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의 종말 -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
토드 로즈 지음, 정미나 옮김, 이우일 감수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개개인생의 힘." 진정 이 책의 주제와 박력, 진정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폴레옹이 이른바 근대 국민 국가를 표방하며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게 보통 교육이었습니다. 이 제도의 실시 덕분에 아무리 머리가 부족하고 환경이 열악해도 학교에서 훈련 받은 대로만 따라하면 최소한 기본은 누구나 흉내내게끔 되었습니다. 문제는, 기본 이하의 인력을 평균까지 끌어올린 건 좋은데, 모든 학생(나중에 성인이 되어 온전한 사회 성원의 몫을 해 내어야 할)의 정신과 능력, 개성까지를 획일화하여 천편 일률적인 꼴로 왜곡시켰다는 데에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개개인의 창의적인 기여를 요구합니다. 이제 "천편일률적인" 계산이나 노동이나 단순 반복 작업은 기계가 대신합니다. 저 역시 낮에 간단한 계산을 할 일이 좀 있었는데, 백 년 전이라면 이 정도 일을 해 내는 사람 하나를 기르기 위해 교사 등이 애를 얼마나 썼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오십 명(그 이상일 수도 있었겠죠) 정도 되는 학급에서 단 한두 명의 올바른 인력을 키워 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어떤 경우에는 자신도 똑바로 못 하면서 그저 열등생을 윽박지르기만 한 사이비 교사들도 얼마나 많았을지 하고 말입니다.

사실 저는 근 10년 동안 한국에서, 일부 학부모(중에서도 어머니)들이 지나치게 자녀의 정신 건강에 대해 염려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이(그 중에서도 아들)가 좀 학습이 부진하다 싶으면 무조건 ADHD로 몰고가며, 도대체 ADHD 아닌 애가 없는 것만 같더군요. 그런데 평균적으로(ㅎㅎ) 그렇게 흔한 질병이라면 과연 그게 병이 맞을지 하는 의심도 들었더랬습니다. 자신에 대한 애정이 지나친 몇몇 분이 건강 염려증이란 "병"을 달고 살듯, 아들 걱정이 지나치다 보니 웬만하면 친한 의사한테 가서 처방을 받아 오시더군요. 그렇게 해서 호감 있는 의사를 어머니가 친하게 곁에 두고 싶으셨던 게 본래 의도 아닐까 의심(?)도 들게 말입니다. ㅎㅎ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도 마찬가지로 이 병 아닌 병 ADHD에 대한 인지도(그 실체가 과연 있든 없든 간에)가 꽤 높습니다. 심지어는 전혀 갖다붙이지 말아야 할 곳에도 일단 자기가 아는 게 그 말이니까 함부로 적용(?)시키고는 웃어댄다거나 말이죠. 병명이 이처럼 경솔하게 농담 소재로 사용되는 걸 보아 향후 이 병이 재평가될 날도 그리 멀지만은 않은 듯합니다.

이 책의 저자이신 토드 로즈 교수는 하버드대 교육대학원에서 한 연구소의 중책을 맡고 계신 분입니다. 어떤 이가 박사학위를 따고 세계 최고 학부에서 이름난 연구자, 그것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었다면, 우수한 두뇌 못지 않게 그 교육자로서의 인격과 품격에까지 자연스러운 존경심이 바쳐지기 마련입니다. 성장 과정 역시, 내내 모범생이었으며 교사와 동료 학생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반듯하고 안온한 꽃길을 걸었을 듯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우리의 에상과는 정반대로, 중학생 때 ADHD 장애 판정을 받았고, 결국 적응을 못 해 고교를 중퇴했다는 게 그 충격적인 이력입니다. 검정고시, 야간 학교 등록이라면 대개 한국 사회에서도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게 당연하다는 듯 여겨집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권위자 중 한 분이, 성장기 주요 지점을 이런 식으로 통과했다고 합니다.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가 맹렬히 질타하고 싶은 건, 이른바 "평균주의"라는 괴물을 통해 개인의 발랄하고 자유로운 가능성의 싹을 짓눌러 온, 교육계와 일반의 어리석은 통념입니다. 책 p47이하부터 계속 언급되는 케틀레는, 평균주의 사조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벨기에, 프랑스 등에서 위인으로 추앙되었고, 일본, 한국에서 통계학의 시조, 천문학에의 대표적 공헌자 정도로 알려진 인물이죠. 이분이 태어나던 해가 나폴레옹이 막 권력자로 부상할 무렵이고, 이분이 커리어를 다져 가던 시기는 나폴레옹이 초석을 둔 시스템이 프랑스에서 한창 제 가동을 하며 근대주의, 평균주의의 위력을 더해 갈 시절이었겠습니다.

아무튼 케틀레는 1830년 7월 혁명 때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벨기에에서 행정과 통치의 기반이 되는 여러 자료를 정리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자연의 오류로 빚어진 그 모든 오차는 바람직하지 못하고 오로지 평균만이 우아하며 아름답다." 사실 어느 정도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우리 인간의 미의삭은 가장 평균적인(모호한 표현입다만) 인간의 아름다움을 고루 딴 얼굴에 가장 큰 호감을 느낀다고도 하니 말이죠.

케틀레는 (이 책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사회물리학계의 뉴턴"이 되어 보려는 야심에 가득찼던 사람입니다. 저자가 파악하는 케틀레는 타고난 자연스러운 천재성을 발판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게 아니라, "이런 지향점을 타겟으로, 이런 수단을 쓰면 나도 뉴턴같이 유명해지겠지" 같은, 어떤 불건강한 공명심에 들떴던 타입 같습니다. 하긴 이런 잣대로는 라플라스 같은 이름난 수학자, 천문학자 역시 비판을 면할 수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사회물리학"이란, 그 전까지 완전한 혼란에 휩싸였던 우주에서 놀랍도록 정연한 법칙, 질서를 찾은 뉴턴의 업적처럼, 자신 역시 불순분자, 모자란 머리, 범죄자, 실직자, 자신을 상류층 출신이라고 착각하며 근거 없는 환상에 빠져 사는 늙은 거짓말쟁이, 하루종일 불평불만만 늘어 놓는 부적응자 따위로 가득찬 이 사회에서, 전체를 통제, 관리할 어떤 질서와 틀을 발견한다면 그야말로 뉴턴에 비견할, 아니 그를 능가할 위대한 업적이 아니겠는가 하는 뜻에서 쓴 말이겠습니다. 물론 케틀러의 실체가 그랬다기보다, 이 저자분의 해석, 시야를 대변하는 개념이겠습니다.

저자는 이런 논의 속에서, 생명 없고 존엄을 결한 우주, 천체라는 일개 대상과, 아무리 추한 부적응자이며 거짓말쟁이이고 직장에서 전혀 환영 받지 못하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하나도 이해 못 한 채 길거리 캐스팅만 기다리고 앉은 낙오자라고 해도 여튼 인간인 이상 최소한의 존중은 받아야 할 어떤 무엇을, 무리하게, (또 책의 표현에 따르면) 논리적 비약을 저지르면서까지, 동일시했던 케틀레의 오만을 사정 없이 질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평균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우리 모두는 그런 평균에서 벗어나는 이단아들이다!" 사실 평균에서 이탈한다는 그 자체가 미덕은 아니고, 대부분의 우리들은 평균에서 떨어지는 분자를 경멸하는 게 보통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평균 이하는 고사하고 심지어 평균을 넘어서는 분자까지 평균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옭아매려는 폭력은, 사회 진보의 일체를 가로막는, 그야말로 전근대적인 구태요 폐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평균적인 아리아인의 외모를 찾아내어 체제 선전의 장에 활용하려던 나치의 한심한 시도를 무겁게 풍자한 작품으로는 게오르규 신부의 <25시>가 있었죠. 이처럼, 전형이니 평균이니 하는 말은 그 자체로 환상에 지나지 않는데다, 심지어는 전체주의의 폭력과도 연관됩니다. 과거 스탈린식 체제 역시 스타하노프 같은 허상의 노동자를 앞에 내세워, 평균 이하일 수밖에 없는 숱한 근로 대중에게 열등감과 죄의식을 안기고 착취를 일삼았습니다.

"평균"이라는 사고에 숨은 가장 무서운 요소는, 집단 구성원 사이의 서열화를 은근 획책하는 것입니다. 나은 사람이 있고 못한 사람이 있다는 사고 만큼, 사회와 공동체의 분열을 획책하는 위험 요인이 또 없습니다(아니면 반대로, 가장 극단적인 전체주의 독재의 발흥을 부추기든지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등수를 매길 게 아니라 개인들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의 진작, 육성에 초점을 두는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지하고 어리석고 폭력적인 평균"이 휘두르는 가당찮은 독재의 주먹부터 먼저 깨끗이 청산하고 볼 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