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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평점 :
최정화 소설 속의 인물들은 저울 위에 올라있다. 작가는 한 쪽으로 기울어 있다고 생각했던 관계가 어느 순간 반대쪽으로 기울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자신의 집에 가정부로 일하러 온 여자가 자신보다 더 이 집에 잘 어울리는 사람인 것 같은 불안을 그린 「구두」, 잘 생긴 외모로 주목을 받던 남편이 사고로 틀니를 하게 되면서 관계가 역전이 되는 「틀니」, 단편집 『지극히 내성적인』에 실린 10편의 소설들은 관계의 변곡점을 적확하게 집어낸다.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 명 이상이 필요하다. 관계는 혼자서는 무게를 잴 수 없는 양팔 저울이기 때문이다. 양팔 저울에는 더 세 명이 올라설 수도 없지만, 세 명 이상이 되면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사회가 성립되어 버리기 때문에 최정화의 소설은 둘, 나와 너에 집중한다. 관계에서 ‘나’는 분명하지만, ‘너’는 분명하지 않다. 「팜비치」에서는 ‘나’는 매력적인 부인과 순진한 딸을 가진 배 나온 중년으로 명백하지만, ‘너’가 되는 인물은 부인과 바람피우는 남자가 되었다가, 갑자기 성숙해진 딸을 희롱하는 벨 보이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저울에 반대편에 있는 인물들은 정확하지 않고 모호해서 나를 더욱 혼란하게 만든다. 나아가 「파란 책」에서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고 나서 세상과 나의 관계의 추를 바꿔놓은 중년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에게 세상은 현존재를 이해하는 사람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그녀는 이제 현존재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울에서 한없이 무거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이해할 수도 없는 책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허위의식을 꼬집는다. 소설집의 표제작이 되는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에는 단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무게중심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가와 소설가가 창작하는 동안 내려와서 산 집의 주인이 주인공이 된다. 오해를 통해 집 주인이 소설가에게 적의를 품게 되면서 자신이 원한 관계를 강제적인 방법을 통해 확인받고자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의 추가 기우는 이유 역시 흥미롭다. 「홍로」에서는 두 인물 사이의 ‘거짓말’이 그들의 균형을를 무너트리고, 「오가닉 코튼 베이브」에서는 ‘정당성’이 무게중심을 뒤흔들어 놓는다. 최정화가 포착한 이런 순간들은 몰락하는 세상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거짓말을 통해서 한층 더 타락한 세상과 선악과를 베어 문 아담과 이브 이래 한 번도 좋아진 적 없는 모습을 그려낸다. 더불어 허위의식과 정당성이 한 사람을 얼마나 우습게 만들 수 있는지, 또 스스로를 억압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소설에 끝에서 인물들은 선택하지 않는다. 양쪽 다 선택할 수 있지만, 선택하기 직전에 멈춘다. ‘지극히 내성적인’ 인물들이 가까스로 무게 중심을 잡고 있는 순간을 보여준다. 양팔 저울은 균형을 맞추고 있다가도 조금만 무게 중심이 깨지면 한쪽으로 확 쏠리게 된다. 최정화의 소설은 그 몰락 이전의 찰나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거짓말, 허위의식, 정당성 등의 징후를 통해 이 세계의 윤리를 재조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