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새롭게 믿는다면 - 다시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교회와 크리스천이 가져야 하는 새로운 생각
박광리 지음 / 패스오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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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라면 육신을 갖고 사는 생(生)에도 "거듭남"이 필요하고(p253), "믿음'에도 역시 "새로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실 믿는다는 행위가, 그냥 시간만 오래 끈다고 믿음이 깊어지는 게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반성 없고 타성에만 젖어 끌고 가는 신앙은, 초심이 사라지고 형식과 건성만 남아서는 믿음의 순도를 더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집과 편견 역시 갱신, 혁신의 계기를 가지지 못해, 자칫 잘못하면 오도된 믿음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행위나 신념도 그렇지만, 신앙 역시 "새롭게 믿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겠습니다.

어떤 신앙 서적이든 그 무게가 가벼울 수야 없습니다만, 이 책은 본문에 담긴 권고와 단어와 문장의 무게가 상당해서, 페이지를 넘기는 데에 시간이 꽤 오래 걸렸습니다. "이렇게나 심각한 책이었던가?" 책 중에는 그저 달콤한 말로 독자에게 값싼 위안을 시도하는 게 있고, "찔려서" 함부로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 중 후자에 속합니다. 독자들이 믿어 왔던 건 그 중 상당수가 그릇되었었구나, 그건 믿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을 모독하는 짓이었구나, 그만큼이나 오랜 시간 동안 믿어왔음에도 방향이 잘못되었더랬구나, 이런 생각 때문에 아마 이 책이 쉬이 넘겨지지 않는 게 많은 분들의 공통된 체험이지 싶습니다. 어떤 말씀은 폐부를 찌르는 듯 아프고, 어떤 말씀은 감긴 눈이 뜨이는 듯 시원하고, 어떤 말씀은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독자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하긴 없는 시간을 내어 책 한 권을 읽고, 독서 전과 후가 이 정도는 달라지고 감흥이 느껴져야 마땅한데, 우리 주변에선 그런 책을 접하기가 참 힘듭니다.

목사님은 특히 자유의지에 대해 따끔히 한 말씀 하십니다. "지나치게 강조된 자유의지는 오히려 성경적이지 못하다." 많은 분들이 그런 말을 하죠. "어째서 하루 종일 일한 일꾼과, 나중에서야 도착하여 일을 조금만 한 사람의 몫이 서로 같은가?" 저자는 아무도 손해를 보거나, 부당히 여길 만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일한 사람은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았고,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늦게 와서 배를 주리게 된 사람조차 배를 주리지 않게 은혜를 받았으니, 오히려 모두를 차별 없이 사랑하는 신의 섭리가 증명된 셈입니다.

"평생 동안 아버지 곁에서 일한 나와, 타락한 생활로 인생을 허비한 저 몹쓸 녀석이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러나 아버지가 하는 말은, "너는 너라서 귀한 아들이며 나와 함께 그 모든 은혜의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느냐. 저 녀석은 이제서야 제 잘못이 부끄러운 줄 알며 헛되이 보낸 인생을 한탄하니, 알차게 잘 산 네가 왜 네 동생을 미워하느냐." 신의 사랑과 이치는 결코 마구잡이가 아니라는 점을 저자는 특히 강조합니다. 인간들이 이해 못 할 방식으로 다만 세상을 다스리고 인간을 사랑하실 뿐이라는 거죠.

영화 <미션>에 보면 그런 대목이 있습니다. 노예 상인이었던 로버트 드 니로가 자신의 죄악을 모두 뉘우치고 자발적으로 무기 등을 싸짊어진 채 과라니 족의 거주지(높은 벼랑)까지 오르며 고행을 합니다. 고행이라기보다 잘못하면 미끄러져 죽는, 목숨 걸고 벌이는 모험인데, 그가 다 올라오자 과라니 족은 한때 짐승이나 포획하듯 동족, 형제, 부모, 자식, 가족을 잡아가 노예로 팔아먹은 이 인간 말종을 둘러싸고 알아듣지 못할 말로 한 마디씩 합니다. 노예 상인은 맞아 죽거나 찢겨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참담함, 한편으로는 공포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는데, 이 사람의 진심을 안 주민들은 천진하게 웃으며 마치 어린이들이 지난 원한을 싹 잊듯 그를 토닥입니다. "너희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자에게 행한 게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게 바로 신이 대신해서 행하는 용서인 줄 알고, 노예 상인은 웃음과 회개가 교차하는 극한의 체험 속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사람에게 구원에 대한 책임이 있다면, 사람의 공로도 있긴 하다는 뜻 아닙니까?" "신의 은혜로 이미 구원 받고 안 받고가 결정되었다면, 우리 인간은 가만 있기만 하면 될 것이 아닌가? 모든 게 팔자소관이란 동양식 미신과 아무 차이가 없지 않은가?" 여기 대해서도 저자는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명쾌한 답을 내어 놓습니다. "하나님은 본디 인간에게 죄를 선택할 자유까지 주었으며, 그래서 완전한 자유인 것이다." 앗수르(아시리아)는 신의 도구가 되어 북이스라엘을 파괴합니다만, 그들이 무엇을 알아서 이스라엘을 단죄하는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심판은 신이 행하며, 앗수르의 서슬 퍼런 창날과 무자비한 전차는 그의 도구일 뿐이죠.

왜 우리는, 우리보다 적게 일하고 삯은 똑같이 받는 이웃에 대해 불편해하고, 그런 신의 섭리에 대해 부당하다고 여길까요? 저자는 "이는 부조리나 불평등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 느끼는 이의 탐욕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아수르는 저들의 탐욕 때문에 이스라엘로 쳐들어와 문명을 말살했을 뿐, 어떤 우월한 깨달음이나 자격이 주어져서 그리한 게 아닙니다. 무엇의 도구처럼 쓰이는 신세만큼 처량한 게 없습니다. 도구에게는 아무 의지도 축복도 존엄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웅리가 우리 자신의 섣부른 기준으로 누구를 재단한다면, 이는 신의 주권에 도전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의 행복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고 든다면, 신의 선물로 주어진 자유의지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소중한 자녀가 아니라, 탐욕으로 가득한 도구 신세로 떨어지겠다고 차청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의 자녀라면 그 주권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요셉은 이런 이치를 일찍부터 깨달았기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형제들의 무도함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구원 받은 이는 이처럼 매사에 초연하며, 누구도 감히 그의 내적 평화나 지혜를 침노할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긴 게 잘났다고, 더 똑똑하다고, 아버지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다고, 온갖 모함과 저주와 질시를 그 동생에게 퍼붓고는, 급기야 노예 상인에게 신병을 팔아먹은 자들이 어디 사람입니까? 율법 시대라면 어떤 잔혹한 형벌을 받아도 마땅할 패륜아들입니다. 그러나 만약 요셉이 이런 이들에게, 사람의 판단으로 정당한 "복수"를 꿈꿨다면, 그는 용모도 지혜도 똑같이 그의 형제들처럼 추하고 어리석고 저열한 단계로 떨어졌을 겁니다. 짐승과 같이 놀면 같은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대신 그는 지상에서 가장 부유한 왕국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심판이고 섭리입니다. 그 형제들도 각각 (먼 훗날)12지파의 수장이 되었을 뿐, 어떤 참혹한 죄과를 치르지는 않고, 눈물로 회개한 후 새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신의 섭리란 이처럼 인간의 협소한 정의감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저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와 비교해 보십시오. 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빅 픽처가 있다." (p263)

칼뱅은 인간의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오로지 신의 선택과 구원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정"이란 말로 표현됩니다. 이미 칼뱅 이전에 "왜 유대인은 구원 받지 못하는가?'"를 두고 사도들의 고민이 이미 있었습니다. 이때 그 결과로 도출된 유명한 말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입니다. 사실 이 점은 장 칼뱅이 로마 가톨릭을 공박할 때, "구원에는 선행, 행위가 필요하다"는 상대측의 교리 허점을 지적하려는 역사적 의도도 있었지요. 그런 태도는 유대인들(당신네 구교도들이 그렇게 미워하는)의 입장과 뭐가 다를 바 있냐는 겁니다. "예정, 구원"은 분석 대상이 아니라, 그저 "선포"될 뿐이라는 말씀을 다시 새겨봐야겠습니다.

저자는 본디 메디컬 엔지니어링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 재직하다 "새로 믿고 새로 태어남"의 체험을 통해, 2012년 목사님으로 완전히 다른 경력을 시작한 분입니다. 분당은 신도시 설립 당시부터 교회 많기로 유명한 동네였고, 그 중에서도 이름난 분당우리교회에서 오래 사역자로 봉사해 왔습니다. 2016년 이 교회로부터 분립하여 "우리는교회'를 개척하여 지금에 이릅니다. 성경 본문이 매우 자주 인용되며 그 깊은 의미에 대한 해박한 고찰, 무엇보다 오랜 세월 갈등과 번민의 산물일 듯한 깊이 있는 깨달음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신앙 서적은 본디 독자를 다독이기보다는, 독자의 부족한 면을 호되게 깨우치는 책, 부끄럽게 만드는 책이 좋다는 생각이며, 그런 이유에서 이 책은 간만에 만난 "만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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