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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직업의 역사 ㅣ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8
이승원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은 시간을 펨토초로 나누기 시작했고, 크기는 테라바이트로는 어림 없을 만큼 커졌다. 더 이상 평생 직업은 없다. 대부분이 여러 직업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일에서는 꽤 오래, 다른 일은 스치듯이 지나갈 수도 있다. 유망했던 직업이 쇠락하고, 새로운 직업이 떠오를 것이다. 직업의 흥망성쇠도 빠르게 움직일 것이다. 직업이 궤도에서 벗어나 사라진다고 해도 그 자리와 기억의 부스러기들이 남는다. 이 책은 사라진 직업을 기억하는 책이다.
저자는 사라진 직업을 통해 역사를 관통하는 삶의 모습을 찾아내고, 시대를 읽어낸다. 읽다보면 한 직업이 이름과 모습은 달라지지만 그 안의 본질적 요소는 달라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변사와 성우가 이러한 경우다. 과거의 변사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변사가 직접 무성 영화의 스토리를 이해하고, 맛깔나게 목소리를 입혀야 했다. 사람들은 변사의 목소리에 울고 웃으며 배우보다도 많은 영향를 끼쳤다. 이에 변사들의 권력은 점점 더 커지고 변사에 의해 극장이 좌지우지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성우가 이렇게 큰 영향력을 미치지는 않지만, 여전히 외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성우의 목소리는 캐릭터를 더욱 친근하게 만들어준다.
다른 경우로 전화 교환수와 114 안내원이 있다. 이 둘의 모습의 차이는 전화를 직접적으로 연결해 주는가 아니면 간접적으로 연결할 수단을 안내하는가가 유일하다. 이들은 장시간 동안 반복되는 말과 행동, 고객들의 불만이나 희롱에 따른 감정노동까지 매우 유사하다. 전화 교환수는 일정한 자격 요건을 통해 뽑인 여성들이지만, 모던 걸이라는 조롱섞인 단어로 묶여졌다. 전화가 당시의 상당히 고급 서비스업이기는 하지만 고객들은 그들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못한채 연결이 조금만 늦어져도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지금의 114 안내원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장난 전화와 취객들을 상대해야 하고 애꿎은 비난을 피할 길이 없다.
변사와 성우, 전화 교환수와 114 안내원 다른 듯 하지만 같은 두 직업군을 통해 직업의 변화성을 알아볼 수 있다. 직업이 사라지지만 어떤 직업은 변화를 통해 모습을 이어간다. 이를 통해 현대의 직업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조금이나마 추측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일본의 근대화 노력에서 인력거가 탄생했다. 자연히 생겨난 직업인 인력거 꾼을 통해서 시대상의 변화를 볼 수있다. 최초의 인력거 꾼들은 개인의 인력거 꾼으로서 꽤나 고급스러운 직업군으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근대화가 계속 진행되면서 도시의 도로 정비가 완료되고, 좁은 길에도 차가 다니기 시작하고, 전차와 버스가 늘어나면서 인력거 꾼들은 점점 밀려나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홍등가에서만 일하는 처지가 되어 향락 산업을 부추긴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한 직업이 어떻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지 보여주는 대표적 직업이다.
저자는 신문자료를 바탕으로한 다양한 사료와 연구자료를 통해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러 재미있는 일화도 소개하는데, 그 중 재밌는 것을 하나만 소개한다.
1933년 6월 <별건곤>에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제목은 [100만 원이 생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쓸까? - 100만 원 모르는 그들]이었다. 당시의 100만원은 상상하기도 힘들만큼 큰 금액이었고, 지금의 약 100억을 훌쩍 넘기는 액수였다. 당시 최하층민이었던 인력거꾼 '이 서방'에게도 질문했다. 이 서방은 기자가 분명 미친놈이거나 정신병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자가 만약에 있다면 어디에 쓸 거냐고 자꾸 채근하자 그때서야 이 서방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이 서방은 100만 원이 생기면 경성에 있는 자동차를 모두 사들인 다음 그 자동차를 모조리 부숴버리겠다고 했다. (P.137-138 발췌 인용)
이 서방의 대답의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하기도 하다.
무수한 직업이 사라져 왔고 사라질 것이다. 책을 통해 사라진 직업을 읽으면서 직업은 시대의 욕망을 대변한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개인들은 어느새 자신의 소명에 의해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욕망에 의해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시대의 욕망에 의한 직업은 교환 가치만을 가진다. 직업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은 줄어든다. 우리가 시대 가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읽은 내용을 반면교사로 사회의 욕구와 개인의 가치를 구분해 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