁과 갈등을 동물적 계산과 승부욕으로 돌파하고 이익을 챙기려는 현상, 행태를 회피할 방법은 없다며 다소 씁쓸하지만 냉정한 현실 인식을 드러내는 셈입니다. 실제로 동물들 역시 무리를 지어 타 집단을 몰아내고 영역을 확보한다거나, 그룹 안에서 수위를 차지하려 빈틈을 보고 책략을 구사하며, 아무 의미 없는 괴성을 질러가며 제 힘을 과장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모습을 과학자들은 목격하곤 합니다. 정상인들의 공동체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을, 예컨대 지적 수준이 많이 낮은 이들이 수용된 시설에선 약자가 강자에게 괴롭힘을 당한다거나, 속임수를 부린다거나, 허세를 떤다거나 하는 행태가 오히려 더 자주 목격된다고도 합니다. 중국인들이 보이는 모습 중, 누구 하나가 무리에 쫓기면 구경꾼들도 아무 이유 없이 소동에 가담하여 추격전을 벌이곤 하는 것도, 다 이런 하등 동물들의 혼란스러운 폭력적 충동으로 설명 가능합니다.

조종적 권력은 그 중에서도 인간의 고등한 지능이 독특히 빚어낸 행태에 속하는 편입니다. 조종적 권력이 곧 "막후 실력자"와 언제나 동의어는 아니겠지만, 저자는 자신에게 이 말이 곧 inconspicuous와 거의 언제나 연상 작용을 일으키곤 한다고 털어 놓습니다. 이 책이 꽤 어려운 주제를 잡고는 있어도, 이처럼 이론 체계의 까다로운 정합성 추구에서 다소나마 이탈하여, 개인 수상록처럼 편안한 논의도 가끔 풀어주는 데서 어떤 여유로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막후 실력자"를 논하며 저자는 예컨대 <대부>의 콘실리에리, 일본의 센세(이 단어의 직접 표의., 즉 "먼저 난 사람"의 의미를 매우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 정도로까지 의식은 않는데도 말이죠), 혹은 <매트릭스>의 오라클이나 그 오라클이 지목한 "더 원" 같은 걸 파고듭니다. (요즘 미국에선 "더 원이 알고보니 스미스 씨였다!" 같은 우스개 밈(meme)이 큰 유행입니다만)

이 책의 결론은 이 문장에 어쩌면 다 들어 있습니다. "미시정치를 능숙히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은, 그들의 지위로 인해 획득된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총명함, 창의성, 미시정치의 기술 등을 이용해 목표를 성취한다.... 유도사범 원형은 권위적 문화의 탈바꿈을 이뤄낼 수 있는데, 이것은 즉응적이고 협력적이며, 부드럽지만 약하지 않다." 집단 안에서 잔꾀를 부리며 유리한 포스트를 차지하려 애 쓰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못난 열등감이나 원시적인 적대감을 얼토당토 않은 말로 포장하는 행태 따위는, 알고보면 동물적 본능의 발현에 불과하지만, 현명한 인간은 이를 객관적으로 냉철히 인식 정리하여 오히려 생존에의 방편으로 활용할 줄 안다는 겁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