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 철학자 황제가 전쟁터에서 자신에게 쓴 일기 현대지성 클래식 1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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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처음에 공화정으로 출범한 정치 단위입니다. 다스리는 영역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합의와 타협을 일일이 개재시키기가 쉽지 않아 제정으로 이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정치적 실력자들이 알력을 빚기 십상이었습니다. 군인황제들의 대립 항쟁으로 인한 혼란기도 자주 등장했고, 잔학한 독재자들의 전횡도 역사를 얼룩지게 했습니다.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가 연달아 출현하여 로마의 정치를 안정시킨 건 그나마 큰 축복이었습니다. 이 "오현제"의 재위 그 황금 시기를 마지막으로 장식한 분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입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애독한 고전이라고도 평하는데, 어쩌면 미국이 최상의 전성기를 보내고 서서히 국운이 가라앉기 시작한 것도 그의 재임기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정치 단위나 개인이라도 전성기를 지나고 나면 다음에는 내려갈 일만 남았는데, 이때 당사자는 차분한 마음으로 하강의 시기를 관조하고, 인간사의 상승과 하강 국면 뒤에 숨은 이치를 냉연히 통찰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왜 노련하고 유식한 정신들이 서투르고 무지한 정신들에 의해 낭패를 당하는가.(p104)" 실제로 우리의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런 곤란이나 치욕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파견한 관리나 측근 혹은 지인이 그런 곤경에 처한 걸 보고 떠오른 상념일 수도 있고, 자신이라든가 자신의 선임자들처럼 현명한 정치를 편 황제들이 다스린 제국이, 어인 까닭으로 매번 변방의 만족에게 어려움을 치르는지 납득이 안 되어서 나온 코멘트일 수도 있습니다.

여튼 그의 결론은 "시작과 끝을 알고 모든 존재에 대해 알고 있고, 정해진 주기를 따르는 영원한 순환 속에서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이성, 이를 아는 정신이다."입니다. 심오하기도 하고 다소 느닷없는 비약처럼도 들립니다. 전통적인 헬라 철학의 결론처럼도 보이고, 아직 기독교 공인 200년도 훨씬 전이라 그 교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을 황제 본인의 (지독한) 주지주의 표백으로도 느껴집니다. 여느 중국 황제 같으면 "천자(天子)"인 자신의 고독에 대한 푸념을 늘어 놓았을 텐데 구태여 인간 보편의 자질인 "이성"을 거론한 건 역시 교육 받은 사람 답기도 합니다.

"욱신은 당당하고 단정해야 하며 움직일 때나 가만 있을 때나 흐트러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신이 지혜롭고 기품이 있으면 그것이 얼굴 표정에 드러나듯이, 우리의 육신 전체에도 정신의 품성이 그대로 바반영되게 해야 한다." (p144) 황제로서 위엄 있는 처신과 태도를 유지해야 했던 고충이 어느 정도는 드러나며, 사실 황제는 외양의 기품만으로 뭇 대중과 신하, 잠재적 경쟁 세력을 압도해야 할 피로감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삼국연의>의 조비 역시 맹달 같은 풍신 좋은 이를 구태여 곁에 두려 했던 것도, 그저 눈에 보이는 위신의 중요성이 현실 정치에서 떨치는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현인이, 허세와 진정한 내면의 힘 그 반영을 서로 혼동했을 리 없고, 바로 안체 나온 여러 심오한 통찰은, 위세와 위엄이란 어디까지나 내면의 품격과 강인함의 반영이어야 한다는 점을 (우리 후세의 독자들에게) 여실히 깨우칩니다.

"감각을 방해하는 건 동물적 본성에 해롭고, 충동을 방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p164)" 여기서 "동물적 본성에 해롭다"든가, 방해된다든가 하는 구절의 뜻이 다소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개인의 수상록이지만, 동시에 윤리와 수신의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동물적 본성 등이 무엇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면, 이를 내 주위에서 떨쳐내어야 한다는 걸까요, 아님 그 반대일까요? 답은 그 다음 구절에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성은 그 자체로 우주적 완전체이기 때문에, 어떤 방해 작용에 의해서도 동요, 오염되지 않고 혼자서 제 기능을 잘 수행한다."

그렇습니다. 동물적 본성이든 감각이든 주변의 교란 요소에 의해 언제든 원활한 작동에의 장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중 간혹 나의 판단에 큰 도움을 준 "직감, 촉" 따위야 얼마든 기능 저하(?)를 겪어도, 이성은 그런 기복이 없으니 얼마나 듬직한지를 강조하는 취지입니다. 다른 말로, 무릇 황제라면 자신의 이성을 잘 단련하여 통치의 자질로 능숙히 부릴 정도가 되어야 하며, 이 습성이 몸에 배지 않은 자는 감히 자리를 넘볼 엄두도 내지 말라는 일종의 선포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삶의 원리들을 활용해서 현실에 적용시킬 때에는, 검투사가 아니라 격투기 선수를 본받아야 한다. 검은 언제나 신경 써서 자신의 손에 챙겨들어야 하지만, 격투기 선수야 그저 주먹을 오므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p232)." 저는 요즘 모바일 기기가 마치 삶, 신체의 일부가 되어 모든 이들의 손에서 떠나지 않는 풍속도도 이 구절에서 바로 연상되었습니다. 필요한 정보와 자료 따위는 모바일 기기를 통해 바로 구할 수 있으며, 일종의 지식 외주 장치처럼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머리 속 웨어하우스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 머리 속의 여유 공간을 창의력이나 무궁무진한 상상 등 새로운 자원으로 메울 수 있으면 더없이 좋은 일이겠으나, 불행히도 많은 이들의 경우 자기계발의 경지가 그에까지 이르지를 못합니다.

정전, 방전, 기타의 이유로 기기(device)와 분리되었을 때, 내 머리와 가슴에 남은 게 그저 중독자의 금단 증상이 빚은 불안뿐이라면, 기기는 나에게 편의를 준 게 아니라 오히려 정신을 피폐시킨 것뿐입니다. 참된 소통과 관계 형성은 얼굴을 맞대고 정직한 감정을 교류할 때에만 가능하며, 입에 발린 메시지 교환이나 형식, 타성에만 매몰된 이모티콘 남발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 신체와 내 두뇌에 내 것으로 온전히 남는 판단, 감정, 이성(아무나 못 가지겠지만요ㅎ), 지식 등을, 평소에 더 큰 애착을 갖고 존재의 일부로 만들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경주해야 할 듯합니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그 어느 구체적 상황 속에서도 가장 바르게 말하거나 행할 수 있는가?(p205)"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예컨대 신앙을 위해 죽은 순교자라든가, 학자, 지사적 소신을 위해 처참한 죽음도 마다지 않았던 방효유, 사육신 등이 떠오릅니다. 신상에 별 위해가 안 닥칠 때 큰 소리로 떠들며 소신을 가장한 아집이나 허세를 부리는 건 누구라도 가능합니다. 정말 "누구"에게라도 가능하다는 건 주변에서 여실히 확인 가능하며, 기가 막히거나 어안이 벙벙할 때조차 있어 사람의 내면 그 성실성(integrity)와 목소리의 크기란 정확히 반비례한다는 점까지 절감하는 요즘입니다.

문제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육신에 직접 고통과 위해가 침노했을 시, 도대체 어디까지 그 저항이 가능하냐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어떠한, 구체적" 등의 한정어를 써 가며 사실상 "극한 상황"까지를 암시하는 중이죠. 어떻습니까? 나의 소신은 과연 그런 극한의 압박 속에서도 굴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원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육신이 걸레짝이 되고 난 후에도 끝까지 유지된 소신은, 이제 현상의 존재와 분리되고 난 후에도 어떤 의의를 지니겠습니까?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현세의 쾌락을 더 중히 평가하기에, 이 점에 대해서 그리 큰 의의를 두지 않는 듯합니다. 공자의 도그마를 옹호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이들에 대해 제한적으로 경배를 바치는 관행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원통이라고 해서 언제나 그 생긴 모습대로 고유의 회전 운동을 어느 지면 위에서나 이어갈 수 있지는 않고, 불이나 물을 비롯한 자연이나.... 어느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만큼은 그렇지 않아서..... 변하지도 않고 그 어느 장애물도 쉽게 돌파할 수 있다.(p205)" p164에 이어, 아니, 사실상 이 책 어느 구석을 펼쳐 보아도 이성의 순일성과 항구성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하긴 하지만, 다시 이성에의 온전한 의존을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철인 황제답게 일생을 두고 감정의 절제와 궁극의 평온을 추구한 흔적이 책 곳곳에 배어납니다. 제국도 쇠망하기 마련이고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야 반드시 육신이 쇠하고 넋과 혼백도 간데없이 마모되기 마련입니다. 허나 이 명저는 저술된지 2천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식자층의 손을 떠나지 않고 애독됩니다. 책의 내용에 위화, 생경함을 느끼는 건 수양 안 된 짐승 같은 소인배나 거짓말쟁이들 뿐입니다. 내가 갖지 못한 미덕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은 위인보다 더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그들에게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성과 수양과 아파테이아란 그래서 불멸의 경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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