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소설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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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랑이 끝난다. 가만히 앉아 언제 사랑이 끝나기로 했는지 생각한다. 관계가 끝나는 것은 이별은 말하는 순간이지만, 우리의 사랑은 이미 끝나 버렸거나 조금 더 지속된다. 사랑이 끝나도 관계를 끝내지 못했다. 혹은 사랑은 끝나지 않았는데 관계를 끊어버렸다. 우리는 사랑이 언제 끝났는지 알 길이 없어서 공허한 마음으로 종일 물음에 대답한다. 어느 순간 우리 사랑이 끝나기로 했는지.

 

임마누엘 카레르의 작품 <러시아 소설>은 크게 두 줄기를 가지고 있다. 구소련의 마을 코텔니치에 임마누엘이 다큐멘터리 팀을 꾸려 정신 병원에서 50년을 보낸 남자를 만나러 간다. 만남은 순조롭지 않고,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되기에는 빈약하다. 임마누엘은 그 남자에게서 외조부의 모습을 발견한다. 한 남자의 역사에서 임마누엘 개인의 역사를 찾는 과정으로 이야기로 나아간다. 또 다른 줄기는 임마누엘의 여자친구, 소피다. 둘의 연애는 구구절절하다. 각자의 사연과 이유가 있다. 끊임없이 자신을 변호하고, 상대를 탄원한다. 임마누엘이 소피를 위해 <르몽드> 지에 쓴 소설이 관계에 커다란 변곡점이 된다.

 

임마누엘 카레르의 <러시아 소설>은 제목과 다르게 소설이 아니다. 임마누엘의 실제 이야기를 논픽션으로 다룬 문학 작품이다. 소설가의 다른 작품인 <리모노프>가 실제와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문학적 성취를 이뤄냈다면 <러시아 소설>에서는 가상 같은 실제의 세계를 통해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러시아 소설>이 서스팬스를 만들어내는 지점은 소피와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들과 섞여서 나오면서 과연 이 커플이 어떻게 될지 궁금증을 유발해낸다. 논픽션 안에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고, 실제 작가 개인의 연애사가 작품의 전반에 등장하면서 과연 이 작품이 어디까지 솔직한 것일까 의심을 품게 된다.

 

우리는 다큐멘터리가 가장 사실에 가까운 작업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감독에 의해서 연출되고 편집되기 가장 쉬운 장르 역시 다큐멘터리이다. 조작하고자 한다면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극영화보다 훨씬 더 위험하게 작동할 수 있는 것이 다큐멘터리이다. <러시아 소설> 역시 논픽션이라는 장르에서 작가가 실제를 꾸밈없이 서술하고 있다고 독자는 믿고 있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아무도 확언할 수 없어진다.

 

여기서 위태로워지는 것이 소피라는 인물이다. 소피는 전적으로 서술자이자 화자인 임마누엘에 의해서 창조된다. 작품 속에서 소피는 우유부단한 인물로 임마누엘을 배신하면서도 헌신적이다. 소설의 끝에서 소피와 임마누엘은 각자 자신의 길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과연 임마누엘이 소피의 이야기를 문학으로 사용해도 되는 것일까? 윤리적인 측면에서 임마누엘이 소피의 이야기를 전면에 부각시켜서 작품을 만드는 것은 소피에 대한 폭력이 되지 않을까? 의심을 거둘 수 없게 된다.

 

이 둘의 사랑이 끝난 건 언제였을까? 카레르가 다리를 다친 소피를 두고 러시아로 떠났을 때였거나 혹은 카레르가 외딴 마을에서 단단한 신문기자 갈랴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을 때, 안나는 재활원에서 만난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때인지도 모른다. 둘은 서로에 대한 믿음을 거두고 나서도 쉽사리 관계를 종료하지 못한다. 그들의 사랑은 언제 끝나는가. 임마누엘이 책의 탈고를 마쳤을 때? 소피가 <러시아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위태로운 작품 안에서 우리는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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