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 재욱, 재훈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5
정세랑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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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 재욱, 재훈- 한 줌의 친절을 심는 일


  혐오와 폭력이 넘치는 세계에서 친절을 움켜쥐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의 친절이 어떻게 되돌아올지 모르는 시절이기 때문이다. 정세랑의 소설 재인, 재욱, 재훈에서 특별히 애틋하지 않은 삼 남매가 피서에서 돌아오는 길에 형광색 바지락칼국수를 먹고 초능력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초능력을 얻는다. 재인은 손톱이 단단해지고, 재욱은 위험을 볼 수 있게 된다. 재훈은 엘리베이터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를 구원할 수는 없을 만한 초능력이다.

 

  이들은 각자가 갖게 된 초능력으로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구조한다. 재인은 강해진 손톱으로 룸메이트를 구하고, 재욱은 전쟁의 상흔을 입은 두 소녀를 구출한다. 재욱은 환각 버섯을 먹은 복용자들의 총알로부터 친구 세 명을 보호한다. 우연하게 얻은 초능력으로 그래야 하는 것처럼 주변 사람들을 돕는다. 거기에는 어떤 기대도 없다. 흔히 초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들이 갖는 나의 정의로움으로 이들을 구원하겠다는 묵시록적인 비장함이 없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친절을 자연스럽게 주변에 베푼다. 그 과정에서 있을지도 모를 불이익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너무나도 다정하게 초능력을 주변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 지금 이 순간을 구조하겠다는 절박함만이 존재한다. 물론 그들이 감당해야 할 불이익은 재인에게는 잠시 피해있을 숙박비, 재욱에게는 하루 무단결근으로 인한 직장 상사의 꾸지람, 재훈에게는 엘리베이터 안의 갑갑한 공기 정도가 전부였다. 이는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이고, 친절을 꺼내기에는 세상은 너무 위험하다.

 

  사건이 끝나고, 이들은 모여서 이야기한다. 아직 세상에 사람들이 스스로 구할 수 있는 곳은 아직 세계의 극히 일부‘(P.164)라고 히어로까지는 아니라도 구조자는 많을수록 좋지 않’(P.164)겠냐고 재욱이 말한다. 거기에 한 마디 덧붙인다. ‘어쩌면 구해지는 쪽은 구조자 쪽인지도’(P.164) 모른다고. 소설 속에서도 이들은 실제로 구해졌다. 그들이 돕지 않았으면 자신들이 피해를 봤을 수도 있는 상황이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오래된 격언이 생각난다. 정말 이들은 구해졌을까? 슈퍼히어로들이 그렇듯 다른 사람들을 구조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빠져 오히려 자신들이 구원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지는 않을까? 아마 아닐 거라고 믿는다. 그들이 우연으로 얻은 초능력은 변변하지 못해서 강철 손톱’, ‘위험을 감지하는 눈’, ‘엘리베이터를 지배하는 자로 불리기에는 민망하다. 그저 새로 생긴 능력들로 미운 사람을 아프게 꼬집어 주고, 가스 밸브 잠그는 일을 까먹지 않게 되고, 엘리베이터로 인해 지각하는 일이 없게 될 뿐이다. 아직 놓치지 않은 친절로 아직 세상에 온 적 없는 구원자를 대신해서 일상을 구조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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