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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ㅣ 시요일
강성은 외 지음, 시요일 엮음 / 미디어창비 / 2018년 4월
평점 :
<비열한 사랑을 해왔습니다>
-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시요일 엮음, 시요일, 2018
사랑은 소설로 시작해서 시로서 남는다. 분명 서사가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 가진 건 흐릿한 감정과 잊혀지지 않는 장면들이다. 수백 겹의 사랑이 단 하나의 이별로 남았다. 오늘은 사랑하지 않는데, 내일은 사랑한다. 널뛰는 감정을 감출길이 없어 술잔을 채우고, 책장을 뒤적인다. 한 권에 시집에는 몇 개의 사랑과 몇 개의 이별이 있다. 게걸스럽게 시집 속이별로 밤을 축인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넣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남진우,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中
사랑보다는 이별을 더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이별하면서 산다. 사랑은 끝난 지 오랜데 지난 자국들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당신보다 내가 더 미운데 어쩔 줄 모르겠다. 문지를수록 마음에 가득 번진다. 따끔거리는 상처 딱지를건드리며 거기에 여전히 흉터가 있음을 기억한다. 사실 이제 사랑했던 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럼에도 여전히 공터에 남아 앉아있다.
네 동공은 우주 같았고 그러나 빈 우주에서 나는 독백하는 배역을 맡았다 또 한 편의 여름이 재생되었다 나는 일상을 적지 않았다
- 안태운, <피서> 中
나는 여름을 좋아해본 적이 없다. 자주 거짓말했다. 온통 젖어드는 열대야가 싫고, 자주 벗겨지는 태양이 싫다. 그럼에도 손을 놓지 않았다. 몇 번 입김을 불어 손을 말리고, 다시 잡았다. 한여름에 손은 마주 잡지 않아도 축축하다. 다시 또 여름이고, 2주기가 된 여름을 기억한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나면 보낼 수 있다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를 내다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
- 강성은, <忌日>
나는 네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더 이상 같은 세계에 없다고 생각하면 나는 또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그럼에도 어떤 곳에 가면 주변을 살핀다. 이번 생에서 다시 너를 마주치게 된다면 나는 너를 귀신이라고 믿을 것이다. 볼 수 없는 것을 보았으니, 이건 꿈이다. 나는 이생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내일로 걸어간다. 나는 여전히 비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