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흉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장편은 이미 1992년에 발표되었고, 한국에서도 같은 출판사에서 몇 번 출간된 적 있습니다. 이분이 워낙 다작을 하시는 분이라 어지간한 팬의 입장에서 챙겨 읽는다고 하는데도, 전에 읽었던 작인지 여부가 간혹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10페이지를 넘길 즈음에서는, 아스라이 십수 년, 혹은 수십 년 전의 감흥(개인화된)이 그 줄거리에 앞서 먼저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최소한 이분의 작품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세계 스펙트럼은, 한 축에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놓여 있고, 다른 반대편 축에 <질풍론도>가 자리했다고 봐도 됩니다. 잔잔하고 소박한 톨스토이풍 우화에서 시드니 셸던 스타일의 정신없는 스릴러까지, 어찌보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중에게 가장 손쉽게 어필할 통속 문학의 빤한 경로를, 욕심 가득히 만물상 좌판처럼 벌인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는 팬이건 무덤덤한 축이건 간에, 이분에게 애써 그런 부당한 곡해 프레임을 씌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게 봅니다(어지간히 속이 배배 꼬인 못난 늙은이의 나잇값이 아니고서야 말이죠).

이유가 뭘까요? 그는 어떤 얘기를 늘어놓아도 장르에서 지키는 최소한의 규칙을 "모범적으로(참 모범적입니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인데)" 준수하며, 말미에는 언제나 따스한 주제의식을 집어 넣습니다. 이게 당치도 않은 가식이어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작가, 작품도 따로 있습니다만, 이분의 시도는 그리 요란, 유난을 떨지 않고 어찌보면 좀 진부한 테마인데도, (우리 독자들이 평범, 범속해서인지) 끝에 가선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져 옵니다.

저는 그 이유를 단 한 마디로 요약하고 싶은데요. 그건 "이분이 본래 마음이 착한 사람이어서다."입니다. 세상을 따스하게 보고 싶고, 품고 싶고, 가능하면 낙관하고 싶으며, 결국은 좋은 사람이 이기고 잘 되는 걸 보고 싶은 작가의 착한 마음은 거의 어떤 작품에서건 표현됩니다. 또 그 진정성은 독자에게 거의 언제나 소통에 성공합니다. 소통 성공의 필요충분조건은 진정성이겠으므로 결국 그말이 그말이긴 합니다만.

그냥 착하기만 하고 재미는 좀 떨어지느냐, 그건 뭐 누구라도 동의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히가시노 상 하면 첫째가 재미인데 뭔 소리냐"며 대뜸 반박이 날아올 겁니다. 이 작품은 제가 초회독 할 때도 참 정신없이, 말 그대로 페이지터너에다 몰입할 수 있던 그런 장편이었고, 세월이 좀 지나다보니 플롯이 발전할 때마다 느끼던 흥분, 기대는 다시 재생되어도 줄거리가 좀 가물가물해서 더욱 즐거웠던 재독이었습니다.

일단 이 장편은, 아마도 한국 독자(혹은 영화 팬이라고 해도)들이, 이런 식의 스릴러 공식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을 무렵에 (작가분의 본국에서) 발표되었고, 한국에 번역되었을 터입니다. 이 정도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와 사람을 이처럼 미치게 몰입시키는 명작"이라며 대중 문화에 아직 세련된 길이 덜 든 이들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시작부터 대체 뭔 상황인지 독자가 감도 채 잡기 전에 화들짝 장면을 바꾸고 충격적인 진상을 드러내며, 이 테크닉이 효과적으로 남긴 서스펜스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스테이지의 강약 세팅이 바뀝니다. 시작이 이리 현란하니, 앞으로 독자는 뭘 기대했건 그 이상의 플롯 롤러코스터를 탑승할 수 있으며, 이 게임에서 무슨 수를 두건 지레 돌을 던질 각오에 오히려 쾌감을 느낍니다.

미국 장르물에서 영향을 받았건 안 받았건, 그 구조와 상상이 과연 얼마나 독창적인 잎맥과 물관을 지녔건 간에, 재미있게, 슬프게, 오싹하게 책 한 권 잘 읽은 독자는 개운해진 제 감정을 뿌듯해하며 아무것도 묻거나 따질 마음이 안 듭니다. 여튼 확실히 정화된 내 마음이니 구태여 잡된 생각을 서둘러 들일 이유가 없겠는데, 위대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작가로서의 선의와 도덕성, 천진한 창작자의 무구한 심성만큼은 어느 문호가 부럽지 않은 그이기에, 작품의 완성도 따위보다는 (문학 본연의 기능인) 소통과 감동을 언제나 우리는 쌍수 들며 환영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확신합니다. 이보다 더 공공연한 비밀, 단단한 컨센서스도 없고, 이것이야말로 히가시노 상이 보유한 "아름다운 흉기"입니다. 부디 아껴서들 읽으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