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역습
김용운 지음 / 맥스미디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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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이론은 어떤 의미에서 탈근대의 상징입니다. "A라는 원인이 있으면 B라는 결과가 생긴다." 뉴턴이 만유 인력 법칙 등 우주의 신비를 벗기는 노력의 초석을 놓았을 때, 이런 선형적(線形的) 세계관은 이성 만능의 희망과 비전을 계몽주의자, 지식인들에게 심어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사백여년이 지난 지금, 이 근대적 패러다임은 곳곳에서 도전을 받는 중입니다.

한국이 자랑할 만한 대석학 김용운 교수님의 이 책은 이른바 카오스 이론을 바탕으로, 작금의 도도한 세계 역사 물결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사실 저의 이 표현은 카오스 이론의 본질에 비추어선 어폐가 있긴 하죠), 원대한 통찰과 비전으로 우리 독자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내용입니다. 박사님께선 1927년생, 우리 나이로 아흔의 고령이신데도, 이 방대한 신저를 저술하셨고, 이 책에는 바로 몇 달 전에 터진 샬로츠빌 사건이라든가,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 IS의 과격 행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 양상 최근의 사정,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외세가 끼어들어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게 된 시리아 내전 등 최신의 정보가 모두 반영되기까지 한 내용입니다.

책을 이렇게 쓰시려면 CNN 등 외신까지 모두 실시간으로 접하고 정보를 업데이트해야 가능한 경지입니다. 새파란 젊은이인 저도 정력과 시간이 부족한 과업을, 연부역강하신 이 대석학은 마치 숨쉬기 운동이나 하시듯 쉽게 해 내십니다. 심오한 통찰을 담은 저술이야 박사님 같은, 하늘이 낸 극소수 천재 두뇌라야 가능하겠으나, 외신을 보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우리 같은 평범한 이들도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더욱 부끄러워지는 겁니다. 읽고서 정말 너무도 감탄스러웠습니다.

카오스 이론은 무작정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그보다는 결과의 확률분포적 도출이라든가, 단순계에서 통하던 법칙이 이 복잡계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전혀 예상 밖의 결과가 평지돌출할 수 있음을 언제나 명심하여 의사 결정하라는 충고에 그 맥락이 더 가깝습니다. 복잡계에 적용되는 카오스 이론 중 몇몇은 이미 실용적으로 높은 효율을 증명까지 해 냅니다. 기술이나 산업 분야를 넘어, 역사와 현금의 국제 정세를 살필 때에도 이 이론을 적용해 보자는 게 박사님의 제언입니다. 또, 단순 인과율을 통해 모든 미래가 예측 가능하다는 근대적 오만을 이제는 폐기할 때가 되었다는 뜻도 됩니다.

어떤 지도자가 극히 무능하고, 거듭된 실책과 비위를 저질러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과, 그 지도자가 권좌에서 비참하게 끌려내려온 사실, 이 둘 사이에 항상 직접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악인은 즉시 천벌을 받아 죽어야 하며, 악함과 약함이 별개가 아닌 동일 결함일 수 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어느 실직자는 그 순간 자신의 실체를 파악하고선 자살에 이르러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고, 이들 중 상당수는 멀쩡하게 그 부조리한 행태를 이어가며 민폐를 끼칩니다.

여튼 어떤 분은 그 자리에서 내려욌는데(=끌려내려졌는데), 이 역시 저자께서는 복잡계의 예측 불능이란 본성이 현실로 화한 예라고 보시는 듯합니다. 저자께서는, 아마도 뒤에서 웃고 있을 미스터 X의 존재도 슬쩍 언급하시는데, 세계 지도자 중 이니셜이 x로 시작하는 이가 그리 많지도 않습니다(^^ 물론 그저 미지의 존재라는 뜻으로 X를 거명하셨을 수도 있죠. 누가 감히 박사님 같은 대석학의 진의를 감히 일도양단으로 추단하겠습니까. 이 역시 카오스 법칙에 따라 감히 몇 가지 가능성을 거론할 뿐입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사실 역시 기존의 여론 조사 기법이나, 언론 기관 등의 통찰, 기대 등으로는 전혀 감 잡을 수 없었던 의외의 결과였습니다. 브렉시트는 또 어떻습니까? 근대 이후 세계는 이성과 뚜렷한 목적을 가진 이들이 때로는 무력으로 충돌하고, 때로는 현명한 지도자들이 자국민을 설득하고, 때로는 국민 의사를 선제적으로 대변하여 과감한 선견지명으로 국정을 이끌고 세계 정세를 안정시켰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독재국가는 물론 소위 민주 선진 국가들에서도, 어떤 군중 심리나 대중 추수, 선동적 술수에 리더들이 즐겨 의지합니다. 의지한다기보다 그들 역시 국가와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도 모르면서 미친 곡예를 이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에측이 안 됩니다. 지도자의 자질도 부족하고, 그 전에 시대의 성격이 바뀌어 더 이상은 과거 방식으로 통제가 안 된 세상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박사님은 특히 대중의 한(恨)에 주목하십니다. 종래 한(恨)의 정서는 우리 한국(韓國)인들 고유의 품성과 무의식으로 여겨졌으나, 박사님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불특정 다수, 혹은 특정 종족이나 인종이 품은 resentment(단, 책 어느 한 군데에서는 s가 두 번 겹쳐진 오타가 발겭됩니다. 다음 판에선 교정되길 기대합니다)가 작금의 세상을 움직이는 큰 동력 중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흑인은 신대륙에 노예로 끌려와 수백 년 간 경멸과 차별 받아 온 한이 있습니다. 반면 백인 중 상당수는 1960년대 민권 운동 이래 일부 흑인들이 정치적으로 협잡을 일 삼아 부당한 특권을 챙겼다며 역 차별에 대한 깊은 분노를 품었습니다. 샤를로츠빌의 대립상은 "헤이트(너희가 싫다!)와 카운터헤이트(우리 역시 그런 너희가 싫다!)의 극명한 충돌"이라는 게 박사님의 규정입니다.

이슬람 역시 한을 품었습니다. 석유로 인해 챙기는 막대한 이익 중 상당 부분은 미국과 유럽 백인 자본이 이유 없이 자기들에게서 뺏어간다는 피해의식입니다. 현세가 고단한 일반 민중은 지금의 생과 사가 큰 의미 없고, 교리에 충실하다 죽은 자에게 허여되는 천국행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살 테러가 그리도 빈발한데, 당사자에게는 멸사봉공 이념의 장엄한 실천이므로 아무 회한이 없습니다. 이러니 지구촌에 편안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등의 거룩한 희생을 기리며 교육을 받았으므로 이런 현상에 대해 마냥 냉연한 반응으로 일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성과 대화와 타협으로 갈등이 종식될까요? 종래의 진보 좌파 진영은 이른바 "정치적 공정성"을 내세우며 그런 이상을 제시합니다. 보수 진영은 힘의 논리를 앞세워 이른바 sham peace가 부른 불건전한 교착 상태를 일거에 타파할 것을 주장합니다. 해결책과 비전은 서로 극과 극이지만, 이들 양 진영은 이미 효용이 다한 어떤 근대 사관, 세계관에 기반했다는 게 다릅니다. 그러나 박사님은 이미 미래의 패러다임인 카오스 이론에 깊이 천착하시어, 저 같이 새파랗게 젊은 독자층이 간신히 인식 기반으로 기대는 근대 합리주의를 이제는 폐기할 때가 되었다며 담대한 선포를 하십니다. 박사님의 견해가 맞고 아니고를 떠나, 사고와 철학의 근본 지평 설정에 이처럼 유연하실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놀랍습니다.

원인이 복잡하고 인풋(input)부터가 측량이 어려울 만큼 다발적인데, 어떻게 단순한 결론을 뻔뻔스럽게 도출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변했으면 우리들의 사고와 관점 역시 변해야 합니다. 경영에서는 이미 모든 것을 바꾸고 폐기, 전복하라는 파괴적 혁신이 대세입니다. 복잡계의 관측, 혹은 참여는 복잡계의 본성(이 말도 사실 어폐가 있습니다만 일단요)에 맞추어야 한다는 게 이 심오한 대저로부터 우리 평범한 독자들이 암시받을 수 있는 한 가닥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근대, 근대, 혹은 탈근대 중 어느 지평에 발을 디디고 있습니까? 겸허히 자문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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