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캐니언 정말 노아 홍수 때 생겼을까? FIELD TRIP SERIES 1
양승훈 지음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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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캐니언에 다녀오신 적 있습니까? 이름 그대로 장쾌한 스케일과 기괴한 형상에, 진정 "그랜드"란 형용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누구에게도 들죠. 본디 그랜드캐니언은 신대륙에 소재한지라 당연히 기독교도들을 몰랐을 테고, 기독교도들 역시 그랜드캐니언을 몰랐겠으며, 성경에 "감자"가 나오지 않듯 그랜드캐니언 역시 "홀리 스크립트"에 등장할 리 없습니다. 즉 그랜드캐니언은 애초에 "비블리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심 깊은 청교도들이 북미 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하고, 그때로부터 다시 한참이 지나 미국 중서부의 이 절경에 도달하고선, 그 신묘한 경관에 자연 신의 섭리를 덩달아 떠올리는 게 당연했지 싶습니다(말은 이렇게 했으나 유럽인으로서 최초로 이를 "발견"한 사람은 스페인 제국 신민이었던 켑틴 카데나스라고 책에 나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할 생각이 없고, 반대는커녕 흔연히 동참까지 하고 싶어집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보면 말라키아 수도사가 이런 말을 인용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늘은 위에, 땅은 아래에.
기적 중에 기적이로다."

하물며 이런 절경을 두고 어찌 섭리의 신통함을 연상치 않기가 쉽겠습니까(물론, 냉철한 지성으로 엔트로피의 랜덤 워크를 먼저 염두에 둔다면 그 역시 멋진 일입니다). 또, 미국 기독교인들은 그야말로 구절양장의 교리와 입장들을 지녔으며, 프로테스탄트라고 한들 결코 신앙 고백과 신조가 세세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유독, 극히 일부 근본주의자들만이 이 아름답고 웅장한 지형에 대해 왜곡된 의미를 부여하며,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이 협곡의 역사가 불과 몇 천 년 전"이라는 반지성적 결론을 강변합니다. 그 몇 년 전이라 함은 노아의 홍수 시절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축자주의 입장을 취한다고 해서 모두 반지성적이라거나 극단, 편협의 비난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은총 중 하나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 지성의 작동 결과, 우리는 현재 우리가 발 디디고 선 지구의 나이, 우주의 이력이 대략 어느 정도인지 상당한 논거를 가지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미래에 또 어떤 과학적 천재가 나와 인류에 새로운 눈을 띄워 줄지야 아무도 모르긴 하겠으나, 현 단계에서 가장 뻬어난 지성들이 합의를 어느 정도 이룬 이상 단번에 뒤집힐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이만큼이나 인식의 지평을 넓힌 것 역시, 신앙인이라면 그에 대해서도 "전지전능한 신의 은혜"라 못 새길 바 없습니다. 이 역시 넓은 의미에서 신이 인간에게 계시한 바인데, 어찌 가볍게 기각,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현재 자연과학의 성과가 이처럼이나 힘들여 일궈 놓은 바를, 문자 그대로 자연과학 지식을 가르치는 게 주 목적이 아닐 성경 구절의 포괄적 문언 몇 마디를 들어 배척한다면, 이는 상당히 우려스럽고 개탄스럽기까지 한 현상입니다. 이른바 창조과학이 한국에서 일정 반향을 일으킨 건 대략 삼십여 년 전입니다. 여기 가담하신 분들이 한국(그 교육 열풍 극성스럽기로 유명한)에서 단연 몇 손가락 안에 들만한 지성인들이 많았기에, 그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지금 이 책의 저자께서도 (유감스럽게도) 그 그룹에 열성으로 참여하신 분이었죠.

학문적 성취 높은 정통파 물리교육자이며 동시에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젊은 시절 정말로 신앙과 학식의 조화로운 지점을 한때 발견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창조과학이나 근본주의는 그시절이나 지금이나 결코 기독교의 주류였던 적이 없습니다. 계몽주의와 이성의 재발견 역시 처음에는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주도했고, 교회의 주류는 처음에야 마음이 불편했겠어도 인류 문명의 도도한 발전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이들 상당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론의 학습에 대해 별 갈등을 못 느낍니다. 교단의 주류가 이를 승인하고, 그 이전에 상당수 신도들이 넉넉히 세속화된 이유도 한몫 합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저자께서 통렬한 반성과 회심의 계기로 이 책을 저술하셨기에, 독자로서 공감하며 그 취지에 대해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고요.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자연과학, 그 중에서도 지구과학 부교재로 아주 유익하게 읽었다는 점 고백하고 싶네요. "부교재"라기보다, 외려 표준적 교과서보다 더 설명이 자세하고 도판이 미려하여, 그간 긴가민가했던 지식 사항이 말끔히 정리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랜드캐니언의 사진, 연구 결과가 세심히 반영된 도판, 그래픽 등은 어디서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그래픽은 텍스트만큼이나 작성자의 학식과 명철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라, 막힘 없이 훤히 진상을 뚫는 대가의 명강의를 청취한 느낌이었습니다.

최고 수준 과학자이기도 한 저자이시니만치 명칭 배경에 대해 어떤 정서적 거부감(이교풍이라는 등)을 느끼진 않으시겠으나, 너무도 이질적인(서유럽인 기준으로) 힌두의 신들 이름(이들 중 상당수는 근래 들어 부쩍 컨택이 잦은 인도 문화 유입 때문에 친숙하기도 합니다), 북미 원거주인 토착어 등을 딴 지층 명 때문에 당혹감이 적지 않다는 솔직한 느낌도 실려 있어 독자로서 웃음을 머금게도 되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무슨 잘 알지도 못하는 브리튼 섬, 스위스나 독일의 산맥 이름을 딴 학술명칭이 처음에야 생경한 건 당연하죠.

Know the Canyon's history, Study rocks made by time.

무슨 소리냐 하면, KTCHSRMBT란 두문자를 순서대로 외우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열풍인 공시(공무원 선발 시험)에서 주목을 받곤하는 두문자 암기법이 떠오르기도 하죠(사실 본질이 같아요). 카이바브, 토르웹, 코코비노 사암(sandtone. 沙岩), ... 하는 식의 9대 주요 지층(그랜드 캐니언의)을 일단 암기하고 있어야 연구의 프레임이 잡힐 텐데, 전문가들도 정작 이게 쉽지 않은가 봅니다.

상식적으로도, 대홍수가 났다고 하면 넓고 얕은 하상(河床. 강바닥)이 형성되지 싶습니다. 반면, 콜로라도 강과 그 아래 캐니언은 전형적인 구불구불 사행천입니다. 사행천이 무엇인지는 중학교 2학년만 되어도 다 배우는 내용이죠. 우리들 인간 개체의 평균 수명이 워낙 짧다 보니, 수백만 수억년은 고사하고 몇 천 년 단위의 변화마저도 이해가 어렵고, 모르면 진리 앞에서 겸손해지긴커녕 오히려 짧은 지식을 들이대며 당치도 않은 만용을 부리기 일쑤입니다. 근본주의자이건, 그 반대로 무지하기 짝이 없는 안티 기독교 분자들이건 이런 어리석음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랜드 캐니언은 지질학과 지구과학에 많은 연구 과제와 영감을 던져 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독립된 연구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간 5, 6백만년 전 형성설이 확고한 주류설이었으나, 대략 십 년 전에 1700만년 전이라는 입장이 새로 대두했다고 합니다. 왜 방사성 연대 측정법으로 명확하게 못 가리는가 하면, 이런 계곡의 경우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에 어느 대목에서 연구자들이 함정에 빠지거나 오도될지 장담을 못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방법론이 발전하거나, 새로운 법칙이 정립되기도 합니다. 자연 과학 어느 분야라도 흔히 패턴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진지한 과학자들 사이에선 "몇 천 년 전" 설이 더이상 고려대상이 아닙니다만, 여전히 한국의 "창조과학자들" 중에서는 끈덕진 반론을 펴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튼 상대가 논리로 반격해 오면 정당한 논리를 동원하여 논파, 혹은 설득할 필요가 있고, 무작정 권위만을 앞세워 묵살하거나 과학 외적 논변으로 뭉개고 드는 건 안될 일입니다. p202에서 일단 저자는 반대측 선교사분의 입장을 예거하며 그에 대한 반대논리를 전개합니다. 사실 독자야 이미 진부를 마음 속에 확신합니다만, 그래도 무작정 대세에 기대는 건 비겁한 태도 아니겠습니까? 천에 하나 상대측에 일말의 타당성이 있을 수 있다 가정하고(귀무가설?), 일단은 경청하고 듣는 게, 이 저자분의 결론(학계 주류설)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양측에서 동시에 인용하는 R G 셰퍼드 박사의 논문 내용도 <사이언스>에 등재되었던 것이라 우리 독자들에게는 그 구체적인 전개에 대해 큰 흥미가 생깁니다. 셰퍼드 박사의 결론은 유속(流速)이 증가함에 따라, 측방침식뿐 아니라 하방 침식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건데(p204), 홍수가 얼마든지 깊은 강도 만들 수 있다는 게 이를 인용한 선교사분의 요지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실험은 사전에 인위적으로 수로를 만들어 두고 실시한 실험이므로, 애초에 홍수의 효과를 시뮬레이션하는 논지와 무관하다고 재반박합니다. 여튼 논쟁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자연과학 지식은 많다고 헤야겠습니다. 또, 제아무리 한쪽 입장이 진리라는 쪽으로 심증이 기울어도, 그 과정 하나하나에 절대적 타당성이 부여된다는 게 역시 쉬운 일은 아니라는 점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정직한 느낌으로는 저쪽 반박(창조과학 측)도 만만치 않았다는 편이었거든요. 이겨도 뭔가 많이 맞고 이긴 기분이랄지요. 하긴 일부 맹목적 기독교 안티들처럼 뭘 모르면 그저 목소리만 높이고 악다구니만 써도 창피한 줄을 모르므로 편하긴 합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말입니다.

그랜드 캐니언은 협곡 지형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 협곡을 흐르는 물줄기를 가리키기도 하는 맥락으로 이 책에서는 쓰입니다. 지류, 지지류, 지지지류 등 다양햔 층위의 흐름에 대해서도 독자는 유의하며 책을 읽어나가야겠습니다. 저자가 거론하시는 핵심 논거 중 하나가 지류와 지지류(혹은 그 하위 레벨)가 만나는 "각도"인데(라디안 단위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 쓰는 "도[度]"입니다), 표본으로 대표성을 잘 갖춘 케이납 크릭의 예를 듭니다. 왜 이들은 90도 이상의 둔각으로 만나는가? 오랜 세월에 걸친 느린 침식 과정이 결정적 형성 요인이었음을 증명한다는 저자의 논변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저자의 태도는 마치 존 스튜어트 밀의 리캔테이션이나 파스칼의 겸허한 고백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책 말미에는 도널드 트럼프 같은 성향의 정치인을 지지하는 일부 근본주의 진영에 대한 거듭된 우려, 복음주의와의 차별성 등에 대한 소신 개진이 있는데, 이 역시 진지하게 읽고 독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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