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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 120년 만에 밝혀지는 일본 군부 개입의 진상
이종각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 책제목이자 곧 사건의 본말을 파혜치기 위한 화두어 이다. 2009년도, 재일교포 사학자 김
문자 선생의 < 조선왕비 살해와 일본인 > 2009년이란 책을 통해서 우치다 영사가 하라 외부 차관에게 보낸 비밀 서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 경성 수비대육군 소위에 의해 왕비가 피살되고 , 미야모토 소위가 바로 그 당사자로 보인다는 사실 관계자료에서 출발한 이책은 이전의
추리 논증이나 역사적 고찰 없이 다만 일제에 의해 전해저 내려온 그냥 단순한 낭인 폭도들의 집단에 의해 무참히 살육 당한 당시 궁궐 안의
아수라장을 생각해 볼때 일대 사건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무지 몽매한 대한 국민 백성들이 이재껏 , 나라님의 말슴을 잘 듣고 , 하라면 하는 시늉이나라고 밥걱정 하면서 하루 하루 연명
하던 시절, 그리고 , 을미 사변 이후의 아관파천과 더욱 복잡 다단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의 시나리오에서 결국 1905 년 한일 합방 까지 거침
없이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을 본다면 단순한 광기 어린 집단이 아닌 , 치밀하고도 조직 적인 군부의 개입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 작전" 의
성격인 것이다...
그간 많은 사료로서의 자료를 대체 해준 < 우치다 보고서> 등에서는 이미 많은 조작과 은폐가 된 상태에서의 공식 문건이므로
신회성의 가치가 떨어 진다고 하겠다.
비록 흥선 대원군이라는 꼭두각시를 내세워 또한 조선의 마지막 군대 해산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그들을 이용하고 뒤로는 치밀하게 사건을
만들어온 그들의 진정한 배후는 당시 일제 군부의 수뇌부라는 논리에는 심증이 가는 바이다.
단순 낭인 집단들의 폭거 엿다면 , 한국 지리에서도 비밀에 속하는 궁궐 내부 지도와 도랑을 타고 들어가는 진입로 지시까지 완벽 하게 설명
할수 있을까 . 도한 미야모토 소위가 당시 앞장서서 민비를 살해 하지 않았더라면 , 그리도 주도 면밀하게 본국으로 소환 하고 이듬해에 자의반
타의반의 전장터인 타이완의 헌병부로 발령내어 결국 전사자로 군갑 하게 만드는 그들의 용의 주도함에 치가 떨릴 뿐이다.
이작전에 가담했던 일부 군인 집단과 , 작전 세력과 그 배후들 , 영사와 영사관에서는 나중에 되어야 알게 되었다고 하여도 이도한 역사적
사실 은폐에 적극 가담한 죄는 치유 될 수 없는 그들의 역사에 또한 오점을 남기지 않겠는가 .. 본국으로 소환된 사진사와 무전기사의 함구령
, 결국 신사에 까지 합방 되지 못한 당시 살해범의 유력한 용의자인 미야모토 소위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
많은 역사적 사실들과 그에 부합되던 되지 않던 사건의 객과적인 본말을 지켜 보는 입장이라면 , 우선 나라의 약함과 왜소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 서로 내분만 일으켰던 조선말의 상황이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8월 에 들어서기 전 한번 조상들에게 질문 해야 한다고 본다... 왜
그리도 적들을 감싸 안고서 내부 싸음만을 일삼았느냐고 말이다.
나라든 집안이든 망하기 전에 반드시 조짐이 있다고 한다. 의견 불일치의 일로 부터 , 여러가지의 세력 다툼가지 , 당시로서는 그러한
일들이 그들의 존치를 좌우 하는 일이 였기에 그렇게 처신 을 하였겠지만 , 결국 나라를 일제에게 내어 주게 된 연후도 거슬러 올라가면 벌서
1592 년 임진란 전후 부터라고 할수 있겠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미국제독에 의해 1854년 2. 13일 개항을 하게 되고 이후 메이지 유신 ( 1871 ) 이 빠르게 진행되어 그 진보
세력이 주축이 되어 하나의 열강 세력으로 발전 하게 된다. 1883 년 인천항 개항이 이뤄진 조선은 이후 일본인과 러시아 중국인들의 이합집산이
이뤄진다. 1871년의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에서의 미국과의 교전에서는 많은 인명 손실을 보았으나 지켰내었다고자평 하나 이는 또다른 괘적으로의
이행에 불과할 뿐이란것을 역사는 객관화 해서 알수 있다.... 결국 나라의 부강을 키우지 못하고 내부 분란과 외부와의 선진 기술을 제때 받아
들이지 못한 우물안 개구리 식의 조선은 차츰 쇄국정책의 테두리안에 자업 자득을 만들어 낸 부분이 없지 않아 잇지 않을까 ,,, 역사란 돌고 도는
것이라지만 , 만약 우리나라가 일본이란 섬나라 보다 먼저 무기 체계를 확립 하고 , 규율이 잇어 제대로 된 군대를 만들고 , 안으로는 안정과
밖으로는 강건함을 견지 하였다면 , 이리도 쉽게 나라를 이리떼 들에게 넘어 가게 만들었을가 하는 안타가운 생각이 든다.
지금은 다변화된 사회이고 , 다중 무역을 하는 시대 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은 지속적으로 독도 또한 자신들의 영토라는 주장을 지금껏
해오는 바이고 대부분의 초, 중등 학생들은 이러한 교육 환경에서 자라 나왔기 때문에 자국의 역사 틀어짐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 또한 제대로된 역사 의식을 반영한 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다면 통일 이후의 한국의 미래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장담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나라의 부강은 안으로 부터 만들어 나아가야 하고 , 밖으로의 대응도 유연 하게 하면서 받아 들일 건 받아서 배우고 또한 익혀서 나아가야만
한다. 싫든 좋든 우리는 4대 열강 나라들의 틈 바귀에 놓여져 있는 형국은 120년전 민비 왕비의 살해 당시나 현재나 변함은 없다. 다면 ,
정치 , 경제적인 부분으로의 종속이냐 왜곡이냐에 따라 그 방향성이 달라지고만 있을 뿐이다.
자라나는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이러한 부분을 직시 하며, 세계인의 눈에 같이 동참하고 자력으로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들어 나가는데 전
세대간의 힘이 고루 합해져야 하지 않을가 생각을 해보는 < 책력거99 > 였습니다.