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1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디킨스와 톨스토이의 손길이 일본에서 살았던 한국인 가족에 스며든 (놀라운) 작품이다."

위의 평가는 이민진 미국 변호사의 이 작품을 두고 소설가 게리 쉬테인가드가 내린 것입니다. 확실히 가장 정확한 평가인 게, <올리버 트위스트>나 <어려운 시절> 등 대작에 묘사된 가장 힘든 계층의 고단하고 치욕적인 삶이 잘 드러났을 뿐 아니라, 그런 시련의 와중에도 오히려 빛을 발하는 인간애와 연대 의식이 페이지마다 스며 있기 때문입니다. 글쎄요, 우리 한국의 독자들은 예컨대 <토지>라든가, 선우휘 선생의 <노다지> 등 장편을 통해 일제 강점기 하 겨레의 수난을 픽션 속에서 여러 번 접해 왔고, 주변에는 아직도 그 시절을 가장 아프에 살아 오신 분들이 여럿 생존해 계시기까지 하죠. 그래서 "또 그 얘긴가?" 같은 반응이 혹시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안될 일입니다. 이런 민족 전체의 수난사에는 어떤 "면역 단계"란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일본이 그 국왕이나 정부 차원에서 허리 굽혀 통절한 사과를 한 후에도, 우리는 이런 수난과 모욕의 역사를 영혼에 각인시키고 미래를 펼쳐 나갈 의무가 있습니다. "용서는 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유대인들의 유명한 경구처럼 말입니다.

배경은 1930년대 전반 식민지 조선의 경상도 해안 지방입니다. 착하고 힘도 세지만 언청이에 몸이 비틀린 불구로 태어난 훈이는, 그 장애의 인자가 후손에까지 물려질까 두려운 이웃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혼사도 치르기 어려운 처지입니다. 하지만 그 양친이 너무도 사려 깊은 분들이고, 이처럼 알차게 인생을 살아온 분들에게는 어떤 식으로건 선행과 성실에 대한 보답이 이뤄지게 마련입니다. 양진이라는 선하고 심지 굳은 여인과 결혼하고, 그 사이에서 순자라는 딸을 낳습니다. 이 1권은 대체로 순자의 일생 전반, 즉 목사 백이삭과 결혼한 후 오사카로 건너가 그곳에서 겪은 온갖 질곡과 시련 가득한 여정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종종, 식민지 시절에 경제는 오히려 괜찮았다는 왜곡된 평가를 듣곤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일단, 그 시절을 몸으로 살아낸 산 증인의 말을 우선 청취하고 뭘 평가해도 평가해야 합니다. 이민진 변호사가 물론 그 오래전 시절에 자신의 생 한 구간이라도 닿을 나이는 아닙니다만, 이렇게 생생한 묘사가 가능하려면 직접 증인에게 사연을 들었어야 가능하지 않았겠습니까?

창작 동기는 1989년 예일대의 어느 강연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내내 따돌림당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느 학생의 사연을 들은 일이라고 나옵니다. 이 사건은 워낙 유명했고 당시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켜 KBS에서 특집 드라마로 제작, 방영하기도 했죠(이 변호사께서 강연을 들은 건 1989년이지만, 사건은 그보다 몇 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이 경험은 이 변호사가 아직 법대생 시절이었을 적이고, 이후 그녀는 일본계(이 점이 너무도 중요하군요) 미국인 남편(금융인 전문직)을 만나 일본에 건너가 살게 되고(오사카는 아니고 도쿄라고 하네요), 이후 관련자의 증언, 취재를 통해 이 장편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계라고 하면 우리는 아무 상관 없는 민간인에다가 괜한 증오의 시선을 보내는 못난 태도를 종종 봅니다만, 미국 사회 속 동아시아계 국외자로서 이 변호사 부부는 서로 결정적이다 싶은 정체감을 공유했겠으며, 대개 일본계 이민자들이 그러하듯 모국(고국)의 불의하고 추악한 과거에 대해 "미국 시민 다운" 공분을 느끼는 게 보통입니다. 이 소설에 보면 곳곳에, "이해심 깊고 마음 좋으신 부모님을 만난 복으로..' 같은 구절이 나오는데, 이 변호사 역시 그녀의 양친, 남편 등 해서 주변에 참으로 선량하고 교양 있는 인맥을 둔 게 진정 축복으로 보입니다.

현대 한국인들은 강점기의 일본인이라 하면 예컨대 헌병 경찰이나 서슬 퍼런 차림새를 한 공권력 집행자 등만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은 말 그대로 심을 식 자 백성 민 자를 쓴, 식민지에서 새 기반을 마련하려 든 민간인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 이방인들이 우리 터전에서 주인 행세를 하며 조선인을 노예처럼 부리고 차별 대우를 일삼으니 우리 조상들이 느꼈던 심회가 어땠겠습니까. 이런 환경에서는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립, 번영할 수가 없죠. 또, 설령 입신 출세가 가능하다 해도 바로 동족이 저런 노예 상태에서 신음(이 표현은 카이로 선언에도 나옵니다)하는데 양심이 있다면 이를 외면할 수 없었겠고 말입니다.

이 장편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 마음이 많이 무거워질 듯합니다. 사실 디킨스의 장편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은, 물론 산업 사회가 빚은 고유의 모순 때문에 고통을 겪긴 합니다만, 그 중에는 누구의 탓을 할 수 없는 본인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든가, 혹은 아예 자신이 저지른 악행, 우행, 비행의 대가를 치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헌데 이 작품에선, 많은 이들이 순전히, 야만적인 이민족의 가혹한 통치 때문에 고생을 하고 모욕을 당합니다. 일본은 근대화의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을 개화하겠답시고 이 반도에 상륙을 했으나, 그들이 여기서 자행한 건 상식을 벗어난 수탈과 저질스러운 지배 욕구의 충족 뿐이었습니다.

마치 심훈의 <상록수>처럼, 이 작품에도 다소 전형적이라 할 여러 순수한 사명감을 품은 개성들, 기독교 신앙에 충만하여 어렵고 딱한 이들을 구해 보려는 이상주의자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단연 주목이 가는 이는 젊은 목사 백이삭입니다. 키도 크고 순수한 열정을 지닌 멋진  청년이지만, 이 당시 불치병으로 통했던 결핵을 앓는지라 그리 오랜 생을 누릴 수는 없는 불운을 안고 있습니다. 마치 <벤허>에서 나병이라고 하면 모든 이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듯, 이 시절에는 결핵이 그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하늘의 저주처럼 받아들여졌나 봅니다. 허나 현실의 그런 가혹한 족쇄가 자신을 옥죌수록 백이삭 목사는 더욱 자신이 믿는 종교에 순명합니다.

앞서 등장한 언청이(소설 속 단어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니 혹시 불쾌해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의 딸 순자는,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무책임한 늙은이에게 욕정 해소의 수단이 되어 아이를 배게 됩니다. 가뜩이나 불구자 집안에서 태어나 시집을 가기 어려운데 이런 일까지 생겼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데, 백이삭 목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아이들은 모두 신이 주신 축복입니다." 거 참. 목사는 또 이 아이(아직 태어나지는 않았으나)와 여인을 구원할 방법은 자신이 바로 여인과 결혼해서 뭔가 떳떳한 신분을 마련해 주는 게 유일한 길임을 알고, 지체 없이 실천에 옮깁니다. 이렇게 해서 백이삭은 오사카행 배에 오르게 되는데, 아무리 자이니치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고장이라고 하나 근본적으로 이곳 역시 일인들의 땅입니다.

번듯한 외모 덕분에 일단은 존중을 받으나, 입 한 번 떼는 순간 바로 조선인임이 들통 나 지독한 취급을 받는 현실. 이 와중에도 일인인 척 시늉하며 약삭빠르게 적응해 가는 조선인들도 많고, 그리 쉽게 속아넘어가는 일인들을 보며 그들이 기댄 우월감의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지 조소를 보내게도 됩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행실로 조선인 전체가 욕을 먹지 않게 하라. 한 기독교인의 실수 때문에 전체 교단이 비난을 받지 않게 하라." 한국에서는 사정이 다르지만(이 변호사의 부친은 함경도 출신인데 이곳 역시 해방 전에는 기독교세가 강한 곳이었죠),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마이너리티에 지나지 않고, 하물며 조선인이기까지 하다면 그 대접이 어떠했겠습니까. 고달픈 역정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하지만 여튼 함께 속죄(그동안의 무심함)하는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겨 가겠습니다. (2권 리뷰로 이어짐)

문학사상사에서 낸 책은 일단 호감을 갖고 읽는 편인데, 오탈자가 거의 없고 표지 디자인이 깔끔하며, 번역하신 분이 원 저자의 의도를 가장 잘 알 법한 분인 만큼 마치 처음부터 한국어로 쓰인 양 자연스럽고 토속적인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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